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씀으로 양육하라(엡6:4)
  • 조회 수: 136, 2013.07.21 16:53:15
  •  부모가 되어서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그러나 사실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갈등이 많은 관계도 없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부모와 자식간에 갈등이  많은가?’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를 들자면 ‘사랑이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최선을 다하여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은  말하기를 ‘나는 사랑을 받지 못했다.’그렇게 외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정 문제의 뿌리가 있고 우리의 답답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사랑하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 사랑의 방법에 대한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내 자녀들을 옛날과 똑같이 사랑하는데, 내 마음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왜 아이들은 전과 같지 않고 변해 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오해를 풀어야 합니다. 사람은 그 나이에 따라서 요구하는 사랑의 모습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의 나이에 따라서 변화된 사랑을 표현 해야만 그 사랑이 전달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서너살 먹은 아이가 말을 잘 못할  때에 이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저,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고 뽀뽀해 주고.... 이것으로 사랑이 충분히 전달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자라서 열댓살 먹은 청소년이 되었는데, 그 때도 옛날 생각만 하고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면 징그러운 아버지, 주책맞은 어머니가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 때에 맞는 사랑의 방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바로 친구처럼 상대해 주는 것이 그들을 향한 진정한 사랑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제 우리들의 자녀들이 성장해서 자식을 둔 부모가 될 때 쯤 되면 이제는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그때는 인생의 동반자로 맞아주는 것이 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내용의 사랑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똑같은 방법으로는 안되는 것이요, 동일한 내용인 사랑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랑하는 형태! 그 사랑의 형식이 부단히 시대와 아이들의 나이에 맞게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으면 사랑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도나이에 따라서 정의를  달리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러한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 사랑을 말합니다만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없습니다. 이제 그 복잡한 정의를 다 지워버리고 주는 자가 아닌, 받는 자의 입장에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무엇인가?, 간단하게 말해서 사랑이란 즉 ‘만져주는 거다’ 그렇게  정의를 할 수 있습니다. 만져주고 안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들은 안아주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신체언어, 다른 말로 스킨쉽(skinship)이라고 말합니다. 피부 접촉을 통해서 사랑이 전달됩니다. ‘미스터 엔돌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이상구’ 박사가 쓴 책에 보면 실험실에서 쥐들을 기르는데 젖을 먹여서 기른답니다. 그런데 어느 동물이나 다 그렇습니다마는 젖을 먹은 다음에는 어미가 새끼를 핥아 줍니다. 살살 핥아주는데 그 핥아주는 역할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실험을 했답니다. 그래서 젖을 잘 먹이고 실컷 핥아줄 수 있도록 배려한 쪽과 또 젖을  많이 먹이지만 핥아 주지 못하도록 금방 격리한 그 쥐들을 놓고 관찰을 해 봤더니, 어미들이 실컷 핥은 새끼들은 건강하게 자라는데, 핥아주지 못한 새끼들은 삐쩍 마르고 다 크기 전에 죽는 치사율이 상당히 높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기를 ‘쥐들도 젖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다!’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쥐들도 뭘 먹습니까?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만져준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사랑의 표현이 되는 것입니다.

       몇 년 되었습니다마는 주택은행에서 ‘차세대 통장’이라고 하는 것을 만들었는데, 아이가 태어나면서 부터 매달 1-2만원씩 적립을 해 나가면 20세 이상 된 다음에는 이 아이가 주택을 갖고자 할 때에 각종 특혜를 다 주겠다 뭐, 그런 내용의 상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1년만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가입을 해서 ‘조’단위를넘어섰습니다. 이것을 분석한 기사에 의하면 “부모들이란 자식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일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그 심리를 아주 잘 파악한 특종 상품이다”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자식의 미래를 위하여 돈을 예비하는 부모란 얼마나 좋은 부모입니까? 그러나  이 보다 더 소중한, 실수하지 않는 투자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야 사랑에 굶주리지 않은 인격을 가지고 자라게 되고 정서가 풍부하게 되고, 올바른 인격, 건전한 가치관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게 되므로 유아기 때 받은 사랑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보다 소중한 것은 많이 만져 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랑의 정의는 ‘쳐다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보고 싶고 또 나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배우고 재롱을 피울 때쯤 되면 부모들 보고 그렇게 조르는 것이 많은데, 그 조르는 내용이 무엇이냐면 보라는 것입니다. 뭘 그렇게 와서 자꾸만 보라고 조르는지 “이리와 봐요. 이리와 봐요.” 그런단 말입니다. 동요에도 있잖습니까? ‘엄마! 엄마! 이리와, 요것 보세요.!’ 보라는 것입니다. 안 봐도 뻔합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서 쳐다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란 말입니다. 쳐다보고 끄덕 거려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아이들은 사랑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저 쳐다보는 것, 그리고 끄덕거려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 다음에는 ‘들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하면 ‘그러냐?’ 하고 들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이들이 더 커서 청소년쯤 되어 애들이 뭔가 말을 하면 부모님들이 제일 많이 쓰는 말이 있는데,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용의 문제가 아니고 들어주는 일, 그 자체를 통하여 사랑이 교감되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이 소리를 들을  때 아이들은 절벽 앞에 선 기분이라고 합니다. 청소년 아이들의 50% 이상이 자기 스스로를 가리켜서 ‘난 외로운 아이..... 난 고독해’! 그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고독하냐? 집이 다 있는데! 자기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집에 와서 한  마디 하려고 하면 “얘는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난만 했냐?” 그러면 이제 반발을 합니다. “엄마는 맨날 공부! 공부! 공부!” 그럼 어머니들이 또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너를 사랑해서 하는 말이야!” 그럽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이란 공부하란 말이 아닙니다. 공부해야 될 줄은 그들도 아는데요. 말을 들어주는 것, 그것이 그들이 요구하는 사랑이란 말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과 대화하는 데 있어서 자꾸 대화를 기피하는 요소 중의 하나가 뭔가 하면 ‘얘가 무슨 얘기를 한참 했겠다? 그러면 나는 반드시 이 얘기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고 명확한 교훈을 주어야만 한다’고 하는 부담입니다. 그래서 이제, 해결책을 주어야 되기 때문에 듣지 않으려고 하는데, 사실은 아이들 자체가 이미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이 떠들면 “그러냐?” 하고 들어주면 되는 것입니다. 자기 얘기를 들어주는 부모만 있으면 탈선하지도 않거니와 탈선하더라도  후에 다 제 자리로 돌아온다고 합니다. “우리 애는 조금 크더니 영 말을 안합니다” 그런 얘기를 가끔 듣게 되는데, 말 안하는 아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하는데 안들어 주니까 못하는 것입니다. “너는, 비밀얘기 있으면 나한테 해!” 그렇게 말하지만 비밀 얘기가 어디 금방 나옵니까? 평소에 감정의 교류가 있었고 들어줘 버릇했어야 비밀도 나오는 것이지, 안들어 줬었는데 갑자기 비밀이 나옵니까? 그러니까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화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사랑은 ‘자랑하는 것’입니다. “얘가요. 우리집 큰 아들이에요, 이 아이가 우리집 막내 딸입니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손님이 오시면 “너는 얼씬도 말고 싹 비켜라!” 이렇게 나오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얘는 내  자식입니다.” 떳떳하게 말하고 더 나가서 “너는 우리 집 보물이다. 네가 있으니 얼마나 행복하냐! 너를 위한 수고는 우리의 즐거움이란다!” 그러한 말, 그러한 자랑, 이것이 사랑의 고백입니다.

       바울 사도는 교우들을 향하여 편지를 쓰면서 서신서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의 면류관이요.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나의 자랑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랑의 고백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나는 너만 생각하면 답답해, 어떡할래, 너? 아이구야! 앞날이 노랗다!” 이런 말을 하면 아무리 내가 그를 위해 수고해도 그 자식은 외치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받은 적이 없어요!” 받는 자가 느끼는 사랑, 이러한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없이 비싼 선물을 안겨 줘 보십시오, 사랑 받았다고 하나! 그러므로 사랑은 받는 자의 입장에서 이해되는 사랑을 주어야 합니다.

       이상심리를 연구하는 분들은 ‘사람마다 정상적인 인격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사랑의 절대량이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주장 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인격으로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랑을 받아서 여기에 충족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충족감이 부족하면, 나이를 먹고 몸은 커지지만 정서에는 결함이 생겨, 어른이 된 후에도 계속 문제점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른들을 가리켜 ‘어른 아이’라고 합니다. 어덜트 췰드런(adult children)! 그것은 바로 애정의 결핍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아이 때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어른이 되어서도 한 평생 그 결과가 따라오는 것임을 기억 해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자녀 양육의 원리를 압축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4절 상반절에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노엽게 하지 말아라, 이 소리를 왜 했겠습니까? 부모들이 자녀들을 노엽게 하는  일이 워낙 많으니까 노엽게 하지 말라고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왜 노여워 하는지 노여움의 문제에 대하여 연구한 교육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대개 이러한 경우에 자녀들은 노여워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할 때,  당연히 나에게 이러한 사랑을 주어야 하는 데 기대하는 바의 사랑을 못 받을 때 분노하고, 또는 부모에 대하여 실망할 때 분노하고 또한 자기를 인격적으로 대우하지 않을 때에 분노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불우 청소년 424명을 대상으로 해서 교회와 경찰이 연합으로 어떻게 하면 이 청소년들을 선도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놓고 설문조사를 벌였습니다. 여기서 불우 청소년이란 돈이 없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문제를 일으켰던 아이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아이들을 도대체, 어떻게 지도해야 되겠는가? 이들이 가장 필요로 하고, 갖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다정한 부모’였습니다. 여기에서 이러한 결론이 나왔습니다. ‘사랑이 결핍될 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환영하는 어떠한 집단에든지 예속되려고 한다. 그 집단이 좋은 집단이든 나쁜 집단이든 자기를 필요로 하고 오라는 곳으로 들어가고, 들어가서 그 집단 속에서 힘을 얻게 되면, 이제 자기를 마땅히 사랑해 주어야  하나 사랑하지 않은 부모나 사회를 향하여 공격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청소년 비행의 뿌리다’그렇게 진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받고 싶은 사랑 못 받을 때 아주 공격적으로 나와서 이것이 비행으로 나타난다 그런 얘기입니다.

       제가 언젠가 청소년 포럼에 참석을 했는데, 거기서 어떤 중학교 아이가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뭔가 하면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정생활 세미나를 했었답니다. 어떻게 부모님을 모시고 또 형제끼리 사이좋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하는데, 부모와 자식이 같이 참여하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도 엄마하고 같이 참석을 해서 아주 좋았답니다. 은혜를 많이 받고 밤늦게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데, 어느 할머니가 짐을 들고 타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피곤하지마는 저 할머니한테 자리를 내줄까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서려고 하는데 엄마가 눈을 탁 감고 콕 찌르면서 “우린 종점까지 가야될 거니까 가만히 앉아 있어!”그랬답니다. 그래서 자기가 엄마 얼굴을 한참 봤답니다. 그 다음부터 엄마가 뭐라고 하면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 있는데, ‘위선자! 엄마는 안하면서.....’ 그런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육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중요한 교육은 부모의 삶의 스타일, 그 라이프 스타일(life style)을 보고 그것을 모방하면서 그 사람처럼 되어 가며 인격의 성장이 있는 것인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니까 가치관의 혼란이 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해 자식은 노여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나를  인간으로 대우해 주지 않을 때입니다. 나도 성질이 있고 체면이 있는데, 부모가 꾸짖는 것까지는 좋은데 자기 감정 못 이겨서 길길이 날뛰면서 억압적으로 할 때는,  “나도 잘못한 줄 안다 이거야!” 하며 반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녀 키우기 어렵죠? 분노할까봐, 원망할까봐 그러면 훈계도 하지 말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훈계하라고.....“자식을 차마 초달하지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하면 매도 때려라 그런 얘기입니다.

       에릭 에릭슨(Erik H. Erikson)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루터」(Young man Luther)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심리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루터는 우리가 아는 종교개혁자 루터입니다. 루터의 아버지가 탄광의 광부였는데, 이 사람이 무식하고 힘든 노동을 하다 보니, 아이만 보면 기회만 있으면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폭언을 일삼고 쥐어 박고 그냥 막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칭찬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릅니다. 이 밑에서 루터가 컸습니다. 그러면서 느꼈던 이 소년기의 복잡한 감정들, 이 감정들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이것을 모아서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청소년이 자기의 정체성을 억압적인 부모 밑에서 키워나가는 과정을 묘사한 아주 좋은 책인데, 거기 보면 징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해야 된다고 했습니다. 자식을 꾸짖지 않으면 이 자식은 부모의 수염을 끄드는 아이가 됩니다. 반드시 잘못 되지 않게 하게 하기 위해서는 징계할 필요가 있는데 어떻게 징계해야 되는가? 먼저는 모범을 보이고, 그리고 징계를 하더라도 잘 했을 때에는 사과를 주는 것을 잊지 말아라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사과가 귀했던 모양입니다. 칭찬을 꼭 해주라는 말입니다. 징계와 칭찬의 균형이 없는 것, 이것이 아이를 못쓰게 만든다는 얘깁니다. 분명히 어린이들은 독립된 인격입니다.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인격이로되 그 인격이 성숙하지 못해서 징계를 받으며 성숙해야 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징계는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징계하느냐에 대해 6장 4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주의 말씀으로 양육을 해라, 쉽게 말하면 내 말, 내 기분대로, 내 감정대로, 내 판단과 상식으로 가르쳐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아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  “야, 너는 벌써부터 애가 거짓말 하냐? 내가 거짓말 가르켜 줬냐? 누가 거짓말 하라대?” 이러고 때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 왜 거짓말 했니? 성경책을 가져와라. 어디 어디 펴봐라!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거짓말하지 말라 하셨느니라!” 펴서 같이 읽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는 자에게 어떠한 벌이 있는지 읽어보라!” 또 애가 싸우고 왔을 경우는 분노하지 말라 하는 부분을 읽게 하는 것입니다. “다투지 말지니라. 또 해가 지나도록 분을 품지 말지니라...” 읽고 나서 아이가  “잘못했습니다” 할 때 그리고 나서 때려라 그런 얘기입니다. 이 징계의 권위! 이것을 말씀으로부터 가져와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나도 이성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가르치는 것과 내  상식으로 가르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렇게 일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통해서 교훈 받게 하면 이 아이가 문제 있을 때마다 성경으로 돌아가는 인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 아이들을 성경말씀으로 양육해야 됩니까? 이유는 바로 아이들 자체가 하나님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것이라면 까짓 것! 우리의 상식으로, 우리의 교훈으로 가르치겠습니다만 아이들은 내 소유가 아니요. 우리에게 위탁된 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길러가는 것이 정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유모’라고 하는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유모의 심정으로 너희들을 사랑하고 애썼다.’라고 하였습니다. 유모가 무엇입니까? 핏덩어리 어린 것을 데려다가 기르고, 기저귀 갈아주고, 먹이고, 길러 가면서 희생하는 분이 유모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식은 아닙니다. 이것이 유모의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기를 때에 희생하고 사랑하고 정성을 쏟지만 어느 사이엔가 ‘요것, 내 것이지, 내 자식이다 ’하는 사람은 유모가 아니고 도적입니다. “네 친어머님과 친아버님를 사랑하고 공경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가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유모의 길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란 하나님이 위탁하신 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낮에 교회 안에서 울움소리가 들려서 들어가 보니까 누가 기도를 하다가 제가 들어가니 기도를 그치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왜 우십니까?” 묻고 나서 아차! 했습니다. 이 댁 아이가 정신이 혼미한 아이거든요. 평소에도 동네 아이들에게 맞고 다녔는데, 이제 동네 어른들에게까지 욕을 먹으니까 엄마가 맘이 상해가지고 와서 우는 것이었습니다. 울면서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나한테 이런 아들을 주셨을까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하나님이 이 아이를 세상에 보내기는 해야 되겠는데, 집사님 정도는 돼야 안심하고  맡길 수 있었나 봐요” 더 이상은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렇게 말 했습니다. 가만히 있더니 “아멘!” 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기도하는 가운데 은혜를 받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데 그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날 믿고 위탁하신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인정 해야 합니다.

       어느 양치는 목동이 하나 있었는데, 이 목동이 자기 주인집 아리따운 딸을 그리워했습니다. 천사같이 예쁜 주인집 딸을 사모했으나 멀리서 쳐다볼 수 밖에 더 있겠습니까? 어느날 목동이 양에게 풀을 뜯기러 멀리 나갔는데, 하루는 의외로! 사랑하는, 마음 속에 두고  있는 공주같은 주인집 딸이 먹을 것을 바구니에 담아가지고 목동을 만나러 왔습니다. 얘기를 들어본 즉, 부모님이 양들은 잘 있는지 목동은 게으름 안피우는지 보고 오라해서 심부름을 온 것이었습니다. 온 것 까지는 좋은데 오는 동안에 소나기가 내려서 물이 많이 불은 바람에 그 날 밤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아가씨가 들판에서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잠도 안오고 무서우니까 목동 보고 하는 말이 “옛날 얘기 좀 해줘” 그래서 목동은 주인 아가씨가 무섭지 않도록 옛날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져서 보니 그 아가씨가 얘기를 듣다가 잠이 든 것입니다. 그 목동이 움직이려고 생각하니까 이 소중한 주인집 딸이 잠을 깰 것 같거든요! 그래서 잠이 깰까봐 움직이지 못하고 하늘을 쳐다봅니다. 말할 수 없는 행복함이 가슴 속에 가득합니다.‘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사람이 내 어깨에 기대어 잔다.’ 그리고 별을 보고 생각합니다. ‘저 밤 하늘에 별보다도  더 아름다운 별이 내 어깨에 기대서 자는구나!’그리고 온 밤을 꼼짝도 하지 않고 행복에 겨워서 그대로 날밤을 새웁니다.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고 하는 소설의 내용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하늘의 별보다도 아름다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들을  하나님의 목적에 맞도록 건전하고 바르게, 말씀으로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위대한 사명입니다. 부모들이 부족해서 이 소중한 선물들을 마구 짓밟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해야 할니다. “우리에게 주신 자녀를 바르게 기를 수 있도록 힘을  주옵소서.”라고. 그리고 “나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  되고 나를 닮으라고 말할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해 주소서. 그리고 그들이 이해하는 방법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런 자세로 길러 갈 때에 우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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