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서 말씀하셨다(요20 : 1∼18)
  • 조회 수: 356, 2013.06.20 11:49:38
  •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날 이른 새벽,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발라드리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는 뜻하지 않게도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뵈므로써 영광스런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일을 본문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18)

     

    막달라 마리아는 그 길로 제자들을 찾아가서 두 가지 사실을 고했습니다. 첫째는 `내가 주를 보았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두 문장은 화법 상으로는 모두 직접 화법입니다. 직접 화법이란 문장이나 언어 표현에 있어 남의 말을 재현할 경우 그 사람의 말을 직접 그대로 되풀이하는 표현법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요한복음의 기자인 요한 사도는 본문을 직접 화법 아닌 간접 화법으로 기록하였음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본문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이런 말이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자기가 주를 보았다는 것과, 주께서 자기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전하였다"

     

    본문과 같은 원문을 놓고 직접 화법으로 번역할 것인가 아니면 간접 화법으로 번역할 것이냐 하는 것은 순전히 번역 기술상의 문제일 뿐,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 개역 성경이 간접 화법인 원문을 직접 화법으로 번역한 것은 오류가 아닙니다. 아니 오류가 아닌 정도가 아니라 정말 탁월한 번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을 직접 화법으로 번역하므로써 간접 화법일 때에는 깨달을 수 없는, 신앙의 참된 의미를 알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의 말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말은 다음과 같이 끝났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를 보았다'고 말할 때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가 아니라,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말할 때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로부터 주님께로 이미 옮겨가 있습니다. 주어란 모든 단어의 으뜸이 됩니다. 뒤에 아무리 많은 단어가 동원되어도 그것은 모두 주어를 위한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을 주어로 삼았다는 것은 자신이 인생의 주인이 된 것이고, 주어를 주님으로 옮겼다는 것은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었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 참된 신앙의 바른 진행 과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를 주어로 삼는 삶으로부터 주님을 주어로 삼는 삶으로 중단 없이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만이 자기 중심에서 벗어나 주님 중심으로 살아갈 수 있고, 자기 말이 아니라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b)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악일 뿐만 아니라 고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를 경외치 않는 것은 곧 나 자신을 내 인생의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그같은 삶은 악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어가 되어서는 결코 진리 안에 거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어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진리밖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주어가 되는 것은 악일 뿐만 아니라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왜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과 슬픔과 근심이 끊일 날이 없습니까? 그 이유는 너무나 자명합니다. 주님을 내 인생의 주어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자신이 주어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진 빈 무덤을 떠나지 못한 채 그 앞에서 하염없이 통곡하고 애곡하던 막달라 마리아가 문득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그 곳에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천사가 막달라 마리아를 향하여 왜 그처럼 울고 있는지 연유를 물었을 때에, 그녀는 13절을 통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b)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이때도 주어는 막달라 마리아 자신이었습니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한치 앞을 알기를 합니까, 죽을 날을 알기를 합니까? 인간이 안다는 것은 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요, 정작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윽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나타나시어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는지 물어 보셨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15절을 통하여 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15b)

     

    이때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자신의 주어였습니다. 자신을 주어로 떠받들고 있을 때 막달라 마리아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서도 동산지기, 즉 묘지관리인으로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가겠답니다. 만약 있다면 가져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다시 정중하게 장례식을 치루어 드리고 매일 묘지 앞에 꽃이라도 가져다 놓겠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해서야 그가 어찌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주어가 되어서야 막달라 마리아는 구원도 생명도 없는, 계속되는 근심과 괴롬의 고통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제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어가 자신에서부터 주님으로 바뀌어진 것입니다. 주님을 자신의 주어로 삼았을 때에 모든 악과 온갖 고통으로부터 진정 자유 하는 자유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주어로 삼는다는 것은 자기 부인과 동의어요, 자기 부인이란 참된 신앙의 첫걸음인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한 곳으로 데려 가리라."(요 21:18)

     

    여태것 베드로가 자기 자신을 자신의 주어로 삼아 왔지만, 이제부터는 주님을 주어로 삼지 않을 수 없음을 일깨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베드로 자신이 주어였을 때 그의 몸은 주님 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죄악과, 그 죄악의 고통으로인해 통곡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주어로 삼았을 때에 그는 이렇게 외치는 자가 되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 3:19)

     

    회개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주어된 삶에서 돌이켜 주님을 주어로 삼는 것입니다. 그때 모든 악과 고통의 족쇄에서 풀려나 비로소 유쾌한 인생을 구가할 수 있음을 베드로는 확실히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탄식하였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도다. 오호로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3~24)

     

    여기에서 `곤고하다'는 것은 `비참하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의 학식과 경력과 의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지만, 자신이 자신의 주여 였을 때 그는 결코 죄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주어를 바꾸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 20)

     

    이처럼 바울이 자신의 주어를 확실하게 바꾸었을 때 그의 탄식은 발붙일 곳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주님께서 바울의 주어 되어 주실 때 바울은 참 생명과 자유와 구원의 기쁨을 진정으로 구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이 죽기 직전 사랑하는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율법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왕상 2: 2∼3)

     

    한마디로 무슨 말입니까? `네가 네 자신의 주어가 되지 말고 주님을 주어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자신을 주어로 삼는 삶이 얼마나 패역한지 다윗은 스스로 경험해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8월 말 우리 교회 정선일 집사님이 출연한 `가마솥에 누룽지'란 제목의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가마솥의 누룽지처럼 자신의 삶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진리로 구수하게 일구어 주는 한 크리스천 할머니가 연극의 주인공입니다.

    남편을 일찍 여윈 할머니는 남편이 남기고 떠난 집에서 하숙을 치면서 살아 갑니다. 처음 그 집에 하숙방을 얻어 들어오는 사람들은 할머니의 까다로운 규칙과 간섭에 당황해 하지만 함께 생활해 가는 가운데 할머니로부터 참된 사랑과 삶의 의미를 배우게 되는 내용입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예전 할머니 집에 일을 도와주던 여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집을 비우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밤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알게된 하숙생들은 그 집의 금기 사항인 술판을 벌리게 됩니다. 하숙생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할머니가 귀가했을 때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어 있었습니다. 술병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만취한 하숙생들은 여기 저기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본 할머니가 이런 독백을 합니다.

    "너희들 예수쟁이들 욕하지만 욕할 것 하나도 없다. 이 세상에 예수쟁이들이 없어 봐라. 세상이 이런 난장판밖에 더 되겠어? 그래도 세상이 이만큼이라도 지탱되는 것은 다 예수쟁이들 덕분인줄 알아!"

    쓰러진 하숙생들, 그리고 그들 한 가운데 서서 독백을 되뇌는 할머니―그 광경이야말로 이 세상의 실상과, 그리스도인이 이루어 가야할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신의 주어로 삼는 인생이란 결국 난장판이 되다가 어느 날 고목 쓰러지듯 쓰러지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주어로 삼는 자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난장판 한 가운데에서 의엿하게 서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할머니가 난장판을 벌리는 다수의 하숙생들에게 휩쓸려간 것이 아니라, 엉망인 다수의 학생들이 한분의 할머니에게 동화되어 갔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원칙이요 메시지입니다. 자신을 주어로 삼는 자들에 의해 세상이 얼마나 난장판이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을 주어로 삼는 한 사람에 의해 난장판인 세상이 얼마나 교정되어 질 수 있는지를 성경은 오늘도 웅변해 주고있습니다.

     

    년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작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판의 이전 투구를 보십시오. 참으로 한심한 추태들이요, 보기조차 고통스러운 작태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그들만의 행태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우리 삶의 주어로 삼고 있는 우리 모두의 실상이라는데에 사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정치판이 연극 `가마솥의 누룽지'의 하숙생들이 벌린 난장판의 확대판이라면,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일터는 오늘날 정치판의 축소판이 아닙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어로 삼고 있는 한, 그 하숙생들이나 한심한 정치가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가 진정 이 나라를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니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지혜로운 자라면 우리 모두 막달라 마리아가 되십시다. `가마솥에 누룽지' 하숙집 할머니가 되십시다. `내가 주를 보았다'에서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로 우리 삶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바꾸십시다. 우리 모두 주어되신 그분의 동사 목적어 보어들이 됩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당하게 하십시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을 지배하게 하십시다. 우리 자신이 주어된 우리의 말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절대자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이 난장판 같은 세상 속에서도 우리가 소망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어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 사람들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기까지 친히 수술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내가 나의 주어된 내 자신에게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기도 드리시겠습니다.

     

    주님, 이 시간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심을 감사드립니다.

    나 자신을 주어로 삼으므로 악과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더 이상 범치 않게 도와주십시오. 이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가는 주범의 자리에서 내려오도록 우리를 끌어 주십시오. 우리 모두 지금부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우리 삶의 주어로 삼는 지혜로운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주님을 주어 삼는 우리를 통해 주님께서 이 세상을 맑히시고 밝히시는 주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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