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덤을 찾아온 한 여인(요20:1-18)
  • 조회 수: 385, 2013.06.20 11:41:41
  •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주님을 사랑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께 대한 진실한 사랑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나타났고 주님이 무덤에 묻히셨을 때 나타났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너무나 타락해서인지 당사자의 앞에서는 칭찬을 늘어놓고 아첨을 잘 하지만 당사자가 없을 때는 비난을 하고 욕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모든 것이 잘 될 때는 가까이 하다가도 모든 것이 안될 때는 멀리하고,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같고 위로하는 것 같다가도 그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뒤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 앞에서는 칭찬하기보다는 충고를 하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허물을 덮어주고 칭찬을 합니다. 그 사람이 잘될 때나 안될 대나 변함이 없이 가까이 하고,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대나 죽은 후나 변함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부활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에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영 더 되는 천군 천사들을 동원해서 얼마든지 원수들을 멸하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만민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만민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려고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순순히 포박을 받으시고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이미 예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장례식 때에 제자들이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모두 다 도망을 간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평소에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대인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믿는 사실을 숨겨왔던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하게 총독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해서 장례를 지냈다고 했습니다.

    이때, 밤중에 찾아온 일이 있었던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식을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한번도 장사한 일어 없는 새 무덤에 장사 지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빌라도 총독은 누구도 예수님의 시체를 손을 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세 가지 특별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1) 큰돌을 가졌다가 무덤 문을 완전히 봉해버렸습니다. 누구라도 혹시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다가 감춰두고 부활했다고 소문을 내면 시끄러워질 것을 염려해서 이렇게 한 것입니다.

    2) 그리고 누가 이 돌에 손을 댈까봐 아예 건드리지 못하도록 총독의 인을 쳐서 봉해버렸습니다.

    3) 빌라도는 이것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군대를 파송해서 무덤을 지키게 했습니다. 아예 보초를 세워서 아무도 무덤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철통같은 방비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혹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도망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예수님의 부활을 정확하게 증거해 주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어리석은 행동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증거해 주고 예수님의 부활을 자세하고 분명하게 만천하에 증거해 주는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장례를 지내고 나서는 죽은 자가 아주 사랑하는 자이면 사흘 동안을 계속 무덤을 방문한답니다. 옛날 우리 나라는 부모의 경우, 아들이 부모 묘 옆에서 3년을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3년 동안에 만약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는 상놈이라고 해서 죽이기까지 하는 엄한 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장례하고 3일 후에 다시 묘지를 방문하는데, 이스라엘에서는 3일 동안 계속 가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날 장례식을 했고, 그 다음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므로 무덤을 방문하지 못했고, 안식일이 지난 첫날, 그러니까 주일 새벽이 되자마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방문한 것입니다.

    마28:1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라고 했고, 막16:1절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와 살로메가 예수님을 위하여 사두었던 향품을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오직 막달라 마리아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서 가장 천한 자이면서 가장 소중한 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창녀였고 일곱 귀신들인 여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고쳐주었습니다.

    그는 눅7: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시몬이라고 하는 바리새인 집에 초대받아 가셔서 대접을 받고 계실 때 그 동네에 소문난 여자 하나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곁에 서서 울며 그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씻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다고 했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주장을 합니다(이 사건은 마26:6-31, 막14:3-9, 요12:1이하의 사건과 다름)

     

    이 여인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흘린 눈물은 어떤 의미가 있는 눈물일까요.

    첫째, 진실한 회개의 눈물이 것입니다.

    과거에는 온 동네가 다 아는 죄인이었지만, 지금은 진심으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눈물일 것입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눈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진실한 회개에는 눈물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둘째, 이 여인의 눈물은 감사의 눈물일 것입니다.

    자신의 과거의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일곱 귀신이 들려 고난 당하던 죄인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셔서 새사람이 되게 만들어 주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눈물일 것입니다.

    셋째, 이 여인의 눈물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는 눈물일 것입니다.

    이 눈물이야말로 참으로 고귀한 눈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과거에는 죄 가운데 살았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았고 마귀에게서 해방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도 감사의 눈물을 흘리지 아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기독교인들을 보면 이러한 눈물이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도 감사도 없습니다.

    회개의 눈물도 없고 죄사함을 받은 기쁨의 눈물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마11:17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것입니다.

    회개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이 눈물이 마르지 아니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눅8:2-3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다른 몇몇 여인들과 함께 항상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 섬겼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식사준비도 하고 모든 봉사를 다 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많이 탕감 받았기에 더 많이 사랑한다는 비유같이,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 중에 가장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는 모두들 도망갔지만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만은 끝가지 예수님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장사 지낼 때에도 많은 수고를 했고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해가 뜨기도 전에 예수님을 위해서 사두었던 값비싼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현장에서 지켜보았고, 장례 지낼 때에도 있었으며,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첫 새벽에 제일 처음으로 무덤을 찾아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참으로 소중한 것이어서 위대한 해석자도 되고 위대한 능력도 되며, 그리고 지혜도 됩니다. 그러므로, 혹 방법이 잘못되었다 해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해서 한 일이라면, 혹시 방법에 잘못이 있다 해도 합동해서 귀한 열매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나사로의 누이동생이 예수님을 사랑한 나머지 옥합의 향유를 부은 일이 있습니다. 이 방법이 잘 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한 일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저가 내 장례를 준비했느니라"고 좋게 해석을 하셨습니다.

    물론, 나사로 누이가 죽음까지 생각하고 준비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정성으로 한 일이니 만큼 결과는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막달라 마리아의 예수님에 대한 사람은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본문에서 보는 대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보기 위해 무덤으로 갔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러 간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죽은 예수님이라도 한 범 더 보고 싶어 간 것입니다.

    이 간절한 마음이 엄청난 결과를 가져다 준 것입니다.

    사랑이 귀한 것임을 보여 주는 좋은 실증입니다.

    한 때 기독교 윤리를 뒤흔들어 놓은 명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화한다'는 플레쳐의 유명한 말입니다.

    참 사랑이라고 한다면 방법이 잘못되어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의 방법도 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생전에 여러 차례 부활하시겠다고 말씀하셨으면, 이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생각을 해야 했는데. 썩은 시체를 보러 새벽부터 찾아갔으니, 정성은 고맙지만 신앙은 틀렸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방법을 승화시켜 결국은 부활하신 거룩한 몸을 제일 먼저 만나는 특권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법이 좀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귀하게 보실 수 있다고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1절을 함께 읽기를 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 보니 누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무덤 문을 막아 놓았던 큰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이때 일어난 일은 마28장에 상세히 기록하고있습니다. 마28:2절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다른 마리아와 함께 무덤에 와 보니 큰 자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같고 그 옷은 눈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 무덤 지키던 병사들은 얼마나 무서웠는지 벌벌 떨며 마치 죽은 사람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자들은 이것을 보고 무서움과 큰 기쁨이 넘쳐 제자들에게 달려가 고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무덤을 지키던 파수꾼 중 몇 명이 성안으로 들어가서 모든 되어진 일을 대제사장에게 고하니 대제사장들은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병들에게 돈을 많이 주면서 "우리들이 잘 때에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돈을 받고 그들이 가르친 대로 하니 이 말이 두루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보고 놀랬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바로 베드로와 요한에게 찾아가서 의논합니다.

    상당히 지혜롭게 처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에게 갔다가 그곳에 그냥 머문 것이 아니라 다시 무덤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제일 먼저 예수님을 만날 자격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자세히 보면 세 번이나 기회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에 계신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려고 제일 먼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둘째는 무덤 속의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찾아가 의논한 후 또 다시 무덤에 왔습니다.

    셋째는 베드로와 요한은 무덤 안에 예수님의 시체가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돌아갔으나 막달라 마리아는 돌아가지 아니하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시 한번 확인해 보려고 예수님의 무덤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때 두 천사가 그 안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이 두 천사는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때 막달라 마리아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하고 돌아서는 순간 그 앞에 예수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머리를 숙이고 우느라고 예수님이신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이때 예수님께서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리아는 말씀하시는 분이 동산지기인 줄 알고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주님께 대한 사랑을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때 주님께서 "마리아야!"라고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 앞에 계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늘 불러 주시던 주님의 그 음성을 마리아는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한다면 성수주일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십일조를 못 바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아브라함처럼 외아들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높일 수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낮출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갈3:13절의 말씀대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 속량해 주셨고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복은 믿음으로 받은 복입니다.

    그 복은 의롭다함을 얻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세상의 모든 복을 다 받았지만 믿음으로 이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복은 모든 복중의 복입니다.

    다른 복은 다 받았어도 믿음이 없으면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함을 받을 수 없고 따라서 지옥의 멸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다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으며 우선 순위를 언제나 하나님께 두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은 구원의 확신도 없고 감격도 없습니다.

    감사도 없고 기쁨도 없으며 주님을 사랑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위해 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렇게 엄청난 축복을 받았는데 어찌 감격이 없습니까?

    어찌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없습니까?

    어찌하여 주님을 높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안 생깁니까?

     

    이 시간 회개합시다.

    믿음 없는 것을 회개합시다.

    감사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겸손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주님 사랑하지 못한 것을 회개합시다.

     

    본문 17절에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된 마리아는 너무나 반가워서 예수님의 두 손을 잡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급히 달라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고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증거하므로 마리아는 최초의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당시 막달라 마리아 만큼 주님을 사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두 제자는 빈 무덤만 보고 갔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그들이 가고 난 후에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알고 주님의 은혜를 보답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성도들이 바로 지혜로운 성도인 줄 압니다.

    이런 마음도 없고 준비도 없이 예배당 마당만 밟으며 왔다갔다하시는 분이 있다면 죄송하지만 참으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 관심을 그만 가지고 주님을 열심히 사랑하셔서 언제 주님이 오시더라도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기쁨으로 맞이할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 때로는 주님 앞에 나올 때 잘못된 소원으로 나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실된 마음으로 간절한 사랑으로 나올 때 주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바꾸어 주실 줄 믿습니다. 더 크고 온전하고 영원한 것으로 채워 주시며 우리를 만날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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