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된 효 (엡6:1-3)
  • 조회 수: 191, 2013.07.21 16:30:48
  •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을 "참된 효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떻게 해야 참된 효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 아주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된 것이 우리 기독교가 "불효의 종교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상숭배는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하는 사회적 관습이면서 동시에 신앙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그 조상숭배를 우상숭배라고 하고 미신으로 규정하면서 믿는 사람은 조상숭배를 금하게 하자, 당시 사회에서는 그런 기독교인들을 불효자식들이라고 크게 탄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제사제도로 대변되는 조상숭배는 아시다시피 본래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상숭배란? 우리나라의 고려말에 중국 명나라에서 유학이 들어와서 조선조에 꽃핀 유학의 한 학파인 주자학의 영향으로 생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주자가례라고도 하는데 :말 그대로 본이름은 주희라는 사람인데 주자라고 불리는 집에 가정예식으로 제사가 있었습니다. 그 주자네집 가정예식이 주자학과 함께 들어와서 조선 중기에 와서야 우리나라에 널리 퍼진 것이 조상숭배이자 제사입니다. 이것을 실학운동을 일으킨 정약용같은 분들은 " 어떤 집에는 양반 노릇한다고, 굶어도 제사는 열 개 스무개씩을 지낸다고 그 폐해를 지적하면서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적 관습이라고 개혁할 것을 주장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관습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안지내면 큰 죄를 짓는 것같고 불효막급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주자네 가례일 뿐인 것입니다.

    만일 죽은 조상이 와서 제사밥을 받아먹는다면 왜 일년에 한번 뿐이겠습니까? 매일 3시 3끼라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설사 또 그렇다 치더라도 1년에 한차례씩 얻어먹고가는 귀신이 무슨 힘이 있어서 자손들에게 복을 주겠습니까? 그것이 다 관습이요,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그러면 참된 효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참된 효를 할 수 있습니까?

    오늘 그 참된 효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는 순종하라이며 둘은 공경하라인데 이 두 말씀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주시기를 원합니다.


    1>>먼저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신학교의 선교학 시간에 문화인류학자인 서울대학교 한상복 교수의 강의 중에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분은 문화인류학을 하여서 지구상의 모든 종족들의 문화를 비교연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 아프리카의 미개한 종족들이며 극지방이나 고산지대 알려지지 않는 모든 종족들을 비교연구한 사람입니다. 이 분이 동물과 사람의 다른점을 이야기 하는데, 모든 동물들은 어미와 새끼가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의존한다고 합니다. 어미는 새끼를 보호하고 새끼는 어미를 따르고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물은 커서 제 먹이를 찾을 수 있게 되면 그때부터 어미와 새끼가 없어집니다. 서로 으르렁거리고 먹이를 놓고 다투고 심지어 서로 또 한 쌍이 되기도 합니다. 이것이 동물성인데 이 동물들의 이러한 관계는 "먹이"라는 것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이 다른가?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인간은 제먹이를 찾을 수 있고 또 나이가 들어도 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즉 부모는 자식을 보호하고 자식은 부모를 따르고 공경하더란 것입니다. 언어가 300-400개밖에 없는 어떤 미개인들도 다 부모를 공경하더란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동물과 다른 인간성입니다. 그런 까닭은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여기 옳다는 말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본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사실 효란 선행이 아니고, 공로도 아닙니다. 동물이 아닌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는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보면 다 그들의 부모님을 잘 모셨습니다.

    아브리함은 그 아버지 데라가 병들었을 때 끝까지 간호하고 죽을 때까지 그를 잘 모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이삭의 경우는 더했습니다. 자기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를 모리아 신으로 데리고 가서 그를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그 아버지에게 그의 목숨을 맡겼습니다.순종의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이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의 바른 길입니다. 우리들 보면 그렇습니다. 자식 때는 부모님께 온갖 것들을 다 요구합니다. 부모가 할 수 없는 것까지도 부모들에게 해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러고는 불평도 하고 원망도 하고,신세타령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은 그렇게 자식 키워놓아놓고도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못합니다. 섭섭한 일이 있어도 내색을 하지 않으십니다. 자식 눈치 며느리 눈치 손자녀들 눈치를 봅니다.

    제가 조금 바쁘다고 1시간이면 갈 수 있는 부모님께 명절 때가 갑니다.

    그 때도 가겠다면 "바쁜데 오지 말라 교통이 얼마나 힘든데..." 고 하십니다.그래도 내려가면 그때야 비로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안왔으면 섭섭할 뻔했다."

    부모님들은 속으로는 기다리고 기다리면서도 말을 못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마음을 알아서 그 부모님의 마음에 ?는 행동을 하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 들으신 줄 압니다.

    옛날 고려장-고름장이라도 했습니다. 그것 참 못된 끔직한 법입니다. 산 부모를 저 산에다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늙은 부모는 산에서 굶어죽거나 얼어죽거나 짐승에게 물려 죽습니다. 얼마나 나쁜 법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우리나라 고려시대까지 있었던 조상대우법이었으며 그것이 당연한 그 사회의 관습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는 고름장 안하면 조선시대에 제사 안지내는 것 같이 아주 나쁜 것이었습니다.

    어느 아들이 자기 어머니를 업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행여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깊게 깊게 산으로 들어갑니다.

    이 늙은 어머니는 지게에 업혀서 가는데 가만 있지를 않고 엎혀서 나무가지를 꺾어쌉니다.

    아들은 무거워 죽겠는데 어머니가 나무가지를 꺾느라, 흔들흔들하니까, 아들은 더 힘이 듭니다. 아다시피 지개를 지고 가면 뒤에 짐이 가만있어야지 움직이면 몹시 힘이 더 듭니다.

    그런데도 이 늙은 어머니는 자꾸만 나무가지를 잡아 꺾어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속으로 "이러니까, 노망했지 ....."

    아들은 그럴수록 더 깊이 가져다 버려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올 수 없는 비탈길로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늙은 어머니는 나무를 계속 꺾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참다 못해서 벌컥 화를 내면서 한마디 했습니다.

    "왜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어머니가 말합니다."애야 미안하구나. 실은 산이 깊어지면 네가 돌아갈 길을 잃어버릴까봐서 그런다."

    그 순간 이 아들은 회개하고 어머니를 업고 다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부모의 마음은 자기를 갖다버리는 자식일지라도 그 자식을 살리려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요즘은 현대판 고려장이 많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효도관광을 시켜드리겠다고 해놓고는 모시고 가서 거기다 놓아놓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로원에서는 노인들이 서로 제주도로 관광가지 말라고들 했다고 합니다.

    그것을 T.V에서 조사를 했는데, 그 노인들에게 묻습니다.

    집이 어디냐? 이전에 살던 집 아느냐?

    노인: 생각이 안난다. 그리고 눈물만 줄줄 흘린다.

    아나운서 말이다. "왜 생각이 안 나겠는가? 자식은 자기를 버렸지만 자식 체면 자식 걱정하고 그런 것이란 것이다. 얼마나 슬픈 일인지 모른다.

    여러분,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말세에 이것을 알라."고 하면서 말세에 사람들의 풍조가 "돈을 사랑하면 배반하며 감사치 아니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이 세상이 말세의 징조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의 빛된 행동인가?

    그것은 우리 성도들이 세상의 풍조대로 살지 아니하고 윤리적 각성을 했으면 한다.

    그래서 할 수있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은 부모님을 모시고 산다면 그것만으로 세상의 빛이 되는 행동인 것이다.

    그때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은 효자들이다."

    그래서 며느리를 얻을 때에 기독교인을 얻자. 우리아들을 예수믿는 처녀들에게 장가를 보내자" 이렇게 되어야한다.

    하나님은 오늘 지금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둘째,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공경이란 의미는 존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요즈음 젊은 사람들은 부모님들을 세대차이가 나네, 자기들을 이해하지 못하네, 하면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님들을 소외시키고 심지어는 저 골방에다 숨겨놓고 사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늙으신 부모님들은 이제 늙었으니까,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잖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노인 자신도 그런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한 생각입니다.

    사람은 각 시절마다 중요합니다만 어쩌면 노년기가 더욱 중요할지 모릅니다.

    우리들 인생이 아무리 시작이 좋고 과정이 좋았다 할지라도 그 끝이 안좋다면 그것은 실은 다 버린 것이 되고 맙니다.

    하루종일 바느질을 했는데, 만약 끝부분 매듭을 바로 짓지 않았다면 그 바느질은 헛수고가 되고 말 것입니다. 실이 풀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노년기의 인생도 인생의 부스러기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를 매듭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도 그런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늙은 부모님들을 그럴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공경입니다.

    물론 사실 우리가 아는대로 늙으면 사람은 허물을 잘 가릴 수 없게 되고, 제어력이 떨어져저 절제하지 못하는 면이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가 늙어,(창9) 어느날 포도주를 먹고 제정신을 못차리고 쓰러졌다. 거기다가 늙은이가 옷을 벗었는데 하체를 드러내놓고 자고 있는 것이다.

    의인 노아가 이랬다.

    이때 함이 들어가다가 이것을 보았다. 그러자 함은 "이것이 무슨 꼴볼견이냐"하고 형제들에게 가서 아버지의 실수를 들추어낸다. "아버지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샘과 야벳은 그 말을 듣고도 담요를 가지고 가서 뒤로 걸어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보지 않으려고)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허물을 덮어준 샘과 야벳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들춰낸 함은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함의 자손은 샘과 야벳자손의 종이 된 것입니다.

    우리들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허물을 덮어준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들춰내어 가십거리로 삼는 사람은 복되지 못합니다. 입의 재미를 위해서 남의 허물을 들춰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부모님들의 허물은 덮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복받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의 허물을 다 아십니다.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그런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셨습니다. 아니 덮어주셨을 뿐만 아니라,그 허물을 자기의 허물보다도 더 아프게 여기십니다.

    그런데 우리 자식들은 어떻습니까? 부모님의 사소한 허물 하나, 습관 하나를 이해하고 포용하기를 거부합니다.

    여러분! 효도는 인과응보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내가 내 부모님께 효도하면, 내 자식이 나에게 효도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내가 불효하면 자식도 불효를 합니다.

    자식들이 부모가 그 부모에게 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다닐 때 나무그릇이란 이야기가 영어책에 실려 있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3대가 함께 삽니다. 그런데 늙은 할아버지가 늙으니까, 손에 풍이 있어서 음식을 먹을 때 늘 떱니다.그래서 음식을 흘립니다. 안흘릴려고 들고 먹다가 그릇을 깹니다. 그러니까, 며느리가 더럽다고 딴상에다 주고는 그것도 그릇을 나무그릇에다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녀석이 나갔다가 들어오는데, 나무 목침을 가져다 놓고 그것을 칼로 깎고 있었습니다.

    "뭘하니?"

    아이: 나무그릇을 만들어요.

    아빠: 뭐하려고?

    아이: 아버지, 어머니가 늙으면 밥 담아 드릴 그릇을 만들지요.

    이것 웃을 일이 아니라 이런 일들이 우리들에게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효는 인과원리적으로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러분의 자녀를 키우시면서 "어찌 저런 귀여운 놈이 나를 그럴 수 있으랴? 하는데 여러분, 천만입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도 여러분들을 더 그렇게 나의 소유로 생각하고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지금 부모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습니까?

    설사 이 내 자식이 나를 푸대접하랴. 며느리 말을 듣고 나를 비방하랴 "그러시는데 여러분들이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부모님께 그렇게 하면 말이다.

    고로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인간의 원리요, 하나님의 명령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어가면서 참고로 두 가지 더 주의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효란 언제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시간의 제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행을 할 때 선행은 다른 선행은 시효가 없습니다. 즉 때가 없이 언제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효도만은 때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가 얼마 안된다는 것입니다.

    일본속담에 "효도와 불조심은 때가 늦으면 평생을 후회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 시인 정철도 이렇게 읊었습니다.


    어버이 살았을 제 섬길 일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달프다 어이하리.

    평생에 못고칠 일 그 뿐인가 하노라.


    또 하나의 주의할 것은 며느리들에게입니다.

    흔히들 고부간에는 숙적이네, 앙숙이네하는 말들을 하는데, 이는 심히 잘못된 말이요, 선입견입니다. 설사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것을 꼭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부모란 말이 있는데 성경에는 그런 말이 없습니다. 시집을 가면 남편의 부모님은 나의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집을 가면 성까지 그 시집가는 집의 성을 따라 씁니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성경적으로 그렇게 성까지 바꾸고 시집이 나의 집이 된다. 이것이 좋다. 시어머니, 시아버지가 아니라,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보다도 더 잘 모시려고 해야 합니다.

    흔히 여자는 자기를 사랑하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남자는 조금 다릅니다. 남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해주면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 중에 남자들은 자기의 부모를 잘 모시는 여자를 아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고로 남편의 사랑을 받으려면 시부모님 잘 모셔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성경에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말씀이 34회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효란 주자가례처럼 죽은 부모님 제사지내기가 아니라, 살아 계실 때에 잘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땅에 살아계실 때 잘 모시면 하늘 나라가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져주실 것이다.

    십계명 중에 1234계명은 천륜이라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계명이고, 5-10까지는 인륜으로서, 사람에 대한 계명인데 그 인륜 중에 첫째되는 것이 무엇인가?'

    "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일들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부모님 공경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6:2에 보면 "이것이 약속있는 첫계명이라"고 했습니다.

    약속 있는 첫계명이라는 뜻으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등보다 더 앞선 것이고, 약속있는 뜻으로 효도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의 길이란 것입니다. 어떤 약속? 출애굽기에 보면 "내가 잘되고 장수하리라."

    반복하지만 오늘날은 불효의 세대입니다. 새로운 고려장세대입니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은 이 말세의 풍조에 따라가면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이 패역사 시대에 효도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약속처럼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과 함께 우리자녀들에게 효도를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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