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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15:12-17/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 [주일낮]
  • 조회 수: 615, 2013.06.30 10:32:55
  • 몇 년 전에 TV에서 했던 드라마가 있습니다. ‘제빵 왕 김탁구’ 라고 하는데 너무 재미가 있었죠. 그런데 설교를 위해 오늘 본문을 묵상하다가 이 드라마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 이렇게 정했습니다. 드라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공의 이름이 탁구인데.... 이 주인공에게 빵 만드는 기술을 가르치는 스승이 어려운 문제를 냈습니다. 시험에 참여한 주인공을 포함한 견습생들에게 1인당 5만원씩을 주면서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을 만들라는 것도 아니고 세상에서 제일 배부른 빵을 만들라니.... 도대체 어떤 빵이 세상에서 제일 배부른 빵일까.... 5만원을 가지고 가장 양이 많은 빵을 만들면 되는가..... 뭐 이리 저리 고민하면서 시합에 참가한 사람들이 빵을 만들기 시작하겠지요? 과연 문제를 낸 그 스승의 생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주인공 탁구는 스승의 의도를 이리저리 생각해 봅니다. 빵의 질을 말하는 것은 아니고 뜻만 보면 양으로 승부할 수 있겠는데 스승이 과연 양을 많이 해서 배부르게 하는 빵을 만들라는 것일까....? 이리 저리 생각해보니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혼자 먹으면 심심합니다. 가족이나 친구들하고 같이 나눠 먹으면서 웃고 떠들면서 먹어야 제 맛이 나옵니다. 사랑은 나누는 것만큼 커집니다. 이것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빵이죠. 그래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배부른 빵은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담긴 빵이며,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은 여럿이서 함께 나눠 먹는 사랑이 가득 담긴 빵.... 이렇게 해서 주인공은 먹다 남은 소박한 보리밥과 삶은 옥수수를 이용하여 빵을 만듭니다. 보릿고개 시절 서민들의 굶주린 배를 채워주던 보리와 옥수수가 마음까지도 배부르게 해주던 기억을 더듬으며 빵을 만들지요. 겉으로 보기에는 투박하고 거칠어 보이지만 한 입 베어 물면 부드럽고 고소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그 스승은 주인공 탁구의 손을 들어줍니다. 하여튼 밥이든, 빵이든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이 먹어야 맛있고 배부릅니다.

     

    대학 다닐 때 저는 늘 5명의 친구들과 점심을 같이 먹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보이지 않으면 주변에서 한 명이 빠졌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습니다. 그 당시 학교 구내식당은 300원이면 큰 스댄 대접에 철철 넘치는 소고기 국밥 한 그릇이었습니다. 굉장히 싸고 영양가가 만점이었습니다. 제가 대학 들어가서 저의 어머니를 학교에 모시고 가서 이 국밥을 사 드렸는데 그 이후로 두고두고 부산대학 구내식당 찬가를 부르셨습니다. 저보고 거기서만 늘 밥을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와 친구들은 200원을 더 보태어 500원을 주고서라도 항상 학교 밖에 있는 중국집을 이용했습니다. 왜? 학교 식당은 언제나 학생들로 북적이기 때문에 같이 간 친구들과 같은 테이블에서 식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비록 수업 시간이 다르다고 해도 12시 땡 하면 누구든 먼저 가서 짜장면 5인분 철철 넘치게 담아주세요... 이러고 주문하고 나면 금세 친구들이 모여듭니다. 지금도 짜장면을 먹어 보지만 그 때만큼 짜장면 맛이 나지 않습니다. 어쩌다가 혼자서 대학 구내식당에서 300원짜리 소고기국밥을 먹노라면 그렇게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어머니가 그렇게 찬사를 보내던 그 300원짜리 소고기국밥은 사실과는 달리 제 기억 속에는 제일 맛없는 식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정말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롭게 혼자 밥을 먹어야 했던 기억이 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좋은 집에 살아도, 맛난 음식을 먹어도, 어디 좋은 곳을 가도 사랑이 함께 해야 행복이 있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면서 15절에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곧 나의 친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당시 기득권층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셨고, 더 나아가 누구에게나 친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본문 12절과 17절에서 반복적으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바람직할까요. 인간(人間)이란 용어에서 간(間)은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즉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것이 관계인데 이 관계가 미움, 증오가 되면 원수관계가 되고, 그 관계가 사랑으로 연결되면 연인, 가족, 친구가 되죠. 그러므로 이 관계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사이를 나타내는 이 관계가 삐끌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게 좋은 부부도 죄가 들어가면 원수지간이 되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도 죄로 말미암아 원수관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이 삐끌어진 관계를 바로 세우려고 온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줌으로 관계를 무너뜨린 죄를 심판하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를 원수에서 친구사이로 바꾸어 놓으려 오신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 15장은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관계회복의 장입니다. 1절부터서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친구와 친구의 관계..... 이게 모두 사랑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노라고 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신경 쓰고, 사람과의 관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무심하게 사는 것은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주님도 하나님을 예배로 만나기 전에 형제간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먼저 그 일을 해결하고 제사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말씀하셨죠. 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뿐만 아니라 손수 모범을 보여주시기까지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선언입니다. ‘바로 친구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로를 친구로 대하셨고,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로 대하셨으며, 오늘 본문에서처럼 제자들도 자신의 친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들을 친구로 대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얼마나 넉넉하게 하고, 풍성하게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웃을 친절히 배려하고 존중하는 친구 관계로 사는 것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누구에게나 다가가 대화를 나누고 공동체로서의 삶을 사는 것에서 정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풍요도 느끼며, 구원의 역사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아서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책잡고 그 여인을 죄인으로 벌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벌하시기보다 이웃의 정을 나누면서 함께하는 공동체의 관계성을 유지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먼저 대화를 건네셨고,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도록 은혜를 끼치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을 책잡아 넘어뜨리려 애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는 자들까지도 용서하기를 원하신 것을 보면 주님은 누구든 대적하지 않고 친구로 대하신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친구로 살아가면 사람과 관계가 풍요로워지고 나를 포함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됩니다. 주님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웃과 친구로 사는 데 필요한 사랑의 중요성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다 다릅니다. 우리의 사고는 다양합니다. 생각과 가치관이 서로 다르며 각각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과는 편하게 대화하며 친교를 맺지만,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기가 참 어렵습니다. 교회는 원래 처음에는 잘 지내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사이가 갈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다 좋게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 특성들이 나타나면서 더러는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도들이 많은 큰 교회 보다는 작은 교회에서 이런 일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그것도 도시교회 보다는 시골교회가 이런 면에서 더 어렵습니다. 수 십 년을 같은 마을, 같은 교회에서 살다보니 성도들을 다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시골 교회를 섬길 때 있었던 일입니다. 교회 안에 오빠는 장로님이고, 여동생은 권사님 사이인 두 집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장로님 부인되시는 권사님과 여동생 되시는 권사님 하고는 너무나 사이가 좋습니다. 도무지 올케와 시누이라는 부정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두 분이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얼굴이 굳어져 있습니다.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고 나서도 서로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이게 목사인 저에게도 불편하고 모든 교인들이 불편해 합니다. 그래서 한 날은 왜 그런가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은 서로 달랐습니다. 장로님 부인 권사님은 “목사님, 박 권사가 저보고 죽으래요.”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마 그런 말씀 하셨겠어요?” 그러자 권사님이 화를 내시면서 “얼마 전 콩을 심고 있는데, 박 권사가 와서는 언니 곧 죽을 건데 콩을 심어서 뭐하나 하잖아요. 그게 나보고 죽으라는 얘기가 아니고 뭔가요.” 그래서 그 박 권사님 보고 물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저는 별 얘기 안 했어요. 날씨도 더운데다 몸도 안 좋아서... 그 분이 갑상선을 앓고 있었거든요... 땀을 뻘뻘 흘리며 콩을 심고 있길래, 언니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사나, 곧 죽을 인생인데 일만 하지 말고 좀 편히 쉬라.” 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언니보고 죽으란 얘기를 했겠어요. 너무나 가슴이 아파요. 집에 찾아가서 그런 말이 아니었다고 해도 어거지를 쓰잖아요.” 하는 겁니다. 두 분이 이렇게 몇 달을 보냈는데 어느 날 보니 이전의 사이좋은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박 권사님이 여러 번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답니다. 사실 교인들은 그 권사님이 “죽으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 권사님이 와서는 그래요. “목사님 이제는 제 마음이 편합니다. 같은 교회 다니면서 말도 안하고 지내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언니 권사 찾아가서 미안하다고 하며 오해 풀어 하고 사과를 했어요.” 이런 일들이 비단 한 교회에만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별 것 아닌 일로 사단이 나고 그래요. 이럴 때에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허물이 있어도 틀고, 심지어는 상대방이 비록 오해를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먼저 손해 보고 미안하다 그러면 얼마나 좋겠어요. 


    현대인들은 이웃과 친구로 살아가기보다 배타적으로 멀리하며 사는 경향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습니다. 과학과 경제가 발전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기성이 심화됐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과 기질, 자신의 경제적 이익 등을 앞세우고 공동체 삶의 중요성을 등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자기 생각을 기꺼이 뒤로 하고 누구에게나 친구로 살아감으로써 주님의 길을 따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은 과거에 비해서 우리가 많은 것을 누려요. 이렇게 좋은 세상을 두고 눈을 감고 떠나시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요. 그렇게 좋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눈 감고 떠나시는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옛날이 배부르고, 행복했어. 요즘은 먹고 싶은 음식이 딱히 없어... 이게 우리 어르신들의 생각이시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것들에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친구로서 함께 누리지 못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 감추어야 할 대상, 피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기 때문에 그 많은 것들에 비해 여전히 가난하고, 배고프고, 허기진 삶을 살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도무지 우리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예수님이 우리를 친구로 삼아주었듯이 우리도 기꺼이 성도와 우리 이웃을 친구로 품어주셔서 정말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배부른 축복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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