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닮기 운동(고전 11:1)
  • 조회 수: 125, 2013.07.09 20:45:43
  • '인간의 성격이나 성품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번 부모로부터 받은 성격이나 성품은 쉽게 바꾸어지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는 민족적인 특성도 있어서 전통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은 다른 민족에 비해 정이 많고 눈물이 많은 특징이 있는가 하면, 오늘날은 급하고 쉽게 변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대인 중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 때문에 고민하거나 불행하게 살아갑니다.
    소위 '왕따'라고 하는 사회문제만 보더라도 먼저는 따돌림을 하는 사람이 나쁘지만, 그러나 따돌림을 당하는 본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따돌림을 얼마든지 극복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따돌림당하는 것을 정도 이상으로 비관하는 탓에 그 문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정신병이 생기거나 아예 죽음 속으로 도피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오죽했으면 정신적인 문제까지 생기고 죽음으로까지 도피하겠습니까 마는, '성격과 성품이 조금만 무난했더라도 '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성격, 좋은 성품을 갖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행 불행과 직접 관계되는 대단히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 자신의 성격이나 성품을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본인이 생각할 때 "내 성품은 좋은 편이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원만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심각할 정도로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성격이나 성품이 좋다고 자신하는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은 잘 몰라도 자신은 자신을 속속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문제가 있고 솔직히 자신이라는 인간이 얼마나 냄새나는 구석이 많은지를 창피해서 말을 못할 뿐이지 스스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타고난 성품을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로 '기질'(氣質)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질은 여간해서는 고쳐지거나 바꾸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 말도 습관에 관한 속담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의 기질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질, 즉 성품에도 '상대성'이 있습니다. 이런 성품은 좋은 성품, 저런 성품은 나쁜 성품이라고 딱 잘라 절대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원만한 성격에 둥글둥글한 성품이면 보통 사람은 되지만, 그러나 성격이 급하다고 해서 반드시 나쁘고, 또 느긋하다고 해서 그것만 가지고 좋다고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급하게 처신해야 할 때에는 급하게 처신해야 하고 느긋하게 행동해야 할 때에는 그렇게 할 수 있어야 가장 이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성인군자라도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를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행을 통해서 도를 깨달았다는 '석가모니'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도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 약점이 있고 실수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천지에 완벽한 성품을 지닌 인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인간 중에는 없으되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완벽하십니다. 세상에 계시는 동안 인간의 몸을 입고 계셨지만 본래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성품만큼은 완벽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세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그래서 예수님의 성품을 연구하고 닮는 방법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 그러면 에수닮기 운동 
    (1)예수님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삶.
    (2)예수님의 기도하며 실행하는 삶. 
    (3)번째는 예수님의 "온유"한 성품을 닮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9-30절에 있는 예수님 스스로의 증거를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셨습니다. 
    '온유!'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겸손이 겉으로 드러나는 예수님의 삶의 자세였다면 온유는 예수님의 성품입니다. 
    그렇다면 온유란 무엇입니까? 어떤 상태를 온유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우리도 온유함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한 온유라는 말을 한자로 풀이할 때는 '따뜻할 온'(溫)과 '부드러울 유'(柔)자를 씁니다.
    즉, 따뜻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부드럽게 대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온유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온유라는 말은 이같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온유'를 헬라어로는 "프라우테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약한 이미지를 가진 낱말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어떤 경우에도 화를 안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낼 때에 가서는 화를 내고 안 내야 할 때에 가서는 안내는, 상황의 앞뒤를 잘 판단해서 가장 적절하고 알맞게 행동하는 것이 온유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고 해야 할 일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는 것이 온유요,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하지 않는 강직한 특성을 가진 것이 온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온유가 무엇입니까?
    진정한 온유란 부드럽고 온화하기는 하지만 무작정 부드럽고 따뜻한 성격이 아니라, 옳고 그른 사리분별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라 필요 적절하게 행동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온유란 단순히 외형적인 폭력이나 잔인함의 반대에 불과한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랑을 가지고 희생하며 그 희생의 고통을 인내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마음의 자세인 것을 이 시간 분명히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이 마음을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기에 우리가 온유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혈기'입니다. 
    온유하지 못한 성격 속에는 언제든지 혈기라는 무서운 복병이 숨어 있습니다. 온유함이 없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이 혈기를 부리는 증상입니다. 고통이나 화를 절제하지 못하고 화를 내거나, 말이나 주먹으로 싸움을 일삼거나, 도를 넘어 걸핏하면 때려부수거나 사나운 행동을 일삼는 것은 모두 혈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알렉산더] 대왕은 그 이름의 유명세만큼이나 또 다른 면에서 유명세를 떨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로 혈기라는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사람이 알렉산더입니다. 
    한번은 그가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억제할 수 없는 화를 부리면서 옆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창으로 살해한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알렉산더는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온유하지 못한 혈기가 인생을 망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혈기부리지 마십시오. 작은 혈기라도 부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리고 자기가 부린 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내가 부린 혈기 때문에 애꿎은 가족이 다치고 엄한 이웃이 다칩니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내가 부린 혈기에 희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마치 음주 운전해서 자신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가 혈기부리는 것임을 아시고, 여러분들은 엄한 사람 잡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가 성도다운 성도가 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무엇을 노력할 것입니까? 혈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혈기를 버리고 그 빈자리에 예수의 온유한 성품을 집어넣지 않으면 절대로 제대로된 성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닮기운동의 예수성품 온유를 닮으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을 받는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5절에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 요" 라고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의 중심 인물인 [히틀러, 무솔리니, 처칠]을 풍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처칠이 만났습니다. 만나서는 잘 가꾸어진 정원의 연못에 있는 물고기 잡이에 내기를 걸었습니다. 가장 잘 잡고 많이 잡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권력을 주기로 내기를 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히틀러]가 권총을 뽑아 발사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손쉽고 강한 방법처럼 보였지만 탄환은 물고기를 맞추지 못했고, 히틀러는 망신만 당했습니다. 
    다음으로 나선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실패를 보고는 직접 연못에 들어가 고기를 잡으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무솔리니도 실패했습니다. 물 속에서는 물고기의 동작이 사람보다 민첩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마지막으로 [처칠]의 차례가 왔고, 처칠은 연못의 물을 퍼내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고기는 당연히 가장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한 처칠에게 잡혔습니다. 그것도 한 마리도 남김 없이 몽땅 잡혔습니다.

    여러분, 제2차 세계대전의 결과가 어떻습니까? 강자였던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대해서는 사후에도 단죄의 소리가 높습니다. 아직도 세계인은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떱니다. 그러나 처칠은 지금 국가 유공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 이름이 새겨져 있고, 런던 '피커딜리 공원'에 현재 동상이 서 있습니다.
    부드러운 '가죽'과 예리한 '면도칼' 중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것이 강할 것 같습니까? 당연히 면도칼이 강할 것 같지요? 그러나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이지만, 옛날에는 이발소에서 이발을 하고 면도를 할 때 면도칼이 잘 안 들게 되면 넓적한 가죽띠에다 문질러서 날을 세웠습니다. 부드러운 가죽에 면도날을 마모시키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무딘 쇠로 된 면도날일지라도 가죽에다 몇 번을 문지르면 날이 시퍼렇게 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와 같은 사실들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겉보기에 강한 자가 무엇이든 다 차지한다는 것을 말합니까? 
    아닙니다. 마지막의 승자는 온유한 자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가 땅을 정복하고 차지하는 게 아닙니다. 온유한 자들이 결국에는 땅을 차지할 것이요 천국도 온유한 자가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성품입니까? 온유한 성품입니다. 어떤 온유함입니까?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행동에 절제가 있고, 자기가 확신한 하나님의 선과 의에 대한 의지가 확실한 온유함입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시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좇는 데 있어서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시는 데 있어서 만큼은 '못 말리는 예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날카로운 면이 다 무디어진, 그래서 적당히 둥글둥글하게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은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죄와도 어느 범위 내에서는 허용하고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에게는 이 예수님의 온유함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악에 물들거나 타협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인 선으로 악을 이기는 부드럽고 강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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