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지지 말라(요20:1∼18)
  • 조회 수: 243, 2013.06.20 11:40:39
  • 하나님께서 출애굽기 20장 23절을 통해 이렇게 명령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신상(神像) 즉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십계명의 제 2계명이기도 합니다. 모든 종교에는 신상이 있기 마련입니다. 없는것보다 있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는 신의 상을 지성을 다해 빚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 엄명하고 계십니까? 인간을 진정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셨기에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그 어떤 신상 속에도 갇힐 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만약 누구든지 하나님의 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 믿고 경배한다면, 그는 눈에 보이는 그 우상 때문에 하나님을 온전히 만날 수도 알 수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의 하나님은 신상이 서있는 그곳에만 존재할 것인즉, 그런 하나님은 무소부재의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신상이 사람의 모습이라면 그 하나님은 사람이상의 능력을 베풀 수 없을 것이요, 짐승의 형상이라면 짐승보다 나은 권능을 행사할 수 없을 것인즉, 그런 하나님이라면 전지전능한 하나님일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새긴 우상은 그 새겨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 만든 자가 이 말하지 못하는 우상을 의지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나무더러 깨라하며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 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19)

     

    따라서 당신의 어떤 신상이나 우상도 새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이야말로 이 세상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의 참 존재를 바로 알게 해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아침 참된 신앙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참된 신앙이란 우리 자신들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하나님의 우상과 신상을 끊임없이 깨어 가는 것입니다. 아니, 그리스도인들이란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 주위 어디를 둘러보아도 우리가 하나님이라며 경배하는 하나님의 신상 우상은 없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날마다 깨어가야 할, 우리 자신에 의해 잘못 빚어진 하나님의 우상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하찮을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라고 단정해 버리는, 그리고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지 않으려는 모든 잘못된 사고―이것이 우상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 묶어 두는 행동이나 생각 자체가 우상입니다.

    이와 같이 형체가 없는 내적인 우상이 형체를 지닌 외적 우상보다 더 무서운 까닭은, 외적 우상은 만들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내적 우상은 우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무서운 우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이란 이처럼 우리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우상을 매일 깨어 가는 구체적인 행위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무서운 우상 숭배자였습니다. 손으로 외적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자였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자신의 생각을 신봉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돌로 쳐죽이는 일에 앞장 설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심중에는 가공할 우상이 자리잡고 있었지만 자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더 잘 알고 더 잘 섬긴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심중에 있는 우상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전혀 동떨어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을 지배하던 그 무서운 우상이 언제 깨어져 나갔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뵘으로서 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계시던 동안에 바울은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 다메섹을 향한 길 위에서 주님을 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보았던 예수님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와 같은 사람의 형체가 아니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 의하면 바울 앞에 나타나신 주님은 빛이셨습니다. 보통 빛이 아니라 바울이 며칠동안 눈이 멀 정도의 강하고도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바울의 우상이 깨어져 나갔습니다.

    만약 이때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사람의 형체로 나타나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이 그동안 지니고 있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기존의 우상은 마음 속에 깨어졌을지라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예수님때문에 그는 또 다른 우상을 필히 심중에 만들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두 눈으로 보았던 예수님의 형체 이외의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신다면, 바울은 그 분을 예수님으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이 본 형체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똑같은 모습으로 늘 나타나시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도 몰래 예수님을 자신이 예수님을 뵈었던 그 시간과 공간 속에 가두어 버리는 우를 범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바울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에 사람의 형체가 아닌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빛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빛이 있는 한 내가 어디를 가도 나는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 빛이 있는 한 그 빛은 계속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햇빛을 생각해 보십시오. 햇빛이 있는 동안 동서남북 어디로 가도 햇빛은 나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오전에도 오후에도 나와 함께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햇빛이 있는 동안 햇빛이 나와 함께 하긴 하지만, 그것은 햇빛이 있을 동안 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태양의 빛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리 태양이 빛을 발하고 있어도 내가 땅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 빛은 나와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태양 빛 속에 거하기를 갈망한다 할지라도 밤이 되면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맙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그날 바울에게 이와 같은 햇빛으로 나타나셨다면, 그 햇빛은 바울의 마음 속에 있는 우상을 깨트려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빛은 햇빛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그 빛을 본 시간은 바로 정오 한낮이었습니다. 태양의 빛이 가장 눈부시게 빛날 시간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바울은 햇빛과는 전혀 다른 빛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처럼 그 빛 앞에서는 햇빛이 어둠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죽했으면 그 빛을 본 바울의 눈이 며칠이나 멀었겠습니까? 그 강렬한 빛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깜짝 놀란 바울이 땅에 엎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까?"

    다시 바울의 귓전을 때리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바로 바울에게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왜 주님께서 햇빛을 초월한 빛으로 바울에게 나타나셨습니까? 영으로 바울과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께서는, 햇빛처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고 언제나 바울을 품고 계심을 일깨워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바울은 과거의 특정한 공간이나 시간 속에서 자신의 경험이나 인식으로 빚어 두었던 하나님에 대한 내적 우상을 깨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빛으로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심중에 우상으로 가두어지실 분이 아니심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경험하던 간에,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종착역이 아니라 언제나 시발역이요 하나님을 알아 가는 과정임을 터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돌로 쳐죽이던 바울이 복음을 위하여 날아오는 돌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돌이 날아오는 그 현장에도 주님께서는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며, 그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었던 것입니다. 만약 그가 영원한 빛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던들 있을 수 없는 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 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듣고 황급히 달려온 제자 베드로와 요한은 사실 확인만을 마친 뒤 그냥 집으로 돌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만은 예수님의 무덤을 떠나지 못한 채 그 앞에서 통곡하며 애곡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예수님의 시체가 뉘었던 곳에 흰옷 입은 두 천사가 한 명은 머리 편에, 또 한 명은 발편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마리아를 본 천사들이 마리아에게 왜 그토록 슬피 울고 있는지를 묻자, 마리아는 사람들이 주님의 시신을 어디로 치워 버렸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사실대로 대답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의 등 위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을 본문은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고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14)

     

    인기척을 느낀 마리아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 때문에 그토록 통곡하고 애곡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이시라 생각조차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줄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던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

     

    지금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전 모습이셨고 음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동산지기, 즉 묘지 관리인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이 순간 막달라 마리아는 심중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엉뚱한 우상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반드시 시체로만 무덤 속에 누워있어야 된다는 우상입니다. 무덤 속에 시신으로 안장된 예수님이 살아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우상이었습니다. 그 우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녀는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대화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16)

     

    그때 예수님께서 다정하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동산지기라면 마리아의 이름을 알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묘지관리인이라면 설령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그처럼 허물없이 다정하게 부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제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앞에 서 계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 순간에야,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은 반드시 시신으로 무덤 속에 누워 있어야만 한다는 우상이 마리아의 심중에서 깨어져 나갔던 것입니다.

    본문 17절 상반절은 이렇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여기에서 `만지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손을 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붙잡고 늘어지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28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여인들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예수님의 발을 붙잡았을 때에 가만히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막달라 마리아에게 유독 `나를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본 막달라 마리아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계속 예수님을 붙잡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당신을 계속 붙잡지 말라고 말씀하신 연유를 주님께서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셨기' 때문이라고 친히 밝히셨습니다. 이 구절을 그대로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고 싶으셨지만 실패하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원문은 `못하였다'가 아니라 `안했다'는 것입니다. 승천하지 못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아직 때가 되지 않아 승천치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때로부터 40일 동안 더 이 땅에 계신 뒤에 승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본문의 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했던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확인하고서 너무나 기뻐 예수님을 붙잡고 늘어 졌습니다. 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앞으로도 너와 함께 있을 것인즉 이 순간에 집착하거나 머무르려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에 그치지 않으시고 17절 하반절을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형제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지금은 육신을 가지신 모습으로 너와 함께 있지만 그러나 때가 되면 몸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승천하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만약 이 말씀을 하시지 않았더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또 다른 우상숭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이 나타나시지 않는 한 그는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육체를 가지신 예수님을 찾아 헤매느라 그녀의 남은 인생은 의미없이 허비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육체를 뛰어너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신을 포함한 이 우주를 품고 계신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나를 만지지 말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은 `주님의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뜻이었던 것입니다. 이날 새벽이 막달라 마리아의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그 동안 막달라 마리아가 품고 있던 우상이 깨어진 날이요, 또 다시 태동될 수 있는 우상의 뿌리가 아예 발본색원된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십계명을 통하여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명령하시는 것은, 나아가 타종교의 신상을 부수어 없애라는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마음 속에 우리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하나님에 대한 우상을 타파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예전에 경험한 은혜의 순간에 멈추어 서서 그 경험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특정한 시간 속에 가두어 우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하나님의 또 다른 측면을 체험치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실패한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부정하고 절망하고만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성공이란 공간 속에 묶어 두고 있는 우상숭배자입니다. 그 우상으로 인해 실패의 현장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며 오묘한 당신의 섭리를 이루어 가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느닷없이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절대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면, 나는 하나님을 세상에 묶어 두려는 우상제조자입니다. 그 우상 까닭에 영원한 나라, 영원한 생명을 볼 수도 얻을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흘러가는 물이 멈추면 그 순간부터 물은 썩기 시작합니다. 시간 역시 멈춤 없이 흘러갑니다. 만약 누군가의 시간이 멈추었다면 그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만약 한순간 멈춘다면 그것은 신앙의 죽음이요 우상으로의 전락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영원한 빛으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그 분은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에 멈추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한 순간의 은혜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예전에 체험한 은혜의 순간에 되돌아가려고 하지도 마십시오. 그 모든 은혜의 순간을 새로운 은혜를 위한 발판으로 징검다리로 삼으십시오. 날마다 우상을 깨어 가십시오. 그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서도 자기가 품고 있는 우상때문에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막달라 마리아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때 쇠사슬에 묶여 로마의 토굴 속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삶의 기쁨을 노래했던 사도 바울을 닮을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도 기쁨도 소망도 자유도 우상을 타파한 사람의 심령 속에만 둥지를 틉니다. 그 사람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빛으로 영으로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 주님의 품에 진정 품겨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동산지기인줄로만 알았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은 시신으로 무덤속에만 누워 있어야 한다는 자신의 우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잘못된 우상을 친히 깨어주셨던 예수님! 오늘 아침 우리의 우상을 깨어주시기 위해 불러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빛이요 영으로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온전히 믿음으로 모든 근심과 절망, 혹은 교만과 방종의 우상으로부터 진정 자유하는 참된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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