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곳이 뭐 하는 곳인가를 곰곰이 살피다가 십자가를 보게 되면“아! 교회구나”라고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고 십자가를 가진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사람을 죽이는 형틀입니다. 일반적인 사형틀은 목을 매서나 참수를 해서 쉽게 죽입니다. 죽는 것이 간단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이렇게 쉽게 죽이는 사형틀과는 좀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주 끔찍하고 사람을 오래오래 고생시키며 죽게 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무서운 사형방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런 것에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형은 먼저 채찍으로 맞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 채찍은 가죽으로 만들어 졌는데 군데군데 삼각형모양의 쇠를 붙여 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으로 사람을 때리게 되면 맞는 사람의 살덩어리들이 같이 떨어져 나오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십자가의 사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쯤 죽도록 맞은 사람이 실신하게 되면 다시 쉬었다가 기운을 차리도록 합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게 되면 사람에게 십자가를 지워 사형장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골고다 언덕을 향해서 가셨습니다. 그리고 골고다 언덕 사형장에 서 죄수의 옷을 벗겨 십자가에 답니다.
죄수의 손과 발에는 못을 박아서 세워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몸의 수분이 다 빠질 때 까지 낮에는 뜨거운 햇볕을 온몸에 받아 목이 타는 고통을 겪습니다. 또 밤에는 차가운 바람이 상처 난 몸을 에이는 고통입니다. 아침과 저녁이 반복되면서 이런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이 얼마나 끈질긴지 어떤 사람은 보름이상 40일까지 간다고 합니다. 이렇게 끔찍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죽는 것이 십자가의 형틀입니다.
또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새들이 날아와 눈을 파 먹고, 머리를 파먹습니다. 또 들짐승들이 찾아와 다리를 찢어 먹습니다. 십자가에 그냥 매달아 놓으면 이러한 고통을 온몸에 받기에 누가와서 죽여주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는 로마의 한 군병이 동정하여 차라리 빨리 죽으라고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원한과 증오의 창틀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방법 중 가장 악랄한 방법이 바로 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이 견디기 가장 어려운 십자가의 형틀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십자가의 형틀에 죽으심을 자처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아버지여 가능하면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기도의 제목을 다시 바꿔 주셨습니다.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왜 하나님은 하필이면 수 많은 죽음의 방법가운데 가장 비참하다고 하는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까? 만약에 이것을 모르면 우리의 믿음은 다 헛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다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기도해서 출세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르고 믿음이 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예수를 믿으려면 무조건, 덮어놓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 십자가 문제 만큼은 덮어놓고 믿어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펴 놓고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내용대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는 것은 기분이 아닙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경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알고, 깨닫고 믿고 행하는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는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아는 사람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아야 그것이 힘이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첫번째, 죄 지은 인간이 당할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고 죄지은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했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고 고통만 당하는 것이 지옥입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 지옥에 간 사람의 소원은 죽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에 간 부자가 “여기 오는 것이 너무나 나쁘니 내 자식들에게 가서 얘기해 주시오”라고 나사로 에게 부탁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죄 지은 사람들이 당할 끔찍한 고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감옥에는 누가 갑니까? 죄인이 가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감옥에 가게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원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죄 지은 사람은 지옥에 가게 되어 있고 고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지옥의 죽음에, 십자가의 죽음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 고통보다 더 한 것이 십자가에서 일어납니다. 죄가 클 수록 인간의 운명도 비참합니다. 그 죄 값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생각만 해도 비참한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나는 내 죄 때문에 저런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두 번째,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당할 모든 저주를 자기 몸에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를 보면서 예수님이 하신일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쉬기 위해서 내 죄의 짐을 모두다 주님께 드렸습니다. 삭개오의 짐도, 여러분의 짐도 주님이 지셨습니다. 그래서 그 무거운 짐을 모두 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짐이 있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의 짐, 내가 예수를 믿고 죄의 짐을 맡겼더니 주님은 그 무거운 짐을 가지고 십자가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서운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짐이 아니라 우리들의 죄의 짐을 지고 가지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주님이 그 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너의 죄 값을 내가 다 치루었다”
주님은 그 고통과 괴롬 속에서도 우리를 만족게 하시려고 죄 값을 다 치루시고 그 대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대가는 우리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며,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있으며,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나의 죄가 다 없이 되었습니다. 지옥가게 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다 없어졌습니다.
우리는 이 의미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다면 십자가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 죄도, 약함도 , 어리석음도 주님이 다 가져가셨다.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잘 섬겨서가 아닙니다.
내게 무엇인가 좋은 것이 있으므로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최상의 것이 있기때문도 아니고 내가 어떤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님을 죽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게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습니까? 그러나 그 아프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우리에게 대한, 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형벌의 표시일 뿐 아니라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 나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을 자가 된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지만 이제는 하나님과 관계가 가까워 졌습니다. 내가 금식기도를 했기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선 한일을 많이 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 나의 죄의 짐을 예수님이 다 짊어 지시고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죽고 나니 그런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십자가를 통해서 성도에게 주시는 은혜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번째로, 이방이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우리는 죄가 있어서 죄 값을 받을 사람이었고 그 결과 사망의 대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망의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망에 대상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기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이 기쁨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변화게 되는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고 사람의 변화입니다. 지옥 갈 사람을 천국 갈 사람으로, 저주 받을 대상을 사랑받을 대상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의 신앙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나를 살리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께 사랑받는 자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요즘 더 느끼는 것은 자녀는 부모를 닮는다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닮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쁜 것 까지도 그렇게 쏙 빼 닮습니다.
어떤 교사는 어떤 아버지를 가르치고 나이 먹어 그 아버지의 아들을 가르쳤는데 그 아들을 보면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부전자전”
학교 빼먹고, 공부 안하고, 학교 담장 넘나드는 것까지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적인 질병도 유전이 되어 닮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육체적인 질병은 그나마 고칠 수 있지만 그러나 영적인 질병은 정말 고치기 힘듭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건강을 많이 물려주어서 복을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범죄자로 키우겠다는 분이 계십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예수 잘 믿고 건강하게 성공하는 자녀로 키우려 해도 말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창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금 살기 어려우니 애굽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때 자신의 목숨이 아내로 인해서 위태로우니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였습니다.
그런데 창26장에 가면 그의 아들 이삭이 똑같이 그 일을 합니다. 이처럼 자녀들은 부모들의 잘못된 모습까지도 보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잘못하면 그것이 자신의 모습인줄 알아야 합니다.
내 자녀들에게 약점이 그대로 전수된다는 것을 알면서 그것을 전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자식들에게 영적인 약점이 유전되지 않도록, 신앙생활에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라”는 책도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 앞에 흐르는 저주를 끊으라는 것인데 그 저주를 끊은 방법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믿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가르쳐야 합니다. 판,검사가 되고 의사를 만드는 것은 나중문제입니다. 믿음의 계승만 잘 이루어지면 축복은 저절로 오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들과 함께 예배 드리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낼 때도 부부끼리만 알고 내지 마시고 자녀들을 불러 놓고 십의 일조를 어려서부터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살아가는 것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인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드리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이 때도 부모의 이름만 쓰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의 이름까지도 써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들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받을 대상이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받으며 살아가고 우리 가문을 복되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 믿음의 증거를 많이 보여야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을 약속으로 받는다고 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에게 애굽땅에 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해 내라고 했을 때에“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에게로 가오리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가 된 것입니다. 기드온은 추수해서 타작을 하는데 미디안 군대가 무서워서 포도주 틀 속에 깊은 곳에 들어가서 타작을 하던 겁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났습니다.“큰 용사여”기드온은“내가 무슨 큰 용사입니까? 저는 겁쟁이 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내가 너와 함께 하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용사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도 하나님께서“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여호수아도 승리하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도 이 세상속에서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제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길일이라고 예식장들이 메어졌다고 합니다. 길일은 다른 날이 아니라‘귀신이 손을 놓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에게는 귀신이 붙었다고 하면 인생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을 숨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귀신뿐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길수 있는 성령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이 성령과 함께 이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성령이 계시네 성령이 계시네”라고 찬송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찬송을 하면서 주님과 함께 이 어려움 속에서 승리하고 그 믿음 가지고 기도하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가운데 십자가로 승리하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