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닮기 운동 (고전 11:1)
  • 조회 수: 126, 2013.07.09 20:44:29
  • '예수닮기운동은 ' 예수를 본 받아야하고 나의 인생관을 예수의 인생관과 정립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온갖 잡다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살아 왔습니다. 누가 이것이다 고함치면 이것에 생명을 걸고 누가 저것이다 하면 저기에 생명을 걸었다가 실패의 쓴잔을 마신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부가 인생의 전부다 재물이 최고다. 명예만 있으면 권세만 있으면 다할 수 있다. 머리돌고 지키느라 골치아프고 떨어져 절망에 빠져 자살하게 된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우리는 어떠한가? 이전까지의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이제는 버리고, 예수 안에서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해 나가고 새로운 인생관을 정립해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요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말은 '인생의 모델이 바뀌어졌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전에는 세상이 내 모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께서 내 인생의 모델이 된 것입니다. 그전에는 사람을 믿고 사람의 힘을 의지하여 살아 왔는데 이제는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 이것이 믿는다는 의미라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고로, 예수를 5년 믿고 날마다 기도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인생의 모델이 제대로 설정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모델로 삼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망가진 기계는 버리고 새로 구입을 해야 하듯이, 그리고 낡은 부속은 새 부속으로 갈아주어야 기계가 잘 돌아가듯이, 우리 인생의 모델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 모델로 교체하고 말씀의 부속으로 옛사람의 낡은 부속을 대체하고 갈아넣어야 돌아가지 아니한 인생의 바퀴가 잘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프로 골퍼가 슬럼프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고 저조하게 되었을 때 그 해결책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방법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난생 처음 골프를 배울 때로 돌아가서, 골프채를 손에 쥐는 것부터 시작해서 발이나 손의 자세 같은 기본 자세부터 다시 훈련을 받아야 슬럼프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 지금 내 인생의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할 때, 그 잘못된 자세, 잘못된 방법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단지 열심을 내고 부지런만 떤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그 원점이 무엇입니까?
    바로 [승리한 인생의 새로운 모델을 찾아 그를 닮아가는 일]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모델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까? 좋은 그림을 그리려면 무엇보다 모델을 잘 선정해야 합니다. 모델이 좋지 안으면 작품 또한 형편이 없어지고, 모델이 아름다우면 실력 이상의 작품을 그려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인생이 성공하려면 모델이 제대로 선정되어야 합니다. 인생이 성공하려면 그 모델이 인생의 성공자이어야 하고, 내 인생에 있어서 소망을 가지려면 그 모델이 소망적이어야 합니다. 
    실패한 인생을 모델로 삼고 살면서 성공을 바라고, 미래가 없는 모델을 바라보면서 미래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성도들이여! 누구를 모델로 삼아야 되겠습니까? 실폐하지 않겠습니까? 승리하겠습니까? 제가 오늘 그분을 소게합니다.모델로 삼아 모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멋진 의미있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 합니다. 그분 오직 예수님! 예수님! 그분에게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개치 마십시오. 절대로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유혹도 받지 마십시오. 믿고 끝까지 인내 하십시오, 승리는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 고지를 눈앞에 두고 정복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삶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 합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승리가 있는데, 거기까지 기를 쓰고 와 놓고는 바로 눈앞에 있는 승리를 포기하면 되겠습니까?

    [위기 뒤에 기회가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앞의 시험, 눈앞의 유혹만 이기면 곧바로 승리의 기회가 있는데 그걸 견디지 못하고 마음을 바꾼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하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인생의 모델로 삼고 예수를 닮으면서 살겠노라고 하는 처음의 그 결심이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모델로 하고 예수를 닮는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얼굴을 닮게 하고 연기 수업이라도 해서 말이나 행동거지 같은 겉모습이 닮아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것은 예수의 성품을 닮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자칫 바울이 교만을 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 교만을 떨면서 자만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충분히 돌아보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꿇어 자신을 낮추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10장 끝부분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0장 31-33절 말씀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 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즉, 바울은 지금 자신이 예수를 본받아 모든 사람의 유익을 구하기 위한 삶을 사는 것처럼, 이 [삶의 자세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라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미 완벽히 본받은 자가 아니라 아직도 본받아야 할 것이 많은 자, 그러나 본받으려는 자세를 가진 자라는 의미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지금 자신의 행위와 태도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모범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그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는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자신의 삶의 자세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누구 때문에 사는가?, 내가 사는 목적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확실하게 알면 인생이 분명해지고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는 의미와 생활에 임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내가 아니고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면 그 인생은 가치가 있는 인생입니다.

    사실 나를 위하는데 만 내 인생을 다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를 위해서만 악착같이 산 사람을 누가 알아주고 누가 기억해 주겠습니까? 나를 위해서만 사는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인생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생은 책망의 대상입니다. 한 달란트든 다섯 달란트든 손에 쥐고있는 달란트에 불평하지 말고 남기는 인생이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남기지 못한 사람이 더 큰소리 치고 야단을 떨게 되고 말이 많게 됩니다.

    성도여러분, 남기는 인생을 살려면 남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남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버리고 포기하지 않고서는 남을 위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주장을 하나님 앞에서 내세우거나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철저한 희생, 철저한 헌신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다 버리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도 버리셨고, 육체도 버리셨고, 죄인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저주의 가시관을 쓰셨고, 고통의 채찍을 맞으셨고, 온갖 욕설과 수치와 조롱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버리려야 버릴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가서 사형 언도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전 인생은 이렇게 타인을 위한 삶 그 자체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닮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무엇을 닮아야 한다고 보십니까?
    우선 먼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하신 일을 보면, 그러면 예수님이 자신의 무엇을 닮기를 원하고 계시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의 실체는 자신을 다 내어 주는데서 온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자기화"(自己化)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헌신과 인간을 향한 희생이 바로 예수님 인격의 실체입니다. 
    우리도 조금은 줄 수 있습니다. 들은 풍월은 있어서 일부분은 기꺼이 내 놓기도 합니다. 얼마동안은 베풀고 나줄 줄도 압니다. 그러나 다는 아닙니다. 절대 전부를 내어 주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다 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요, 제자는 스승을 본받는 자들을 말하며, 우리의 스승 되신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완전한 헌신과 희생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유입니다.

    여러분, 누가 뭐래도 자식은 부모를 닮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닮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으며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식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자신의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예수를 닮은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 예수와 함께 사는 것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다 버리고 이제는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주님이 가시는 대로,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됩니다.
    성도는 말 한마디를 하고 싶어도 예수님이 원치 않으시는 말이라면 말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절제할줄 알아야. 인내할줄 알아야 합니다.. 
    또 반대로 내가 하기 싫어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받들어 해야 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우리가 예수를 닮아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왜 그 명령과 가르침을 받들어 살아야 하는지, 왜 하나님께 헌신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알았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제자다운 제자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라 하면서 실상은 [가룟 유다]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를 닮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완전한 헌신과 희생은 어쩌면 인간인 우리에게 있어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처럼 완전하게 예수를 닮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만큼은 완전하게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울과 같은 자세를 가지십시오. 바울처럼 예수 닮기를 힘쓰는 성도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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