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부윤리(엡5:18-33)
  • 조회 수: 83, 2013.07.19 21:27:17
  • 이 본문의 말씀은 많은 사람들은 아내와 남편의 윤리면을 설명하는 것으로 알고, 결혼식 주례설교의 본문으로나 가정의 달에 자주 듣는 설교 본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실은 (엡 5:32)에 말씀한대로 이 본문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비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33절에는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를 사랑하며, 아내도 자기 남편을 경외하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교회는 어떻게 그리스도께 순종해야하는가를 말씀하기 위해서 비유로 아내의 순종과 남편의 아내사랑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좀 문맥의 흐름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앞에서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라"는 말씀과 함께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화답하며 하나님을 감사, 찬송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한 삶이라고 하셨는데, 난데없이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고는 22절에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면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 또 6장에 가서는 자녀와 부모의 관계, 이어서 또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읽다가 문맥의 연결이 어색한 곳을 종종 발견하게 되지만 그러나 말씀을 전체로 묵상해보면 그 모순된 것 같은 부분에서 오히려 놀라운 진리를 우리들에게 깨닫게됩니다.

    이렇게 어색하게 이어지는 본문의 말씀은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의 삶은 교회 안에서의 감정적인 면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의 삶에서 그 성령충만함을 받은 증거가 나타나야하는 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성경교리를 아는 것과 생활과 연결되지 못하면 안됩니다. 또 은혜 받은 것이 우리의 삶에서 나타나지 않으면 그 신앙은 기형적인 것입니다. 오늘 이것 때문에 교회가 욕을 듣습니다.

    성령충만에 대하여 잘못 깨닫고 성령충만을 간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성경은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할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을 구하는 것은 그의 삶이 변화되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기 때문이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그의 삶이 변화됩니다. 그 사람이 변합니다. 술에 취하면 그 사람이 딴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같이 성령충만을 받으면 죄악가운데서 뒹굴며, 절망에서 신음하던 사람이 놓임을 받고 자유함을 얻기 때문에 그의 삶은 분명히 시와 노래와 찬미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 사로 교제하는 모습들이 나타납니다. 이것이 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성경에서 성령충만한 삶을 이것으로만 가르쳤다면 우리 생활은 엉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은 어떤 기도원에서나 예배시간이나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시간에나 나타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과의 교제가 좋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받은 사람의 그의 삶은 어떠해야합니까? 그의 삶 조차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으로 피차 복종하는 모습으로 변화된 생활로 나타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외형에 나타나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성령충만을 받으면 그 열매로 이 생활의 변화는 반드시 나타나야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았고, 성령께서 여러분들 가운데 계심을 믿으십니까? 또한 성령의 충만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충만을 받은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쁘고 즐겁고 찬송이 터져나옵니다. 교회 안에 이전에 그렇고 그렇던 사람들이 성령충만을 받으면 이제 한 형제임을 알고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생활까지 변화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생활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의 직장생활이 성령의 충만함으로 변화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의 가르침은 이원론적인 요소가 많습니다. 내세지향적인 준비를 말하지만, 그들은 이 세상을 염세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재림날짜를 말하면서 휴거해야한다. 그러니 가정이고 학교고 직장이고 재림한다면 다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가정을 뛰쳐나오게 하고, 직장을 그만 두게하고, 학교를 퇴학 맞게 하는 일들도 있습니다. 약혼한 사람들이 결혼은 해서 뭐 하느냐 하고 파혼을 해 버립니다.

    그러나 진정 종말을 준비하는 삶은 이런 비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적인 준비는 현재적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받은 자의 삶은 빛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인데 이전에 죄악 가운데서 의미 없는 삶을 살고 자기만을 위해서 살던 사람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충만을 받아서 자신을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날마다 고치고, 삶을 더욱 새롭게 하고, 진정 의미 있는 삶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 현실을 떠나서는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일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빛을 발하는 것입니다. 

    이단이 아니더라도 또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기도원이 다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런 곳을 자주 찾는 사람들에게서 부작용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세상 자기 현실과 분리된 것으로 여기고, 기형적이고 이상스러운 신앙형태를 신령한 것으로 여겨 따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너무나 평범하고 권태롭고 따분하기도 한 우리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가 받은 구원은 너무나 신비하고 신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진리와 구원은 사람들의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신비주의는 신비한 것 이적과 능력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비전은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넓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세계를 품고 기도해야합니다. 학생들 잘 들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잘 들어야합니다. 

    이 원대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비전을 실제로 이루는 것은 딴 데서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 현실에서입니다. 그저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위치에 성실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가정생활하고 직장생활하고 학교 생활하는 것으로 이룹니다.

    그러므로 결국 우리가 세상의 빛이지만, 우리의 빛을 발하여야하는 것은 가정이요, 직장이요, 사회이지 교회 안에서만 아닙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도 우리의 빛을 발해야하지만, 우리가 정작 빛을 발해야하는 곳은 어두움이 있는 그곳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또 찬양하고 뜨거운 기도를 드리는 것이 먼저 되어야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들의 생활은 어떠합니까? 성령 충만은 단지 교회 안에서 찬양드릴 때, 예배하고 기도하고 서로 교제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너무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려하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도 문제지만, 감정적으로 감성적으로 뜨거움만 가지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성령 충만한 삶은 실제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우리 만난 현실에서 삶으로 나타나야합니다. 

    가정에서의 부부관계와 부자관계, 사회생활을 말씀할 것인데, 그 원칙은 21절 말씀입니다.

    따라합니다.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성령충만한 삶은 두 가지 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데, 먼저 그리스도를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너희가 서로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우리들의 삶에서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세상을 변화시키고 구원시키는 역사입니다. 

    아내와 남편사이에서도 성령 충만함으로 주의 뜻을 찾아서 피차 복종하며 사랑해야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성령 충만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섬기며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직장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충만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실행해야합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사랑하다하고 찬송도 드리고 그 가슴은 뜨거워도 자기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의 실제 행위가 없으면 그것은 거짓된 고백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는 가정이지만 아내와 남편이 매일 다투고 사랑이 없다면 그 가정은 어디서 고장이 났습니까? 틀림없이 성령의 충만을 입지 못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피차에 순종하고 피차에 사랑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에는 주님같이 원수라도 사랑하고 싶지만, 은혜가 없을 때는 사랑하는 가족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원수같이 여겨집니다.

    성령 충만은 방언이나 예언이나 하는 은사나 능력으로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그 삶의 결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게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됩니다. 이를 위해서 성령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성령 충만하면 평안이 있습니다. 가정이 아름답고 건전하고 사랑이 넘치게됩니다. 남편, 아버지라도 성령의 충만하면 그 가정은 얼마 있지 않아서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아내, 어머니라도 성령충만함으로 살면 찬송이 있고 감사가 있는 천국 같은 가정으로 변해집니다. 

    오늘 가정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가정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인생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혼자 거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아담에게 아내를 주어서 돕는 배필이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것이 가정이요 부부제도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신 제도입니다. 교회보다도 먼저 만들어진 것이 이 가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사랑하고 피차 도우면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들을 잘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인생이 범죄한 이후에는 그 가정은 시기와 미움과 다툼과 살인이 있는 가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가정이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셨던 그 가정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성령의 충만으로만 치료가 됩니다.

    그러면 어떤 가정이 바로된 가정입니까?

    (엡 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성도들이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은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복종하라는 말씀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군주에게 억지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순종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스운 것은 예수 믿는 가정에서 싸움이 있으면 그래도 그 부부는 싸워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싸웁니다.

    남편들은 자신있습니다.

    "그래 성경을 보자. 우리 성경대로 살자, 하나님께서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나, 박박 대들라고 했느냐, 순종, 복종하라고 했나? 남편은 머리라고 했는데..."

    그러나 아내가 성경을 더 잘압니다.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하지 않았소!

    아내들만 복종하라 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피차에 복종하라 하지 않았소!

    남편이 할말이 없습니다.

    "어디 그런 말이 있나? 하나님은 왜 아내만 복종하라면 되지 피차 복종하라했나?" 

    여러분, 진정한 복종은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은 아내만이 남편에게 복종하고 성령의 충만을 입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복종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종이 상전에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복종이 나오지 않습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지 않은 사람에게 복종을 강요하면 싸움만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피차 복종하라고 하시면서 특별히 아내에게 먼저 남편을 복종하라고 하시고, 또 자녀들에게 먼저 부모에게 복종하라, 6장에는 종들에게 먼저 그 상전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까? 실은 피차 복종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아내나 자녀나 종들이 복종하는 것은 질서상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이 원리를 자꾸 잊고 부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내들과 자녀들과 종들에게 복종하는 것을 명령한 한 것입니다.

    시집온 아내가 처음에는 잘 순종합니다.

    그러나 아이 한 둘을 낳으면서 슬슬 고자세가 됩니다. 남편들을 부립니다.

    그러다가 시어머니라도 되면 순종은커녕 집안에 어른입니다. 요즘 우리 정치를 부인들이 들어서 망치는 것들이 다 이 원리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자녀들도 그렇습니다. 으레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키가 자라고 나이 먹으면 이를 잊어버리고 부모에게 대들기도 하고 거역하는 일을 합니다. 이제 제가 좀 커서 밥벌이도 하고 출세라고 하면 그 무식한 부모가 깔 보이고 부모 없는 자와 같은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종들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고용된 사람은 주인에게 순종부터 배워야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이 자유가 아니고 방종입니다.

    그러나 이 복종은 어려운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에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부작용이 있을 뿐입니다. 복종하는 것 같아도 온전한 복종이 아닙니다. 

    또 우리들은 복종하되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피차 복종해야합니다.

    주 안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합니다.

    주 안에서 부모에게 복종해야합니다.

    주 안에서 상전에게 복종해야합니다.

    이 말은 우리의 복종은 실은 남편이나 부모나 상전에게 하는 것 보다 먼저 하나님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될 때에 가능합니다. 

    (엡 5:22)에는 "아내들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하라"

    (엡 6:1)에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엡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엡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이 주인에게 복종하기를 그리스도 주께 하듯하라 하신 것 같이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을 주께 하듯 하라 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은 자로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순종합니다. 그런데 아내된 자들이 가장 믿음으로 순종해야할 상대는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유교적인 전통에서 아내와 남편의 관계보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더 중요시 하지만, 가정의 중심은 부부간입니다. 아내들이 시집와서는 남편만 보고 살다가 자녀 낳고는 그 자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치지만,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줄어듭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위기가 옵니다.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 남편의 권위를 세워주어야합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가정이 이 권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권위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의논의 대상이요, 친구가 됩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 가정의 결정권은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주어야합니다. 이것이 그 가정의 질서가 되어야합니다. 남편이 아버지가 그 의무를 다 못하는 때에도 요즘 같이 힘을 잃은 때에라도 그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위치가 어떤 것을 엄마가 보여 주어야합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아버지를 무시하는 말을 하기 시작하면 그 아이는 그 가정에서 배울 것이 없습니다.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엡 5:24)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창조의 질서상 그러합니다. 모든 일에 그 남편에게 복종하라 했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그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남편의 권위를 무너뜨리면 안되지만, 그 남편의 명령이 주님께서 하시는 명령인가 아닌가를 따져야합니다. 그 남편이 잘못된 것을 시킬 때에는 그 남편보다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해야합니다. 그러나 이런 때에도 조심할 것은 그 권위를 무시하거나 도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우리 남편들이 아내의 머리라는 것이 얼마나 부담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머리라고 지배하는 위치가 아니라 바른 깨달음으로 바른 행위로서 먼저 서야할 위치라는 것입니다.

    보통은 아내들이 먼저 믿게 되지만 나중에는 남편들의 신앙이 앞섭니다. 이래야 정상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신앙생활을 할 때에 더욱 그 권위와 명령이 바로 세워지도록 애를 써야합니다.

    아내들이 처음 믿는 남편이 모처럼 옳은 깨달음으로 말을 하면 "당신이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어! 그래도 내가 먼저 믿었는데... " 할 것이 아니라, 바른 깨달음 하나를 말할 때에 그것을 옹호하고 자랑하고 순종해야합니다. 이러면 남편들은 빨리 자랍니다. 어쨌든 남편이 그 가정의 믿음의 호주가 되기 까지 되어야합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남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내들이 남편을 순종하는 것 이상으로 남편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데도 남편들은 자꾸 잊어버립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자기 아내될 사람을 사랑하던 사람도 결혼하고 나서는 시들해지고 갈수록 식어져서 자기 아내보다 더 사랑하는 여자들도 있게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것을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것과 함께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실행해야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사랑할 것을 먼저 말하지 말고 자기가 해야할 순종의 의무를 다하고 남편은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 사랑하는 일을 해야합니다. 순종하든지 안 하든지 사랑해야할 것은 하나님의 의무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류최초의 부부싸움이 있었습니다. 범죄하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왜 내가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었느냐 했을 때에 아담이 그 이전에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사랑의 고백을 하고 또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도 생각나지 않고 선악과를 먹어놓고는 하나님을 원망도 하고 하나님이 주신 여자 그가 내게 주므로 내가 먹게 되었다고 책임을 넘기고 미워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신부가 되는 교회를 위해서 어떻게 했습니까?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부의 죄악을 책임지시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할 정도입니다.

    이렇고 저렇고 예쁘던 아내가 이제 차츰 살이 쪄서 정방형으로 보여도, 병들고 늙고 약하고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어도 사랑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몸을 주심같이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엡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엡 5: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진리와 성령으로 우리를 씻기시고 깨끗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육적으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같이 자기 아내의 신앙을 거룩한 신앙으로 만들어 주도록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또 자기 신부를 영광스러운 교회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습니다.

    아내를 어디까지 사랑해야합니까?

    아내에게 비싸고 좋은 옷이나, 보석으로 단장하게 하는 남편이 진정 그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입니까? 자기 아내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워지도록 하나님 앞에서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이 사는데 도와주고 함께 기도하고 아내의 신앙생활을 위해서 기도하고 하는 남편이 정말 아내의 인격뿐 아니라 신앙인격까지 생각하고 아내의 영원한 구원까지 생각하는 그리스도와 같은 남편입니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직장생활이나 믿음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자기 아내를 위하여 아내의 건강이나 아내의 하는 일 뿐 아니라 아내의 구원을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흠이 없이 영광 중에 드러날 수 있도록 복을 빌고 가르치기도 하고삶을 나누고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 있습니까? 

    이 사랑이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내들은 남편의 이 사랑을 받기를 원해야합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되 이 사랑으로 사랑해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아내를 남편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직 온전한 가정교회를 이루지 못한 가정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거룩한 시기심을 가져야합니다.

    "우리 가정도 과연 성경이 말씀 하신대로 온전하고 영원한 사랑을 가지고 피차 복종하는 가정이 되어야하겠다"는 각오와 욕심은 거룩한 것입니다. 가질만한 것이고 어런 제목으로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이기 때문에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가정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야하는데 누구할 것 없이 나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으면 됩니다. 아무리 조각난 가정이라도 내가 성령의 충만을 입으면 순종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치료됩니다. 회복됩니다. 바로 세워져 나갑니다. 
    신앙의 원리에 따라 여러분의 가정들이 성령의 충만하므로 그리스도를 경외하며 피차 복종하는 아름다운 가정교회로 세워지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10 admin 81 2013.07.19
admin 83 2013.07.19
8 admin 99 2013.08.18
7 admin 110 2013.07.19
6 admin 138 2013.07.19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