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요20:10-18)
  • 조회 수: 277, 2013.06.22 21:01:57
  • 오늘 우리는 특별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다시 사신 것을 기념하는 예배를 드립니다. 죽음에서부터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이제는 우리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새로운 소원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오늘 아침 여러분께 주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의 새로운 소원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는지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살펴볼 본문의 길이가 만만찮기에 달리 긴 서론 없이 본론으로 들어가서 몇 가지를 차례로 살피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만나기 원하는 분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0절과 11절 초두를 연결시켜 다시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여기 마리아는 자기 나름대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나 가장 사랑받던 제자로 알려진 요한보다 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사랑해서 끝까지 십자가 곁에 남아 있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활의 새벽 날이 밝기도 전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온 사람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마리아 나름의 시도는 무엇이었습니까? 다른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무덤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남달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기도를 끝내고 돌아간 자리에 남아서 자비의 보좌 앞을 쉬 떠나지 않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다른 성도들은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서 만족하고 사라진 자리에서 계속 남아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이번 세 이레 특별새벽기도 기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른 새벽이라도 개의치 않고 주님의 집으로 나옵니다. 거리가 멀다고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은 은혜 받는 자리에 나오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먼길 오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구역식구들과 함께 나와서 은혜를 사모합니다. 은혜를 받다가 보니까 온 구역이 특별새벽기도 기간이 끝나도 계속해서 나오기로 결정합니다. 

    이번 세 이레 특별새벽기도에 동참하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놀라운 응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이 드린 기도보다 더 놀랍게, 여러분이 은혜의 보좌 앞에서 생각한 것보다 더 풍성하게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시길 바랍니다. 세 주간의 기도생활은 반드시 우리의 신앙을 한 차원 높이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새벽을 깨우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품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전처럼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새벽에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이제 “복있는 사람”을 구입하셔서 말씀 묵상하는 시간을 이전 보다 규칙적으로 확보 하십시오. 묵상하는 일에서 방해 받지 않도록 하십시오. 말씀을 가까이 하다보면 자주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또 기도하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정하고 실천해 보십시오. 기도의 무릎이 강한 신앙의 용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분은 이전보다 예배시간을 더 충실하게 나오기로 결단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했으면 신앙하는 삶이 뭔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기로 결심하십니오.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기로 결단해보십시오. 아무도 이전처럼 다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결심하고 주님을 찾겠다는 것은 복된 일입니다. 주님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아니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까지 생각했기에, 결심하고 주님을 찾기로 한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지혜의 문설주 곁에 서서 기다리기로 결심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지혜의 원천되신 분께서 여러분에게 곧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오래 기다리도록 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리아는 또 어떤 시도를 하고 있습니까? 거기 서서 “울고 있더니”라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눈물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는 기록을 읽어볼 수 없습니다. 그랬을 수도 있지만 성령께서는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면에 간절히 주님을 찾고 있는 마리아의 경우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무덤이라는 것을 공동묘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둥근 무덤을 상상하면 안됩니다. 언덕을 파고 굴을 만들어서 된 무덤에 관을 넣고 나서 큰 돌을 가리워 두는 무덤입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사랑하는 분에게 일어난 일로 인해서 마리아는 지금 감정이 복바쳐 울고 서 있습니다. 그 간악한 사람들이 주님의 시체조차도 손을 대었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그는 더 분하고도 슬퍼서 울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해서, 자신의 눈으로 다시금 확인하기까지 울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 분 없이 살 수 없어 마음이 저려 올 때, 삶의 모든 기쁨이 사라질 때, 산다는 것이 사라진 사랑을 두고 슬퍼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때에 여러분은 주님 만날 때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눈물은 떠오르는 태양을 반기는 아침 이슬처럼 전령사 역할을 할 따름입니다. 하여간 수많은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찾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을 만나기 위해 마리아는 또 다른 시도를 그 나름대로 하였습니다.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그리스도를 찾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냥 기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만나보기 위해 몸을 구푸려야 합니다.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릎으로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울면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많아도 눈을 떠서 예수님을 찾는 사람은 적습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주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골방에서 울부짖으면서 주님을 찾습니다. 귀한 일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을 얻기 바라신다면 예수님을 찾으십시오. 예수께서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간절히 주님을 구하면 주님께서는 반드시 만나 주실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고, 눈물이 있고, 구푸림이 있고, 들여다봄이 있다면 자비로운 나타남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쁨의 만남이 반드시 따라 올 것입니다. 주님을 찾는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좀 더 살펴보기 원하는 바는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그 어떤 조그만 시도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구푸려 무덤 안을 바라보았을 때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 뉘였던 곳에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아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두 천사를 보았다면 거룩한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아 정신을 가다듬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했을 것입니다. 

    무덤을 지키던 불경건한 군인들조차도 천사가 나타나자 무서워하며 떨고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관찰하시면 마리아는 마치 이들을 이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자신의 품격을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묻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마리아는 여상스럽게 대답합니다.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마리아는 놀라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든 보이지 않은 영들이든 간에 그 어떤 것도 주님을 만나려는 마리아의 시도를 막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찾는 자는 주님에 관해서 누구에게라도 물을 것입니다. 물어서 주님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무엇보다 기뻐할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을 가져보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주님을 갈망하는 소원을 심어주시면 자신의 연약도 이전의 두려움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모하는 영혼은 천사들이나 마귀들이나 헤치고 나아갑니다. 우리의 영혼에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면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습니다. 대초원을 태우는 불길처럼 막을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모하십시오. 그 분이 아니면 그 무엇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한 영혼이 그리스도를 사모하면 그리스도의 말씀만이 그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가 말한 바로서는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물었지만 달랠 수 없었습니다. 빛나는 천사들도 마리아의 눈물을 정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울고 있을 뿐입니다. 왜 우는지 이유는 말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늘의 천사들도 주님을 찾는 한 영혼을 만족시킬 수 없다면 교회의 사자들이 어떻게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까?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설교를 해도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구도자에게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리고 확실히 주님께서만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없는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마십시오. 주님이 없는 곳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만나십시오. 무엇을 듣더라도 듣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들은 그 분을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단순히 진리에 대해서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수용하십시오. 복되신 주님을 소유하기까지 결코 쉬지 마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이 사모하는 그 분을 구하십시오. 그 분만이 여러분의 영혼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 되시는 주님의 음성이 아니라면, 하늘로부터 나는 소리라도 만족하지 마시고 땅위에서 들리는 가장 경건한 사람의 목소리라도 거기에 빠져들지 마십시오. 

    주님을 사모하는 영혼은 주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기를 기뻐합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는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고 2절에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13절에는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에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천사들에게 답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에게는 “내 주”라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낯선 천사들에게는 “내 주”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내 주임을 밝히지 않고는 이들을 가도록 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귀한 태도입니까? 여러분은 주님이 함께 하심을 사모하는 성도입니까? 여러분이 지금 주님을 보고 계시든 아니든 주님은 여러분의 주님이십니다. 그 분이 영원토록 여러분의 것이라는 귀한 진리를 붙잡기를 바랍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는 고백을 마리아는 지금 하는 셈입니다. 사랑하는 주님의 미소 띤 얼굴을 지금 바라보고 있지 못해도 그 분은 여러분의 주님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드렸습니까? 그런데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일꾼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래도 여러분이 주님의 것임을 주장하십시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 사실은 불변합니다. 캄캄한 속을 걸을 때도 주님의 손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하늘이 어둡고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속을 걷고 계십니까? 그래도 여러분은 주님의 것임을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비록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그를 신뢰하리라” 이것이 성도의 입장입니다. 

    나는 그의 것이고 나는 그 분을 섬길 뿐입니다. 문설주에 귀를 뚫은 종처럼 영원히 주님의 집에서 기쁘게 섬기기로 결단한 자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 38-39)고 성경은 고백합니다. 

    진정으로 주님을 찾는 자에게는 오직 하나의 갈망만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 유일한 갈망의 대상입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들을 넘어서 주님을 갈구합니다. 천사는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찾는 것은 그들이 아니고 마리아가 무서워하는 것도 그들이 아닙니다. 흰 옷 입은 천사들 앞에서도 “내 주님”을 고백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는 주님만 찾았고 그를 만나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직 부활의 날 주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할 여러분,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있다면 모든 소망을 그 분께 향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비록 하늘의 천사들이 나타난다 할 지라도 주님을 찾는 여러분의 관심을 빼앗지 못하게 하십시오. 주님의 모습을 뵙지 못한다고 느끼십니까? 아니 주님을 뵈온지가 오래 되었다고 느끼시는 분은 없습니까? 주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고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각오를 가지고 주님 앞에 매달려 보십시오. 어두움 가운데 죽는다고 느끼신다면 그 분은 반드시 여러분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갈망하도록 만들고 나서 만족시키지 아니할 리 만무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굶주리며 목말라 한다면 여러분은 복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속에 그것을 창조하신 이가 여러분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것입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갈망함같이 갈망할 때에 우리 주 예수께서는 귀하신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실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살펴보기 원하는 바는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는 성도는 자신이 의식하고 있지 못해도 주님이 가까이 계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 줄 알지 못하더라” 서서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에 주님은 마리아 뒤 편에 서 계셨습니다. 비록 마리아가 이것을 알지 못했으나 그의 임재하심은 마리아와 함께 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 동안 천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묻는 말에 답하다가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 서 있는 것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떤 분은 예수님이 나타나셨을 때 앉아있던 천사가 일어설 때에 뒤에 누가 왔구나 하고 알았다고 합니다만 여러분은 앉아 있던 천사가 일어설 때에 꼭 알 수가 있습니까? 그런 움직임이 없이도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 가운데는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느낀 경우들이 없잖아 있을 것입니다.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기도 하고 말씀을 듣는 중에 자기에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깨닫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할 때에 어떤 때는 특별히 함께 함을 깨달을 것입니다. 설교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하는 중에 곁에 서셔서 힘주시는 주님을 가끔 인식하기도 합니다. 주님이 가까이 오셨을 때 마리아인들 왜 그것을 몰랐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주님인 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주님을 향해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았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이 말은 주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는 의미입니다. 찬찬히 살펴보았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분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주님일 리 만무해. 하지만 누굴 닮았어”라는 생각을 하면서 주님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왜 마리아는 주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불신앙과 슬픔이 그 눈을 어둡게 했다고 말해도 될까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처럼 말입니다. 눈물이 그녀의 눈을 흐리게 했을까요? 그럴리 없습니다. 가득한 눈물은 때때로 우리의 영적인 시야를 오히려 밝혀주곤 하기 때문입니다. 시야에서 사라지신 나의 삶에서 멀어져버린 그리스도로 인해 눈물 흘린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전에 주님과의 교제를 소홀히 했던 죄를 씻어내는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일까요?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마리아가 기대했던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을 만나 뵙기를 사모했지만 그것은 수의에 싸인 모습이었지 서 계신 주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본 것은 “예수의 서신 것”이라고 복음서 기자는 밝힙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신지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녀가 보았고 지금까지 상상해온 것은 세마포에 싸인 싸늘한 시체였지 이와 같은 영광스런 만남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여!”라고 불러 주시는 영광스러운 만남을 기대하고 그녀가 무덤 앞으로 왔던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얼마나 초라하고 비천한지 모릅니다. 만약 주님께서 어느 정도의 영광만 나타내시고 다가 오셔도 우리는 그 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마리아에게 그런 모습으로 이전에 나타난 적도 없고 그것은 또한 마리아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알아보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여러분과 저도 주님을 만나기를 사모합니다만 우리의 예상을 초월해서 그가 오시면 우리 역시 주님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예배 가운데 주님이 여러분에게 찾아오실 때 그것이 여러분이 기대했던 식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믿기만 하라는 말 앞에 낙망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순종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과의 만남을 환상적인 만남으로 꿈꾸지만 주님께서는 오히려 책망하며 조용히 우리를 일자리로 돌려보내시고 주님을 위해 잘 섬기도록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잠시동안 주님의 복된 함께 하심을 놓치신 분은 옛날 한 때처럼 펑펑 울며 자복하는 순간을 그리워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조용히 찾아오셔서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을 안겨주실 수도 있습니다. 조용히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우리를 말없이 응시하실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와서 실컷 울어 보는 것을 바라지만 주님은 여러분의 마음 속에 세상이 알지 못하는 평안과 기쁨으로 찾아오실 수도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정원지기로 여기지 않도록 우리에게 분별력을 주시길 간구합시다.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마리아는 그가 누구든지 주님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습니다. 주님을 배울 수 있다면 묻기를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가 정원지기든 그가 청소부이든 주님을 경험적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을 도와줄 수 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뵙기 원하는 사람은 설교가 짧아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습니다. 감동적인 웅변이거나 재치 있는 달변이어야 한다는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온통 주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온 세상이 자기처럼 생각한다고 느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뒤에 나타난 사람을 보고 그가 정원지기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께 무어라고 말합니까?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예수님을 찾는다고 밝히지도 않고 “당신이 (그를) 옮겨갔거든 내게 이르소서”라고 요구합니다. 마리아는 지금 누구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까? 오직 한 분만이 마리아의 관심사입니다. 주님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자를 주님께서 만나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마리아는 가당찮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여 당신이 옮겨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 가리이다” 잘 들어보면 그 말이 현실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른 새벽에 남자의 시체를 여자인 마리아 혼자 옮겨가겠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다만 마리아는 그처럼 비참한 죽임을 당한 시체라도 두려움 없이 옮겨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무엇이든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신앙은 불가능을 비웃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살필 점은 무엇입니까? 주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단 한마디의 말로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야” 부르시는 단 한마디의 말이 마리아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마리아는 이제 주님을 단번에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말도 마리아를 위로하기에 역부족이었으나 주님의 마음에서 나온 한 마디의 말은 마리아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도달했습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마리아야”라는 사랑의 말은 마리아의 입술에서 “랍오니여”라는 존경의 반응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서 주님은 “여자여 왜 울며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했을 때는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자여”하는 것은 일단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사람을 향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처가 될 것도 은혜가 될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이 말이 주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가끔 놀랍게 은혜가 됩니다. “마리아야”. 주님이 부르는 순간 그 동산에는 그녀 말고 달리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감격적인 반응을 합니다. 마치 “열려라 참깨”라고 하는 것처럼 “마리아여”라는 부르는 말은 마리아의 마음 문을 활짝 열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을 찾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상응하는 반응을 하는 사람입니다. “랍오니여”라는 호칭은 ‘나의 주님’ 혹은 ‘크신 주님’이란 의미가 있다고들 하지만 우리는 요한의 해석을 따르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요한 자신이 히브리말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는 선생님이라)고 괄호 속에 풀이해 두고 있습니다. 하여간 지금 마리아는 주님을 다시 만나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선생님이요 주님이신 분으로 인해 슬픔과 눈물이 가시고 평안과 기쁨을 회복합니다. 

    우리에게 시간이 넉넉하다면 “랍오니여”라는 한 마디 속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마리아는 그가 누구신지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부활의 주인공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계십니까? 그를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그 분을 모르는 것은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사는 것이고 죽음 가운데 처한 인생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이 이 분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그 분을 인격적으로 알고 계시느냐는 것을 묻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여러분은 얻었습니까? 주님이 다시 사신 것은 여러분과 저에게 새 삶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늙고 병들고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그가 사셨습니다. 죄짓고 괴로워하고 죽을 맛을 보면서 생을 영위하는 그런 단계가 아니라 넉넉히 승리하는 이 삶을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분이 사흘만에 살아나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계십니다. 우리의 죄된 몸이 영생의 몸으로 우리의 연약함 몸을 강력한 몸으로 욕망에 살던 우리의 몸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로 드릴 수 있도록 능력주시는 분으로 아직도 살아계십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으나 둘째 사람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구도자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 분과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까? 전능자의 입에서 나오는 단 한마디의 말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을 살려놓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의 말은 오늘 우리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모든 갈망을 만족케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새 삶을 주신 주님이 베푸신 생명의 식탁으로 나아갑시다. 주님이 베푸시는 생명 양식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랍오니여”라고 부르는 마리아처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신실한 주님의 백성들 모두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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