• 막달라 마리아(요 20 : 1∼18)
  • 조회 수: 340, 2013.06.20 11:39:41
  • 지난 4월초 이탈리아 토리노 대성당의 내부가 누전으로 인하여 완전히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2천년의 교회 역사를 되돌아보건대 인간의 실수로 인한 화재나 혹은 이교도들의 방화에 의하여 예배당이 불타는 사건은 가끔 있었기에, 예배당 화재 그 자체는 새삼스럽게 놀랄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토리노 대성당의 화재가 많은 세계인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그 성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수의', 즉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것으로 알려진 세마포가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화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화염에 휩싸인 성당 안으로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 3중으로 된 방탄유리를 도끼로 찍어 깨뜨린 뒤, 그`세마포'가 담긴 성궤를 안고 나오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약 30년전 프랑스의 한 잡지사가 세계의 저명인사 100명에게 `지구의 파멸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반출해야할 지구상의 보물이 무엇이냐?'는 설문조사를 했을 때, 1위를 차지한 것이 바로 토리노 성당에 보관중인 `예수님의 수의'였고, 2위가 미로의 비너스상이었습니다. 미로의 비너스상은 인간예술의 극치로 인정받고 있는 걸작 중에 걸작입니다. 실제로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비너스상 앞에 섰을 때의 황홀감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정교한 예술품을 제치고 폭 1m 5cm에 길이 4m 20cm에 불과한 세마포, 예수님의 시체를 쌓던 하찮은 삼베 수의천이 어떻게 인류 최고의 보물로 간주되었을까요? 본문이 그 까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 새,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시몬 베드로도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곳에 개켜 있더라. 그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3∼8)

     

    안식 후 첫날 새벽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 졌다는 여인들의 말을 들은 베드로와 또 한 명의 제자인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으로 뛰어 갔을 때, 무덤 속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세마포와 머리의 수건만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즉, 미의 극치인 미로의 비너스상을 제치고 예수님의 시신을 쌓던 삼베 수의가 지구상 최고의 보물로 꼽히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오늘날까지 이 땅에 남아 있는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거품으로 간주되는 까닭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면, 왜 이탈리아의 소방대원들이 불길에 휩싸인 토리노 대성당 안으로 뛰어 들어가 그 속에 있는 명화나 조각품을, 특히 금은으로 만들어진 호화스런 제기(祭器)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이 세마포만을 목숨을 걸고 반출해 내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2천년전 중동 지방에서 얼마나 많은 세마포가 직조되고 또 통용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숱하던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아득한 옛날 이미 썩어 진토가 되었을 뿐입니다. 어찌 중동지방뿐이겠습니까? 전 세계적으로는 또 얼마나 많은 삼베가 있어 왔겠습니까?

    우리 나라만 하더라도 삼베의 역사는 매우 길어, 한민족이 한반도로 이주할 때에 벌써 삼베를 가지고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삼베의 사용이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역시 신라 경주에서 추석날 삼베 짜기 시합이 있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한반도에서 면이 일반화되기 전에는 삼베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시대 때부터 크게 발달한 마직 기술은 이미 고려 때에 이르러 30승포, 40승포 같은 극세포 즉 본문이 말하는 세마포가 직조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 이처럼 마직 기술이 일찌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풍토상으로 한반도가 삼재배에 더없이 적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역사와 더불어 지난 수천년 동안 이 땅에서 직조되었던 그 수많은 세마포들은 다 어디로 갔습니까? 그리고 지금 이 땅에서 생산되고 있는 그 품질 좋은 세마포들이 2천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겠습니까? 이미 썩어져 흙이 되었고, 지금 쓰레기가 되고 있으며, 또 앞으로 진토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유한한 인간을 위하여 사용되는 인간의 소유는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엔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영원한 생명이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은 그것이 시체를 감싸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의미 없어 보이는 수의라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를 결코 상실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의 세마포는 니고데모가 향품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감싸 드렸던 것임을 요한복음 19장 39절∼40절을 통해 이미 배워 알고 있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2천년전 그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로 삼았더라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흙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영원하신 주님의 도구로 드렸을 때에, 전혀 귀할 것 없는 그 세마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치고 `지구상 최고의 보물'이 되어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먼 훗날 그 세마포가 완전 부식되어 그 형체가 사라져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 영원한 가치만은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똑같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누구에 의하여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가에 따라 그 결과는 이처럼 달라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도대체 무엇을, 얼마나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그것들 중 2천년 후에까지 내게 남아 있을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값진 것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실은 내일의 쓰레기, 미래의 진토더미 속에 쌓여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것이 시체를 감싸는 수의, 아니 삼베조각처럼 하찮은 것이라 할지라도 영원하신 주님, 영원한 진리의 도구로 쓴다면, 그 가치는 영원히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상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들에 대해 소멸치 않는 가치를 부여하시는 분이시라면, 주님의 도구로 사용되고자 하는 사람들을 더더욱 존귀케 하실 것이란 사실입니다. 당신을 감쌌던 하찮은 수의를 지구상 최고의 보물 되게 하시는 주님께서 어찌 당신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않는 당신의 백성들을 더욱 존귀케 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본문 속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출신 마리아란 뜻입니다. 게네사렛 평원의 남단에 위치한 막달라는 농업 어업 제조업 조선업이 발달한 부유한 상업중심도시로써, 도시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원형 경기장이 있었습니다. 대형 경기장을 갖춘 로마의 모든 도시들이 그러했듯이 막달라 역시 환락과 타락의 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한가운데에서 살던 마리아는, 성경 속에 나타나는 다른 청순한 마리아들과는 달리 본래 일곱 귀신들렸던 여인이었습니다(눅8:2). 한 귀신도 아니요 일곱 귀신이나 씌운 여인이었다는 것은, 도덕적 정신적 영적으로 철저하게 타락한, 영육간에 썩을 대로 썩어빠진 창녀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처럼 쓸모 없는 한심한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전혀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날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 좇기를 중단치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줄 안 이상, 주님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순간, 놀란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망갈 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모친과 이모와 더불어 끝까지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음을 요한복음 19장 25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더우기 본문 1절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안식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던 주일 이른 새벽, 아직까지 온천지가 어두울 때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장사되신 무덤을 찾아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른 시각에 그녀가 겁도 없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것은 다른 두 여인과 함께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마가복음 16장 1절∼3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이 어떤 구조를 가졌기에 막달라 마리아가 이미 장사지낸바 된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릴 엄두를 내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주시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이 유월절이 시작되기 몇 시간 전이었으므로, 이미 요한복음 19장 31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 큰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서둘러 끝내어야 했기에, 행여라도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이 덜 발라졌을까 우려하여 주일 꼭두새벽부터 주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의 중심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초점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이 중심이 귀한 까닭은 이때까지만 해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란 사실을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그녀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뛰어가 전한 말의 내용을 2절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에다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2)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예수님의 시체가 도난 당한 줄로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빈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그 앞에서 슬피 울고 있었음을 본문 11절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으로 부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 마저 부활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도망가 버린 판에, 그 말씀을 들은 적이 없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인들 할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자신의 중심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히 돌아가신 줄만 알았음에도 주님으로 인해 얻게 된 영원한 생명을 생각할 때, 주님께 바친 그녀의 중심은 그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흔들릴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막달라 마리아야말로 주어진 상황과 시간에 상관없이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실천했던 진짜 제자였던 것이었습니다.

     

    그때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제 다음 시간부터 계속 살펴보겠지만 본문 18절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놀랍게도 그녀는 주님과 3년동안이나 함께 살았던 제자들을 제치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고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첫번째 증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본래 막달라 마리아는 환락의 도시 막달라의 쓰레기 같은 창녀였습니다. 만약 그녀가 자신만을 위해 계속 살았다면 그녀의 인생은 창녀로 비참하게 썩어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찮은 여인이 주님의 도구로 자신을 온전히 바쳤을 때 인류 최초로 부활을 증언하는 영원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야 말로 부활의 증인일 뿐만 아니라, 아무리 하찮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 인생을 주님의 도구로 바칠 때 그 삶의 가치가 얼마나 영원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증명해 준 위대한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막달라 마리아란 더 이상 비천한 창녀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녀야말로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위대한 신앙의 영원한 표상인 것입니다.

     

     

    네덜란드 `자유대학'(The Free University)에서 미술사 교수로 봉직했던 한스 로크마커(H.R.Rookmaaker) 교수는 그의 저서 `예술은 변명을 요하지 않는다'(Art needs no justification)에서 1800년경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였던 호쿠사이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잘 아는 지인이 호쿠사이를 찾아와 수닭 그림 그려주기를 부탁하자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을 했습니다. 일주일 후에 그가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약속을 2주일 연기해 줄 것을 청했습니다. 2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왔을 때 호쿠사이는 이번에는 두 달을,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반년을 연기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3년이 흘러가자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매우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어 순식간에 수닭을 그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명화였습니다. 그림을 부탁했던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려 줄 수 있으면서 왜 3년씩이나 기다리게 했소?"

    그때 호쿠사이는 말없이 그 사람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은 호쿠사이가 지난 3년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닭 그림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명화는 밤낮없는 훈련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비단 예술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밤낮없는 훈련을 배제하고서는 참다운 프로란 어떤 분야에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 또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왕 주님을 믿을 바에야 어설픈 기독교인이 아니라 프로 크리스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되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밤낮 구별없이 주님께 우리의 중심을, 우리의 전 인생을 드립시다. 상황을 따짐 없이 진리의 도구 되기를 주저치 마십시다. 그것만이 이 타락한 도시 속에서 막달라의 창녀같이 비천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을, 부활의 영광스런 첫 증인이 된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가치롭게 세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만약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을 위해 예비했던 새 무덤 속에 자신의 시체를 눕혔더라면, 그것은 썩은 시체의 악취만을 풍기는 더러운 죽음의 종착역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준비했던 세마포로 자신의 수의를 삼았다면, 그 세마포는 니고데모의 시체와 함께 벌써 진토가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면, 끝내 막달라의 창녀로 그 인생이 썩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 오늘 아침에도 우리를 사랑하시사 주님 앞으로 불러주시고, 나 자신의 본능과 욕망만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실은, 내일의 쓰레기 더미 속에, 미래의 진토 무더기 속에 나 자신을 방치해 두는 것임을 깨닫게 해 주시니 진정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비옵건대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처럼 프로 크리스천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밤이든 낮이든 새벽이든 구별없이 우리의 중심을 주님께 드리게 하옵소서. 주어진 상황을 따짐 없이 우리의 삶이 온전한 진리의 도구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타락한 이 환락의 도시 한 가운데에서 쓰레기처럼 썩어질 수밖에 없는 우리의 비천한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의 가치를 얻고 누리는 진리의 예술품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인생의 종착역이 공동묘지가 아니라, 육체의 생사를 초월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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