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지않는 믿음이 복되다(요 20:19-29)
  • 조회 수: 351, 2013.06.22 21:18:34
  •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의 불행과 행복이 함께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그들을 만나주시는 이 감격스럽고 엄청난 사실에 참석할 수 없었던 것은 도마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불행이 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다시 한번 만나주셨고 그의 불신앙을 신앙으로 바꾸어 주신 것은 도마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왜 주님을 뵙는 영광스런 경험을 하지 못했습니
    까?거기에는 몇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도마는 제자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하신 나타난 주님을 만나뵙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말씀 24절을 보세요" 열두제자중에 하나인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그랬습니다. 성경기자가 이 구절에서 예수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이날 곧 안식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곳에 문을 닫았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저녁이었습니다. 이날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문을 다 잠그고 있었습니다.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무슨 일
    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몹씨 유대인들을 무서워했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20절에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는 혹시 유령이 나타난이 아닌가하는 것을 착각하지 않기 위하여 주님이 상처받은 옆구리와 손을 보이시면서 예수님 자신인 것을 드러내보였습니다.20절 하반절에 보면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주님이 부활하신 사건을 다 당연한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마는 부활을 전혀 기대하지 않고 체험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제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칠흑같은 절망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일은 정말로 상상도 못한 일이요, 기대도 못했던 일이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 사회로부터 받을 수모와 박해와 두려움속에 빠져 있던 제자들중에 갑짝 스럽게 나타났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얼마나 놀랬을까요?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놀라운 장면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다른 동료 제자들 가운데 함께 있지 아니했기 때문입니다.12제자중 디두모라고 하는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오실 때 함께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성경이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 자리에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원래 도마는 독립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개인적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마 다른 제자들은 다 있었는데 혼자 뛰쳐 나가서 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는지 모릅니다.아니면 다른 제자들은 다 문을 닫고 지금 혹시 나가면 유대인들에게 붙잡혀서 갇혀 있는 상태 인데 도마는 남다르게 용감하고 담대하기에 자기 혼자 뛰쳐나가서 정신을 파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열두제자중에 도마는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였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가령 요 11장에 보면 도마의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베다니의 나사로가 병이 든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이되는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병이 들었습니다라고 예수님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주님은 늦장을 부리면서 바로 베다니에 가지 아니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했습니다.
    그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치려고 하였는데 또 거기로 가시려고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유대지방에 가시는 것을 만류했습니다. 거기에는 좋지 않은 감정으로 주님을 박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햇습니다.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유대로 가시는 것을 만류하는데 유독 도마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했습니다.얼른 들을 때 이해가 잘 안됩니다. 이 말은 어쩌면 주님이 사지를 향해서 가시니까 "에라 모르겠다. 다같이 죽자."이런 의미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어쩌면 주님이 그 위험한 곳에 가시는데 혼자 가게 하실 수 있느냐?죽음을 무릎쓰고라도 가자, 아주 용감한 말 같지만 사실은 허망하기 이를데 없는 말입니다.그래서 도마는 빈정대는 사람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용감한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하여간 다른 제자들은 선생님 가시지 말라고 만류를 하는데 도마는 뒤에서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함으로 다른 제자들과는 전혀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이런 도마이기에 다른 제자들은 다 집안에 모여 있는데 도마 혼자만은 자리에 있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이번만은 다른 제자들과 행동을 함께 하지 아니한 것이 도마에게는 가장 큰 불행이었습니다. 그는 그날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나는 영광스러운 축복을 놓쳐버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뭐랬어요?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더 그리하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여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모임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임에 가장 중요한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님을 만나는 일이 없다면 우리의 모임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단순히 사회적인 모임이나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도 여기에 모이신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뵙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마18장 20절에 보면 두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겠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두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곳 이것이 그리스도의 모임과 다른 모임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자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습니다.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찬양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두세사람이 내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중에 있느니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도 주님이 나와함께 하신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하는 순한 목적을 가지고 모일 때 주님이 거기에 임재하여 계십니다.우리가 개인적으로 집에서 기도할 때와 우리가 예배당에 나와서 함께 기도할 때 다른 느낌을 갖지 않습니까?
    예배당에서 기도하면 기도도 잘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더 깊이 맛보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세사람 이상이 모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주님의 진실한 약속 때문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함께 모이는 것이 얼마나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가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제 어디서 하나님의 임재를 강렬하게 느끼는 때가 있지 않습니까?왜 항상 같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 편에 잘못 때문입니다. 주님은 항상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십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간절한 기대가 없을 때 우리에게 그다지 큰 감격을 안기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서을 읽어보시면 느끼시지마는 주님께서 각지방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사렛에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고향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했다는 말은 기대가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아 예수 그 우리동네에서 자라난아이 우리가 잘 아는데... 뭐 바랄것이 뭐있나요?우리 주님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님을 향한 아무런 기대가 없을 때 축복도 없습니다. 
    여러분 !
    우리가 예배당에 나올 때 그냥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내게 말씀하실 주님을 기대하고 설레는 가슴을 가지고 나오셔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주실줄로 믿습니다.

    나는 예배당에 나오시는 분들의 걸음 거리를 쳐다볼때가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시나? 그저 마지 못해서 맥이 빠져서 늑지근해서 나오나 아니면 내가 빨리 예배당에서 은혜를 받아야지 하면서 기쁨으로 나오나?
    나오는 자세를 보면 벌써 아 저분은 오늘 은혜를 받겠다. 아이고 나오긴 나오지만 저 소용이 없구나!왜 기대감을 가지고 나와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기대감을 가지고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지 않습니다.
    여러분!
    교회 나오실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 대광교회 성도들은 예배당 나오실 때 빨리 빨리 힘차게 나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넘치는 은혜를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놀라운 것은 오늘 주신 말씀을 보시는대로 주님의 제자들은 그런 기대가 없었습니다. 기대는 무사하고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비참하게 돌아가심으로 주님의 역사는 모든 것이 아주 끝났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아주 절망적입니다.그런대도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모여서 함께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절망중에도 흩어지지 않고 모여 있는 장소에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그날 주님을 뵙는 특권과 감격에서 제외 되었습니다.하지만 주님이 다시 다타나셨습니다. 주님이 한번 나타나시고 그만 나타나셨으면 영영 주님을 뵙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디두모라는 도마에게 또 한번의 기회를 주신 것은 얼마나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주신말씀 26절에 보니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도 함께 있었고 ...
    이구절을 자세히 보세요. 24절에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 것을 강조했는데 여기 26절에 여드레를 지나서 도마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성경에 강조했습니다. 도마의 이름을 꼭 썼습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이 지난 주일 저녁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는데 도마는 그축복을 받지 아니해서 아쉽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야 이사람 도마! 우리는 지난 주일 저녁에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아 우리가 모인데 주님이 나타나시지 않았나. 상상이나 했어. 생각해봐. 우린 얼마나 감격했는지 몰라."
    도마는 한편으로 의심을 했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사냐? 그것 말되는 소릴 해라. 그러나 이 많은 사람이 나를 속이기 위하여 거짓말은 하지 않을텐데. 반신반의 하는 가운데 도저히 자기의 이성으로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기대를 가지고 이날은 집안에 머물렀는지 모르겠습니
    다.도마는 그날 저녁에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도마에게 제 2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사랑 이 은혜가 얼마나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중요 합니다.  옛날 청교도들의 신앙 신조 가운데는 어떤 집회에도 나는 빠지지 않는다는 청교도들의 생활신조라고 합니다. 언제 주님이 우릴 찾아오실는지 언제 주님이 나를 만날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영광과 축복을 주실는지 언제 주님이 기적을 행하시고 삶의 놀라운 변화를 주실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지만 특별히 주님의 임재가 나타나는 시간이있습니다.
    어느 예배나 다 중요하지만 어느날 우리 중에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삶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고 체험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런 역사를 하실 때 내가 그 자리에 없으므로 그 축복에 동참하지 못하는 일이 없기 위하여 청교도들은 어느 집회도 빠지지 않는다는 생활신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오늘의 성도들과 차이가 많습니다. 여기에 나오신 분들중에는 예배당에 주일 낮 예배 한번 나가면 되는 오늘의 성도들과 차이가 많습니다. 여기에 나오신 분들중에는 예배당에 주일 낮 예배 한번 나가면 되는 것이고 형편이 되는 사람은 수요일저녁에 나가고 새벽기도회 나가는 사람들은 따로 있잖아라고 합니다.그렇지 않아요. 어느시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시고 어느시간에 주님이 나를 만나시고 어느시간에 주님이 나를 변화시킬줄 모른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될 수 있으면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리고 도마는 자신이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믿지를 않았습니다. 부활이란 사실이 자신의 체험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도마는 믿지를 못했습니다.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고 할 때 도마는 내가 친히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을 옆구리에 넣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자세히 보세요. 믿을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믿지 않겠다고 부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회의가 아니고 불신앙입니다.믿을수 없는 정도가 회의입니다. 도마는 믿지 않겠다고 강력히 부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강력한 불신의 표현입니다. 의심이 잘못이 아닙니다. 도마의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도마는 불신앙의 자세에 있었습니다.그러나 주님은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
    우린 어떤 기적을 보고 싶어합니다. 얼마나 기적을 보고 싶어 합니까? 나도 아무개처럼 예수님이 꿈에 한번 나타나서 내게 말씀하셨으면 좋겠는데. 소원하지 않습니까? 이 소원은 바른 소원이 아닙니다.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보고야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도마는 눈에 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는 경험주의적인 신뢰 때문에 그는 부활의 꿈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회의 가운데 지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안하게 살았습니까?
    우리 주변에 도마같은 사람이 없습니까? 우린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나가서 주위의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주님을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노라고 담대히 증거하시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에 우린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에 못박히신 주님의 손과 옆구리에 피를 흘리신 흔적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네가 본고로 믿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을 믿고 담대히 주님앞에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어 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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