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의 궁극적 승리(행10:34-43 골3:1-4 요20:1-9)
  • 조회 수: 283, 2013.06.20 11:45:20
  • 오늘 우리는 십자가상에서 죽어 무덤 속에 3일간 묻혀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가 그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심을 축하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내림하여 인간의 고통과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처참한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시고 급기야 3일만에 다시 부활한 것은 생명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국에는 정의가 불의를 이기고 밝음이 어두움을 추방하고 선이 악을 물리친다는 진리를 확인해 줍니다. 인간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죽음이 생명으로 극복되었음을 확인해 줍니다. 실로 이 소식은 우리 인생들에게 제일 반갑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을 끝까지 괴롭히는 괴물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작품들 중에 죽음에 관한 중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젊은 검사인 이봔인데 출세가도를 승승장구 잘 달려서 수도 페테스부르크로 영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행복과 부푼 꿈은 의사에게 진단을 받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의사는 그가 불치의 병에 걸렸음을 진단했고 얼마가지 못하여 죽게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순간 이봔의 놀라움과 슬픔은 비할 바가 없었습니다.

     
          이 똑똑한 검사 이봔은 대학에서 배운 논리학의 3단논법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은 카오스다. 카오스는 죽는다. 고로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간의 이야기로 알았을 뿐 그것이 자신의 문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불치의 병의 진단을 받고서야 죽음이 이봔의 현실적인 문제로 바싹 다가서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는 견딜 수 없이 두렵고 슬펐습니다. 인간의 고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삶의 무의미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영원자에 대한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신의 무정함을 생각하면서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 무서운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뒤 새로운 공포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자기의 삶의 여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잘못 살았다'는 죄책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 심각하고 깊은 것이었습니다. 지나간 자신의 삶의 죄책과 함께 말할 수 없는 고통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정신적 고통은 육체의 죽음의 공포에서 오는 고통과 비할 바 아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1의 죽음도 가혹하지만 제2의 죽음이 더 가혹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속담처럼 인생의 모든 길은 죽음으로 통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면 누구나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이 나의 죽음인 것을 실존적으로 이해하면서 사는 사람도 드뭅니다. 오히려 그 죽음이 무섭다고 하여 그것을 가려 놓고 보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피해 도망가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첫째가 육체의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육적인 달콤한 사랑이 일시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잊게할 지라도 그 배후에는 죽음이 "너는 내것이다" 라고 흉칙하게 웃으면서 바싹 쫓고 있습니다. "나는 너를 죽어도 사랑한다"라고 연인들은 서로 서로에게 고백하지만 그것은 거짓입니다. 죽음이 찾아 오면 그런 사랑은 멈춥니다.

     
          죽음을 피하여 도망할 수 있는 두 번째 장소는 권력입니다. 그러나 권력 역시 죽음에 보란 듯 삼키워지고 맙니다. 세계를 한 손에 거머 쥐었던 로마의 줄리어스 씨이저도 시체가 되었을 때 안토니우스는 그 시체 앞에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전능의 시이저요. 그대가 이토록 낮은 자리에 누워 있다니! 그대의 정복과 영광과 승리의 약탈물이 이렇게 적은 분량으로 줄었단 말인가?!" 권력도 죽음을 피하도록 해주지 못합니다. 죽음을 피해 잠시 도망할 수 있는 곳이 또 있습니다. 돈입니다. 그리고 명예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것들이 죽음을 잠시는 잊게 할 것입니다. 돈에 취해있고 명예에 취해있는 동안 죽음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탄이 주는 거짓 위안에 불과합니다. 이런 거짓 위안은 결국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제1의 죽음은 물론이고 제2의 죽음도 피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첫 번째 죽음을 진지하게 맞을 수 있는 사람은 두 번째 사망은 피할 수 있는데 아쉽게도 육적 사랑이나 권력이나 돈이나 명예에 삶의 시간들을 빼앗긴 사람은 제2의 죽음도 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첫째 사망은 누구나 피할 수 없지만, 둘째 사망은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는데, 첫째의 사망을 피해 보려고 엉뚱한 곳으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그 절호의 기회마저 잃어 버리고 맙니다. 성경은 첫째 사망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에게 둘째 사망을 이기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검사 이봔은 다행스럽게도 첫째 죽음을 앞에 놓고 둘째 죽음의 심연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첫째 죽음의 공포는 둘째 죽음의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봔은 깨닫게 되었습니다. 첫째 죽음이 두려웠던 것은 자기가 사랑하던 모든 것과의 절연, 관계 상실이었습니다. 아내도 이별하고 자녀들도 이별하고 동료들과도 이별하고 자기의 고위직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관계의 상실성을 보면서 그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관계상실의 공포 때문에 과거에 여러 왕들이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을 죽여서 함께 무덤에 묻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실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사망은 더 무서운 관계의 절연입니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시간으로부터의 절연일 뿐만 아니라 영원과의 절연입니다. 존재자체와의 결별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제2의 죽음, 둘째 사망은 너무나 비참한 죽음입니다. 둘째 사망은 하나님과의 단절입니다. 그래서 형언할 수 없이 처참하고 무서운 죽음입니다.

     
          지금도 이 지구상에는 첫째의 죽음만이 있다고 알고 그 죽음이 마지막이라고 믿고 있을 뿐 제 2의 죽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제1의 죽음만을 막아 보려 하고, 아니면 조금이라도 늦게 오도록 연장해 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50보 100보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안에서 천년은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것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죽음이 인간을 삼켜버릴 때 지나간 시간은 한 경점, 순간에 불과합니다. 첫 번째 죽음만이 있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은 이생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려고 별의 별 짓을 다하면서 죄악을 저지르면서 삽니다. 그리하여 제2의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죽음의 운명을 타고 난 인간들은 두번째 죽음을 막을 길을 찾는데에 온 힘을 경주하여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첫번째 죽음은 피할 수 없었으나 두번째 죽음을 승리한 기적을 보여준 한 분을 찬양하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입니다. 그 분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이 박혀 운명했습니다. 숨이 멈췄고 그리고 그 시체가 무덤 속에 장사되었습니다. 그의 육의 인간은 분명히 죽었습니다. 제1의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덤속에 계속적으로 누워있지 아니하고 3일만에 다시 살으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리고 승천하였습니다. 제2의 죽음은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역사적인 사건인데 반하여 그의 부활 사건은 종말론적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제1의 죽음이었지만 부활 사건은 제2의 죽음의 극복이었습니다. 전자는 역사속, 시공속에서 해석되지만 후자는 영원과의 관계성에서 해석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공개적인데 반하여 부활의 사건은 비공개적이었고 매우 사적으로, 개별적으로 확인된 것이 그것을 말해 줍니다. 요한복음 20장 오늘의 본문에서 보시는대로 아무도 그가 부활하는 장면은 보지 못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과 제자들이 그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빈 무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역사의 한가운데서, 즉 시간 속에서 일어났지만,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일어났습니다. 제2의 죽음의 극복은 종말의 시작입니다. 이 지구상 시공의 세계의 기준으로 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문이 닫혀있는 방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에 한계된 과학의 논리로서 부활 사건을 풀려고 하면 안된다는 진리를 말해줍니다. 부활하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도행전 오늘 본문 39절에서 베드로가 설교하면서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오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는 장면을 직접 보았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주님과 같이 밥을 먹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부활 후 그를 만난 것을 기초로하여 "그가 살아 있는자와 죽은자의 재판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진리는 부활의 주님은 자기를 따르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타나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죽은자의 재판장"이라는 말에서 제1의 죽음에서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2의 죽음의 극복은 실존적이고 종말론적임을 보여줍니다. 이 부활 사건은 우리 인생의 육체의 죽음이 모든 것과의 단절이요 절연이 아니라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아니 오히려 영원자와의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생명은 한번 죽음에서, 즉 첫 죽음에서 끝나는 삶이 아니고 첫 죽음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계속됨을 증거합니다. 제1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의 끝이 아님을 웅변해 줍니다. 부활 사건은 우리들의 생명이 종국에는 죽음을 승리한다는 확신을 줍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제1의 죽음이 삼킬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들은 제1의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 나올 수 있다는 확신도 얻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부터는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여야 할 것은 첫째 사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느 누구에게나 닥치는 현실입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하여야 할 것은 둘째 사망입니다.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첫 번째 사망을 극복한 성도들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주신 말씀과 같이 "위에 것"을 찾으면서 삽니다.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위의 것을 바라보면서 어깨 펴고 삽니다.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말해서 제1의 죽음은 십자가에서 청산되었고 그리고 제2의 죽음의 극복이 예수님의 부활로 확증되었으니 이제 나의 생명은 보장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나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 믿는 성도들은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던 생명이 드러나는 날이 옵니다. 그것도 영광중에 드러납니다.

     
          여러분들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은총 속에서 이미 보장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금고에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2의 죽음을 극복하였습니다. 이런 확신을 가진자들은 땅의 것을 찾지 않고 위의 것을 찾으면서 살아 갑니다. 아름답고 멋진 삶을 살아 갑니다. 이봔처럼 제1의 죽음에 맞닥드려서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성경 말씀대로 믿고 힘차게 살아 가시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기도:감사합니다. 우리들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존재 자체, 하나님 자신과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삶으로 부활사건을 통하여 확실하게 약속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담보된 우리들의 생명이니 이 땅에 존재하는 동안 값지고 의미있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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