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복(갈3:13-14) [고난주간]
  • 2013.07.14 21:27:59
  •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 부활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이중표 목사는 별세의 신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도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곧 십자가를 서재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일까? 글 몇 자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일까? 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내게도 십자가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운 모습으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이와 같이 고민하고 있는 가운데 멀리 영천에 있는 '좋은 교회' 장로님이라고 하시면서 전화를 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신 분이었습니다. 이유인즉 어디 가셨다가 차를 타고 집에 오시면서 방송설교를 들고서 전화를 했는데 시무 하시는 목사님이 갑자기 입원을 하셔서 장로님이 새벽설교를 해야하는데 고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 주간으로서 새벽 설교를 어떻게 무엇을 하나하고 하는데 오늘 설교를 듣고서 힌트를 얻었기에 전화를 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어제 방송설교에서 고난주간 예수님의 일정을 앞부분에서 말씀을 드렸는데 그 부분을 정확히 알고서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해야겠다고 상세하게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화를 받으면서 이 장로님은 금년 고난주간은 정말 귀한 십자가의 체험을 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인들은 십자를 너무 화려한 것으로 장식하고 인간의 기호에 맞추기 위하여 십자가를 잘못 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면서 조심스럽게 설교를 준비했습니다. 

       왜 하필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낭만적인 것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도 비참해서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리얼하고 처절한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입니다. 먼저 십자가 처형이 발생하게 된 유래를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를 사형도구로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은 페니키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창으로 찌르는 방법' '끓는 기름 속에 던져 넣는 방법' '돌로 쳐죽이는 방법' '목을 조르고 물에 빠뜨리고 불에 태우는 방법'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으로는 죄수들이 너무 빨리 죽기 때문에 죄수를 천천히 참혹하게 죽이는 방법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이는 방법'을 고안해 낸 것입니다. 이 방법은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충분히 수치를 당하게 해서 일반 백성들에게 경고하는 효과도 노렸던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 처형 방법을 로마인들이 배워 가지고 노예들과 식민지 나라의 반역자들에게만 이 처형법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인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한데 반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도 바울은 십자가 처형에 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강도, 폭동, 반란을 선동한 자들을 처벌하는데 십자가형이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반란선동죄인 경우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이 로마에 예속되어 있음을 대중들에게 상기시켜 주는 지대한 역할을 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형수가 처음부터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까지 가게 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사형장에 이미 세로 기둥이 세워져 있고 사형수는 십자가의 가로 가름대 나무토막을 밧줄로 두 팔에 동여매어 등에 지고 사형장까지 걸어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의 경우는 후자의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무게가 얼마나 될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만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이 지고 간 십자가의 가름대는 길이가 약 180센티미터 정도이고 두께는 10-12센치미터이며, 무게는 약 40킬로그램이나 됩니다. 십자가의 세로 기둥은 가름대보다 3분의 1일나 더 길고 무게도 60킬로그램으로서 십자가 전체의 무게는 100킬로그램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것은 신성모독죄라는 종교적 죄목도 있지만 민중선동죄라는 정치적 죄목으로 인한 죽음이었음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의 가름대는 무게가 40킬로그램으로서 슬픔의 길이라고 하는 '비아 돌로사'의 꼬불꼬불한 언덕길로 골고다까지 걸어가셨는데 그 거리는 약 1200보 600여미터 가량 됩니다. 골고다 언덕은 약450미터의 바위산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짧은 거리였지만 밤새도록 고초를 겪은 후였기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 빌라도 법정에서 무덤까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멈추어 선 곳이 14곳이 있다고 해서 성지순례 하는 분들이 그 길을 따라 그때의 현장을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가가와 도요히꼬가 어느 날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설교를 마친 다음 밖으로 나오는데 두 학생이 자기들끼리 이런 말을 주고받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가가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실상 오늘 그분의 말을 듣고 좀 실망했어, 별로 말을 하지 않더군.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보니 성경을 눈앞에 바짝 대고 겨우 읽더군.” 이 말을 들은 다른 학생이 말하였습니다. "자네는 그가 왜 성경을 그처럼 눈에 바짝 대고 읽는지 아나?  몇 년전 그가 고베의 빈민굴에서 살 때 한 거지가 그에게 하룻밤 잘 곳을 청했지, 가가와는  그 거지를 자기 오두막에 데려와 함께 자다가 그 거지가 갖고 있던 트라코마라는 눈병에 전염된 거야. 이 병 때문에 그는 거의 소경이 될 뻔했지. 그리고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사람이 십자가에 달려 있는 동안에는 별로 많은 말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 

       여기서 말하는 가가와는 고아였습니다. 그가 폐병으로 거의 죽게 되었을 때 선교사의 도움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진실한 주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대한 명상」이라는 책을 쓰면서 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된다"고 가가와는 말합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삶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삶이야말로 바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야 하나?"에 대한 진정한 해답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십자가를 제대로 져본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막8:34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 어른이 되는 것이 싫은데 어른이 된 분 계십니까? 우리 모두는 어릴 때는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보니 차라리 어린 아이 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크고 작은 모든 삶의 문제를 자신이 짊어져야 하고 자기가 해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는 모든 문제는 아버지나 어머니만 찾으면 다 해결이 되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것은 어른의 신앙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십자가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라면서 제자가 됩니다.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구속의 은혜만을 생각할 때는 기쁨과 감격,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조금 있으니 제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저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우리가 지는 십자가에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당연히 지는 "형벌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좌우에 달린 강도들이 진 십자가가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둘째는 타의에 의해 "억지로 진 십자가"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의 십자가입니다. 억지로 진 십자가였으나 그의 후대가 복을 받았음을 롬16:1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 
        셋째는 의와 선을 위해 자발적으로 지는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이 지고 가는 십자가가 아직도 고통이요, 절망이요, 괴로움이라고 생각되십니까?

       뇌성마비 송명희 자매의 신앙간증집 제목이 『주님과 지고 가는 십자가』인데 자매는 간증을 마무리하면서 고백하기를 자신에게 주어진 뇌성마비의 육체가 운명이 아닌 '주님과 지고 가는 십자가'라고 고백했습니다. 이 십자가는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주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이 변할 때까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모를 때에는 이 십자가가 까닭 모를 징계와 같이 느껴지고 부모님에게 있어서는 혹독한 형벌이요, 굴레와 같이 보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이 주신 복이요, 선물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1:16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로다" 즉 바울은 십자가는 저주나 무능의 상징이 아니라 구원과 능력의 상징으로서 십자가가 바로 자신에게뿐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복이 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할 때도 보면 고전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 했습니다. 십자가 사건을 아는 것이 가장 큰 지혜요, 이것보다 더 고상한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 사이에 양을 매매할 때 그 크기에 따라 값이 오르내리는 것이 아니라, 양의 성질에 따라 값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질을 테스트하는 방법이 재미있습니다. 가파른 산비탈에 양을 놓아두고 살 사람과 팔 사람이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양이 비탈 위쪽으로 풀을 뜯어 올라가면 말랐어도 값이 오르고, 비탈 아래로 풀을 뜯어 내려가면 살이 쪘어도 값이 내려간다고 합니다.  상향성 양은 현재는 힘이 들더라도 넓은 산허리의 미래가 있지만, 하향성 양은 현재는 수월하지만 협곡 바닥에 이르러서는 굶주려 죽기 때문입니다."

       이 히말라야 고산족의 흥정은 현대 신앙인들에게 많은 교훈을 시사해 준다. 오늘 현대 성도들은 간편하고 안이하고 수월할수록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몇 푼의 돈을 이용해 현실에서 규정하고 있는 멋진 자리(?)에 땀흘리지 않고 앉아보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손 안대고 코를 풀려는 안일한 삶을 추구하고 예수를 믿어도 십자가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오직 부활의 영광만을 생각합니다. 
       이 히말라야의 양에 비긴다면 오늘날 아래로 풀을 뜯어 내려가는 하향성 인간들이 압도적으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영생을 추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겠노라고 나선 현대 크리스천들 가운데도 하향성 성도가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탈은 물론 올라가기도 힘이 듭니다. 
        그래서 찬송가 364장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도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38, 막8:34)) 고난을 싫어하여 땀방울을 흘릴 줄 모르며 수월한 것을 택하는 것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값이 적게 나가는 하향성 양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하는 현대 성도들의 대표적인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기도문이 있어서 소개하겠습니다.

    주님이 말하는 대로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장사할 때는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매주일 교회에 가는 것만큼은 예외로 하여 주십시오.

    주님이 바치라는 대로 헌금을 바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체면 유지 정도로만 조정해도 된다고 해 주십시오.
    주님이 짊어져라 하시는 대로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짐꾼이라도 사서 대신 지게 해도 그게 그거겠지요?

    주님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대로 사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지금 당장 하라고는 마시고 내일로 미루어 주십시오. 

    주님이 봉사하라고  하시는 대로 봉사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주님,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봉사는 다른 이가 해도 될까요?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한 주간 동안 십자가의 고난을 몸소 체험해 봅시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결단코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복이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미치게 되었고 그것의 효험이 오늘 우리를 구원시켜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영원한 원수인 죄가 죽고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형상이 새롭게 되는 복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복된 십자가를 우리가 기꺼이 져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6:14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자발적인 희생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리한 요구라면, 적어도 우리는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일 때 그 십자가를 피하려 하지 말고 구레네 시몬처럼 억지로라도 십자가를 지겠다는 신앙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우리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예수님 제자가 되는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의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부활을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39살의 짧은 생애를 마치고 간 시인 김동엽씨가 쓴 시 가운데 "껍데기는 가라"는 제목의 시가 있는데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4월은 추운 겨울이 지나고 따스한 봄을 맞는 계절입니다. 겨우내 잠들어 있던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계절입니다. 생명이 없는 죽음의 껍데기는 모두 다 가버리고 생명이 깃든 알맹이만 살아남아서 자시 존재하게 됩니다. 이제 고난주간을 맞이하면서 부활의 영광을 품에 안고 다가오는 금년 봄에는 기독교의 모든 껍데기는 다 가고 기독교의 알맹이인 십자가의 진리만 살아남아서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을 새롭게 하는 십자가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를 세워놓은 교회가 아닌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는 교회, 십자가의 정신이 살아역사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고난주간을 맞아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 신앙으로 더욱 경건하고 거룩한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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