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요 20: 19-23)
  • 조회 수: 453, 2013.06.22 21:17:50
  •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종이박스 하나씩 나누어 주었습니다. "얘들아 다음 주일이면 부활주일이야. 이 종이박스 속에 너희들이 부활을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이든지 다음주일 꼭 넣어서 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며 부활을 설명해야 한다" 숙제를 내 주었지요. 한 주간 동안 고민했던 아이들은 저마다 하나씩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

    첫번째 아이가 펼쳐 보입니다. 막 피어나는 움돋는 나뭇가지 하나를 끄집어 냈습니다. "겨우내 죽은 줄 알았던 나뭇가지였어요. 그런데 여기에 새움이 돋듯이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우리 예수님께서 무덤 문을 열고 부활하신 거예요. 아이들이 일제히 힘차게 박수를 쳤습니다. 한 아이는 활짝 핀 꽃 한송이 끄집어 냈습니다. "꽃이 피어나듯이 예수님 부활하셨어요." 어떤 아이는 나비를 한 마리 또 어떤 아이는 계란을 가지고 와 설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에 지능이 조금 모자라는 수돌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선생님과 아이들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돌이는 과연 무엇을 가지고 왔을까? 조마조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수돌이가 빈 상자를 펼쳐보입니다. 아이들이 깔깔대고 웃었지요. 수돌이는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어. 수돌이가 친구들을 돌아보며 "쉿! 예수님이 부활하신 빈 무덤이야." 선생님이 말씀했습니다. "수돌아 그 빈 무덤에 관하여 설명할 수 있겠니." "설명할 수 없어요. 그냥 예수님 살아나셨어요." 이 아이는 바보가 아니고 영적인 천재였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이 땅에 있는 그 무엇으로 어떤 비유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명할 수 있거나 없거나 사실일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부활을 설명 할 수 없다고 그래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거나 말거나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사실일 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부활에 관하여 사백 번이상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디에서도 논쟁의 주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학문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설명한 적이 없습니다. 설명의 대상으로 삼은 적도 없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실 것입니다" 예언했고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믿음은 능력이고 믿음은 구원입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사상가 어네스트 골트가 어느날 토마스 칼라힐을 찾아왔습니다. "나는 멀지 않은 장래에 기독교를 대신하는 신선하고 새로운 종교를 만들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칼라힐이 대답하지요. "대단히 흥미있는 일이다 . 그렇게 하려고 하면 네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에게 증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네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하여 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너는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당신의 계획은 헛된 계획이 되고 말 것이다." 어떤 사람도 어떤 종교도 흉내낼 수 없는 사실이 있다고 하면 바로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의 소식입니다.

    기독교를 흉내내보려는 시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신도시 내에도 불교사찰들이 많이 서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와 도심에 절간을 세우고 기독교 신앙을 모방하려고 하는 움직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찬송을 부르니까 저들은 염불대신 찬불가를 만들어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을 모아 우리가 성경학교를 하니까 저들도 아이들을 모아놓고 불경학교를 합니다. 주일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합니다. 저들도 주일마나 정기 예불집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방을 한다. 구역조직까지 갖춰 논 모양입니다. 다 흉내를 낸다고 할지라도 흉내낼 수 없는 분명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천지를 창조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무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부활하지 아니했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이 부활절이야말로 우리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축제요, 기독교만이 가질 수 있는 사실 아니었습니까? 때문에 이 부활주일은 기독교 여러 축제 가운데 최고의 축제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천지창조가 없는 구원은 부도수표입니다. 부활이 없는 종교가 구원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본문 시작하는 19절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저녁이었습니다. 이른 새벽 이미 여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빨리 가서 이 소식을 전하라 예수님 말씀하셨고 여인들은 이골목 저골목 이마을 저마을을 뛰어다니며 미친 듯이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외치고 다니는 이 때에 제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계속되는 성경말씀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다락방 깊숙한 곳에 모여 앉아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했다. 무서워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었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이 로마 정부가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잡아들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던 터였습니다. 문을 닫았다 표현했습니다만 이중삼중 겹겹이 걸어 잠궜다는 뜻입니다.

    걸어 잠근 것은 다락방문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그들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쇠빗장을 걸어 잠그고 앉아있으니 예수님을 만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겠습니까? 꽁꽁 얼어붙은 것은 그들의 마음뿐이 아니었습니다. 온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문을 두드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문을 열어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 가운데 우뚝 서 계신 것입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이지요. 그러니 제자들 오죽이나 놀랬겠습니까? 마음이 얼어붙고 눈이 얼어붙고 영혼이 얼어붙어 있었으니 주님이신 줄 몰라 뵙지요.

    주님처럼 생겼으니 더욱 놀랄 수 밖에요.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같은 본문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 24장 37절에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그랬습니다. 젊잖게 표현해서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했지, 알아듣기 쉽게 표현하면 "귀신 아닌가? 질겁했다" 그 얘기입니다.

    이때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 안심시키기 위하여 못박힌 손을 내밀어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이신 것을 확인하고 한편 기쁘기도 했지만 더욱 놀라웠습니다. 체면 없지요 면목 없지요. 주님께서 체포되던 그 시간에 제자들은 겁이나 뿔뿔이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신음하며 돌아가시는 그 자리에 한번 마음껏 목놓아 울지도 못했습니다. 가냘픈 여인들과 이름없는 제자들, 아리마대 사람들 요셉과 니고데모가 장례를 치루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얼굴도 나타내지 못했습니다. 

    보십시오. 이런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 반역자들 배신자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꾸중하시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끝없는 용서를 안고 찾아오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 불안에 신음하는 제자들, 공포에 시달리는 제자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그래도 저들의 번민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21절 "예수님이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한마디에 제자들의 모든 과거는 용서 되어졌습니다. 공포는 사라졌습니다. 두려움은 눈 녹듯이 녹아졌습니다. 의심의 먹구름은 깨끗이 끝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정작 믿음을 잃어버리고 환란과 시련 가운데 불안에 떨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말씀을 듣고 살아가노라 하면서도 말씀의 능력을 상실한체 무력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있습니까? 주님 부활하신 이 시간에도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사로잡혀 있는 분 계십니까?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는데 죽음 소식이나 나누며 탄식을 늘어놓는 못난 제자들의 모습을 하고 이 자리에 계신 분 계십니까? 주님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평강이 무엇입니까? 편안한 것이지요. 제가 지금 여기 두발로 서 있고 여러분은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여러분이 더 편안한 것입니다. 지금 침대에 누워있는 분들이 있을런지 모릅니다. 그분은 더 편안하겠지요.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 맡기면 많은 평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적게 맡기면 적은 평안을 모두 맡기면 온 삶속에 평강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텔이나 사우나에 가면 금고나 사물함에 그렇게 쓰여있습니다. 귀중품은 프론트에 맡겨주십시오. 호텔 프론트에 맡기지 않은 물품에 대해서는 분실시 책임지지 않습니다. 문제를 맡기면 삶이 평안해 집니다. 생명을 맡기면 생명의 평강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영과 혼과 온 삶을 주님 앞에 맡기면 온 삶의 영역에서 평강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왜 찾아오셨습니까?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복음을 맡기기 위해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의 삶을 맡기면 그분은 우리에게 복음의 능력을 맡겨주십니다. 21절 후반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복음 속에 내가 사는 길이 있고 네가 사는 길이 있기 때문에. 복음 속에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사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복음 속에 나라가 살고 역사가 사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이 이제 그 십자가의 능력을 전해야 합니다. 부활을 전해야 합니다.

    용서를 체험한 사람은 용서를 나눌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을 체험했으면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신앙생활 하는데 자랑이 무엇입니까?

    교통사고로 인하여 가해자인 운전수와 피해자가 법정에 섰습니다. 운전수가 "판사님 저는 모범운전 경력이 30년입니다. 저 사람이 잘못하여 부상을 당했습니다" 그럽니다. 그러자 이번엔 피해자가 말을 받습니다. "판사님 저는 안전보행 경력이 50년입니다. 운전사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더랍니다. 여러분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자랑은 십자가요 주님의 부활입니다. 복음의 능력, 십자가의 능력, 부활의 능력, 가진 자에게 더 주십니다. 쓰지 않는 자에게 있는 것 마져 빼앗아 가십니다.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 무슨 말입니까? 배신자들을 반역자들을 다시 불러 중용해 주시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허물투성이, 문제투성이, 여전히 부족한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러 신뢰해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었지만 다시 불러 쓰시겠답니다. 매를 맞아 마땅한 그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을 높여 사용하시겠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러나 제자들을 보내실 때 한가지 분명한 원칙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신 것처럼 주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제자들도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야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의 사람들이 이땅에 살아가는 삶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라" 그 얘기 아니겠습니까? 이제 제자들의 사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삶이었습니다. 우리가 마늘 한쪽을 먹어도 냄새가 납니다. 그 신비가 부활의 능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데 예수의 냄새가 나지 않겠습니까? 입을 벌리고 살아가는데 예수가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 엄청난 부활의 능력을 간직하고 살아가는데 우리 삶 속에 부활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는 부족하니 주님이 버리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전에 한번 두번 실패했다고 주님이 다시는 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실수하고 죄를 지었다고 버림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 찾아오시고 또 찾아오셔서 여러분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고 헛된 곳으로 가기 위하여 배를 타고 지금 여행길에 나섰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요나의 인생이 끝났다 할지라도 요나는 할말없는 존재 아니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다시 불러 쓰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등지고 도망가던 자리에서 내 인생이 끝장났다 할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할말없는 존재였습니다. 주님께서 한없이 나를 불러주시고 또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살았던 헛된 인생살이에서 주님께서 내 인생을 끝장나게 했다고 할지라도 나는 할말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시 불러주셨습니다. 다시 여러분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주님 왜 찾아오셨을까요? 주님 오늘 본문에서 이어지는 말씀 성령을 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찾아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오늘 본문은 평강과 성령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복음전도와 성령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도움이 없이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고, 성령의 도움이 없이 능력있는 복음 전도자가 될 수 없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연약한 자를 강하게 합니다. 슬픈 자를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냉혈적인 사람을 뜨겁게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사람들에게 지혜를 나누어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에게 평강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비겁하게 도망가던 반역자들을 다시 불러 영광스러운 천국의 사도로 삼아주시고 순교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그분의 숨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까? 태초에 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던 바로 그 생기 아니었습니까? 그 주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니 Living Soul - 살아있는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 창세기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의 몸은 흙의 요소가 있고 생기의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생기의 요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호흡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인간을 향하여 그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육체가 됨이라" 우리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호흡을 빼버리고 나면 우리는 흙덩이만 남게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인간들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의 온갖 죄악의 짐을 감당해 주셨습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부활하신 예수님, 육체만 남은 생기가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창조주의 숨결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숨을 내쉬며~ 이 말씀은 에스겔 골짜기를 연상케 해 줍니다. 말라빠진 뼈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생기야 숨아 사방에서 불어와 이 사망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 살게 하라. 부활하신 주님 호흡이 불어닥치면 죽음의 자리에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질병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에게 우리 영혼에 숨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코를 그분의 가슴에 들이박고 그분이 숨을 내쉬며 성령의 호흡을 우리에게 불어주실 때 성령을 들여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받지 못하면 예수의 숨을 못하면 하늘 호흡을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땅에 아무리 영향있는 사람이 된다할지라도 아무리 권세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힘있는 사람이 된다할지라도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령을 숨쉴 때에 헛바람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고 성령의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죄의 능력을 주시기 위해 우리 예수님 찾아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3절입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사실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만 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누구의 죄를 사한다고 그 죄가 용서되어지는 것아닙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고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때문에 이 말은 용서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동참한 성도들은 이제 정죄하던 삶에서 벗어나 용서하는 삶을 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율법에 의하여 유죄판결을 받은 삶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여 무죄선언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유죄판결이 내려진 우리의 삶이었으나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에게 이미 무죄가 선언되어졌습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부활을 아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사함을 선언하는 권세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저희교회에서는 주일날마다 예배를 찾아오면 예배 순간에 용서의 선언을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지난 한주간동안 우리의 지었던 모든 죄를 주님 앞에 고백하십시다. 주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수많은 죄를 지었지만 너무나도 사악하여 지은죄마저 다 기억할 수 없는 악한 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기억하지 못한 죄까지 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고백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우리가 고백한 모든 죄가 용서받았음을 우리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선언합니다. 그때 어떤 분은 그런 고백을 해요. 펄펄끓는 물 속에 눈을 한덩이 집어넣으면 스르르 녹아 없어지듯이 그 말씀 한마디에, 그 선언 한마디에 우리의 온갖 죄가 다 녹아진다고 고백하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미움에 삶에서 이제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누구도 미워할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할 자유만 있을 뿐입니다. 미워할 권세가 우리가 없습니다. 이제는 용서할 권세만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우선 여러분 자신에게 소중하다 귀하다 여러분 용서를 자신에게 선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담당하셨으니 부활하신 예수님 내 죄를 다 담당하시고 의롭다 말씀하여 주셨사오니 너는 소중한 나의 자녀다 천국백성이다 말씀하여 주셨사오니 여러분 자신에게 선언하십시오. 나 류영모는 너 류영모를 사랑하노라. 나 류영모는 너 류영모의 모든 죄를 사하노라. 여러분 자신에게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그리고 소중한 여러분의 가족,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자녀들에게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용서를 용서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여러분의 원수를 향하여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미워할 자유도 미워할 권세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에 프로가 된 것입니다. 사죄를 선언하는 프로가 된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어도 아무추어 신앙인처럼 변죽이나 울리는 신앙생활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으면 성령을 받았으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말씀하시는 그 성령의 호흡을 우리가 들이마셨으면 이제는 신앙생활하더라도 프로신앙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더래도 프로 기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더래도 프로목회자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변죽이나 울리는 아마추어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죄를 선언할 수 있는 하늘의 권세를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권세있는 주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제가 운동시간이 부족하니까 운동하자고 그래요. 운동좋지 그러구 대답하고 또 못 갑니다. 그래서 친구들이 이제는 나이도 그만큼 되었고 하니 골프를 치자고 그래요. 골프 좋지. 그러구 골프 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를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칠려고 생각도 합니다만 잘 기회가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골프를 즐기시는 분들 계시면 괜찮습니다. 제가 정죄할 마음이 조금도 없어요. 그리고 사업을 하시는 분들 또 바이어들을 만나야 하시는 분들 또 젊은 시절 고생을 많이 하시고 어느정도 삶의 안정이 찾아오신 분들 노년에 골프를 치시면서 여러분의 삶을 여유롭게 보내는 것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저도 그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골프를 치자고 그래서 한번 골프장에 가 봤습니다. 그리고 한번 따라다녀봤더니 골프를 한번 치는데 길게는 하루종일이 걸리고 적어도 너뎃시간이 걸리더라구요. 물론 한번도 쳐 보지 못하고 땅을 후벼파면서 한번 휘둘러 보고 왔습니다. 아주 서툴기 짝이 없었지요. 그런데 집에 와서 성경책을 펼쳐놓고 하루를 정리하고 성경을 읽는데 바울이 그랬는데 울자가 골프공으로 왔다갔다 해요. ㄹ자가 잔디로 다 보여여요. 그래서 내가 생각했어요. 아하 이것은 나는 골프를 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언젠가는 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내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한시간을 내가 아깝게 생각하고 삼십분이면 땀흘려 일할 수 있는데 내가 하루종일 뛰어다니며 운동할 수 있는 시간을 얻을 수 없는게 나라고 하면 나하고 골프하고는 안맞겠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당분간은 하지 말아야 되겠다. 제가 결심을 했습니다. 바울을 골프공으로 보는 사람이 어떻게 골프를 치겠습니까? 프로가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으면 이제는 예수 냄새가 좀 나야 된다는 겁니다. 

    묻습니다. 사죄함을 선언하는 복음 얼마나 여러분들 사람들을 살려냈습니까? 그 능력으로.

    평생 대학생 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로슈 맥도르라는 분은 이런 말을 했습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는 인류역사상 최고의 사기극이다. 그러나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최대 의 비극이 될 것이다." 사도 바울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 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 것이며...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니라"(고전15:14, 19). 

    일본의 우쭈무라 간조는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려고 해서 믿은 것이 아니고 어느날 눈을 뜨고 보니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부활의 능력이 내 삶을 감동하고 감싸고 부활의 능력이 내 안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나는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들이 부활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하면 그게 바로 저주일 것이다.

    기독교는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 죽음 이후에 더욱 풍성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으십시다.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셔서 하나님 안방에 앉아계셔서 바둑이나 들고 계신 분 아닙니다. 그분은 살아 계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살아 계셔서 역사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부활을 체험한 여러분 모두의 삶을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동행하시고 지켜 책임 보호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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