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그네의 믿음(히11:13∼16)
  • 조회 수: 72, 2013.08.04 16:02:49
  • 1980년대 초 교육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중 중.고등부 여름 수련회 기간에 이런 프 
    로그램을 학생들과 함께 했던 적이 있습니다.  언제나 사람은 종말론적인 삶의 자세를 갖 
    고 살 때 진지해 지는 법이기에 장례식 프로그램 이였습니다. 
      들 것 위에 한 사람이 누우면 4사람이 메고 나머지는 뒤따르면서 찬송을 부릅니다.   낮 
    빛보다 더 밝은 천국 믿는 맘 가지고 가겠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약간 겁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 
    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효과적인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보면서, 항상 초조해하고 마음 졸이며 삶을 살아온 것을 
    깨닫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에 대한 상상?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변화되지 않고 있는 인 
    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그래도 남아 있구나를 깨닫고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 
    고 반성하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의 임종이나 장례식을 떠올려 보는 일이 겁나고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잠시의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 뒤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지 깨 
    닫게 되기에 얼마나 소중한 경험이 되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고향은 어떻습니까?  가끔 가보십니까?  그 고향의 산천은 그대로 입니 
    까?  인심은 어떻습니까?  친구들 친척들 동네 사람들은 안 변했나요? 
      혹 산천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고 하면 고향이라는 것이 어찌 땅만 이겠습니 
    까?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옛날 그 사람 그대로 인 것 같으나 사람이 변했 
    습니다.  뜻이 달라졌습니다.  순수와 소박함이 없어 졌습니다. 때문에 그곳은 고 
    향일 수 없는 것입니다. 
      특별히 동물 중에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이 많이 있습니다.  한갖 미물이라도 그 
    모습을 보면 참으로 우러러보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어입니다.  연어는 제가 태어난 곳에서 넓은 바다로 나가 3년 
    을 지냅니다.  바다에서 10Kg 되는 큰 물고기로 자란 연어는 다시 제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단순히 바다에서만 왔다갔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다에서 강으로, 
    강에서 높은 곳에 자리한 폭포를 거슬러 시내로, 올라가야 된다는 말입니다.  영화 
    나 T.V에서 보면 10m 내지 20m 이상 되는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를 봅니다.   
      수없이 성공하지 못하고 떨어지면 또 거슬러 올라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 못 
    된 사람들은 폭포 밑에서 올라가려고 몰려드는 연어들을 낚아챕니다. 더구나 폭 
    포 위에서는 겨울 준비를 위해 지방질을 든든히 준비하려는 곰들이 잡아먹습니다. 
      그래도 연어는 일심으로 고향을 찾아갑니다.  온통 상처투성인 몸으로 알을 낳고 
    는 거기서 죽습니다.  절대 본능입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 인생을 외국인과 나그네에 비유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외국 
    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크세노이 라고 하는데 이는 낮선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본국 사람들에게 있어서 좀 이상하게 보이는 사람, 또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있 
    는 사람, 언어, 풍속, 생활양식이 달라서 이방시 되고 끝까지 이질적으로 취급되고 멸 
    시받는 사람을 통틀어 본문에서는 외국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그네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레피데모스 라고 하는데 이는 임시로 거주하는 
    자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 함께 삽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각자는 자기대로 
    고향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간에 얼마동안 한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 현재 사는 것은, 이 현실이라는 것은 항상 임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엄격한 뜻 
    에서 우리 모두가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미국으로, 캐나다로, 호주로 이민가야만 나그네요, 우리 고향을 떠나 살아가는 것만 
    이 나그네인 것만은 아닙니다.  고향에 살아도 나그네입니다.  사람이 바뀌고 인심 
    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니까 우리 모두는 나그네라 말입니다. 
       
      지금 길에 한번 나가 서 보세요! 
      많은 차들이 지나갑니다.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는 방향에 내가 지금 반대로 가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그런고 
    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속도의 정지라고 하는 것은 같은 차를 타고 똑같이 달려가야 
    성립합니다.  똑같은 속도로 달려가면 서로 정지 상태가 됩니다.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까 아니 내가 가만히 서 있다고 해서 정지가 되는 것이 아 
    니라는 말입니다. 
      보세요!  우리 모두가 느끼는 것인데, 요즈음 신세대를 X세대라 합니다.  기본이 컴퓨터입니 
    다.  새로운 유행어에, 옷에서부터 몸에 치장까지 새로운 유행으로 패선이 하루가 다르게 변합 
    니다.  새 풍속이 생겨납니다.  이제 자동차 면허 시대가 아니라 비행기 면허 시대입니다. 
      적어도 예전에는 아무리 하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의 눈을 의식했어요, 그런데 요즈 
    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몸으로 직접 느껴야 되는 세대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계속 그렇게 나가는데 우리도 따라 가면서 같이 공부하고 그렇게 
    느끼고 함께 가야하는데 우리는 지쳐서 도중하차하고 맙니다.  도저히 따라갈 재주 
    가 없습니다.  따라 가기는커녕 어느 땐 그 젊은것들 틀렸다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 
    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니 벌써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이제는 말이 통하지 않고, 생각이 통하지 
    않고, 사상이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만사형통이 아니라 만사불통의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고집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고로 엄밀한 의미에서 정지란 없습니다.  안정이란 없는 것입니다.  안정이라는 
    개념을 정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우리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가만히 있어도 나그네입 
    니다.  결국 낮선 자로 바뀝니다.  외국인으로 바뀝니다.  태어난 고향에서 일생을 
    살아도 나그네입니다.  한 집안에서도 어느 사이에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이 보는 세상 눈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이방인에 
    틀림없습니다.  같은 하늘아래 같은 지역에 살고 있지만 분명 그들이 이해하지 못 
    하는 나그네들입니다.  이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사도신경의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제네바교리에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 진술은 우리의 행복이 이 세상에 있 
    지 않고, 우리가 나그네처럼 이 낮선 땅을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행하고 있다. -- 이 진술이 사도신경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지상의 
    것을 무시하거나 또는 너무 거기에 집착하지 않도록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행복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 
    다, 이 지상의 것에 집착하지 말라 하는 뜻이 하나로 모여서  영원히 사는 것을 믿 
    사옵나이다 라는 고백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사람 
    들이기에  이 땅에 집착하는 생각을 다시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6대 대통령을 지냈던 존 애덤스는 늘그막에 종종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 
    고 공원을 산책하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를 잘 아는 어떤 사람이 인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존 애덤스는 대답합니다.   예 안녕합니다.  건강합니다.  그런데 
    집이 다 낡아서 지붕은 파손되고 벽은 떨어지고 바람에 흔들려서 받침대까지 세웠습 
    니다.  너무나 집이 낡아 버려서 곧 이사할까 합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존 애덤스는 대통령을 지낸 분이요, 가정 형편도 
    넉넉한 분인데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한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래서 이렇게 물어봅니다.   아니 각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집이 낡아서 이사를 
    가야 하시다니요   
      존 애덤스가 대답합니다.   허 이 사람 모르시는구만 남 좀 보구려 하면서 대머리가 
    다 된 자기 머리를 가리킵니다.   이것 보라구 지붕이 다 낡았지 않았소?   또 자기 
    늑골을 보이면서 말을 합니다.   이것도 보라구 이렇게 바람벽도 다 낡아서 이제 바람 
    이란 바람은 다 새게 되었어요.  아예 바람에 흔들려 쓰러질 지경이라 이렇게 지팡이 
    에 겨우 의지하고 있지 않소?  받침대로 지탱하는 낡은 집이니 곧 이사가야지 뭐 
      여러분,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어차피 낡습니다.  별의 별 방법을 다 써서 노력 
    해봐도 소용이 없습니다.  집은 낡게 되어 있고, 이제는 이사갈 때가 가까워진 것 
    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여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각자 나름대로 갖고 계신 고민, 갈등, 문제 
    들이란 바로 이 땅에 대한 집착성을 버리지 못하는데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전도서 7:2, 4절에 보면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 
    상집에 있으되 우메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의 시조인 쇼펜하우어가 공원의자에 혼자 앉아서 깊은 생각 
    에 잠겼습니다.   삶의 끊임없는 욕구로 인해서 삶은 고통일 수밖에 없기에 무욕구 
    의 상태로 가는 것으로 세상을 싫어하는 철학이 염세철학입니다.  어느덧 해가 뉘였 
    뉘였 기울고 공원은 텅 비었습니다. 
      공원을 청소하던 공원지기가 지나가다가 그를 보고 말합니다.   여보시오. 신사양 
    반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서 왔길래 해가 지는데도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 
    는거요  이 퉁명스러운 질문에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바로 그것이오!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는 중이오 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문제를 얼마나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까?  가정문제, 경제문제, 결 
    혼, 진학, 명예문제니 뭐니 하는 이런 저런 문제가 다 복잡한 것 같아도 정말로 고 
    민해야 될 문제인 영혼의 문제, 영생의 문제에 깊이 생각하게 되면, 사실 오늘 우 
    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그실 고민할 만한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고향 -- 우리는 돌아갈 고향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떠나온 고향이 아닙니다.   
    내가 태어난 고향도 아닙니다.  더 나은 본향입니다.  떠나온 고향을 생각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돌아갈 곳은 그 고향이 아닙니다.  이것이 본문 말씀 
    의 내용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조상들은 다 고향을 떠나 살았습니다.  아 
    브라함이 그렇고, 이삭이 그렇고, 야곱이 그렇고, 요셉과 모세와 룻과 에스더, 다니엘, 
    신약의 베드로, 사도바울 등 다 고향을 떠나 살았습니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며 살 
    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고 명령까지 
    하셨습니다. 
      다 무엇을 의미하는 말씀입니까?  돌아갈 참 고향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이요, 
    약속의 땅이 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이라고 하는 이 현실에 집착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의 삶을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계십니다. 
      즉 이 타향 생활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땅에서 더 기대할 것 없습니 
    다.  참 고향이 있습니다.  참 고향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느 보험회사 직원이 넉넉하게 사는 어떤 집을 찾아가서 집주인에게 생명보험을 
    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꼭 생명보험에 들어야 될 이유를 이것저것 설명합니 
    다.  주인이 대답합니다.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 말대로 생명보험에 들지요 그 
    대신에 당신은 내가 말하는 참 보험에 들어주시오   참 보험이라는 말에 보험회사 
    직원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세상에 생명보험이라는게 어디 있습니까?  그것 들 
    면 안 죽는다는 것입니까?  사실 죽어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고 다른 사람 좋게 하 
    는거 아닙니까?  그런 돈인데 그것이 어떻게 생명보험입니까?  참 보험은 하늘에 있 
    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험회사 직원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참된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약사 집사님은 절대로 자기 생 
    명보험을 부인에게 못들게 하십니다.  못 믿어서 그래요.  죽을까봐가 아니라 죽일 
    까봐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참 고향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미래의 문제 해결 없이는 현재도 없는 것입니 
    다.  현재에 집착하기 때문에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를 
    잊어 버리고 저 먼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이 비로소 미래도 얻고 현재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70이 가까우신 부부가 목사를 찾아왔습니다.  이유는 더 이상 못살겠다는 겁니다.   
    결론은 이혼해야겠다는 거죠.  그래서 목사님께서  앞으로 얼마 안 남았는데 그냥 살 
    지뭐 그러십니까?  하니까 그 대답이 또 명답입니다.   얼마 안 남았기 때문에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이 사람과의 생활이 지긋지긋해서, 이제라도 이 
    혼하고 바로 살아야 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부인에게 묻기를 당신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남편이 이제 한달 
    후에 죽는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보기 싫어도 한 달동 
    안 이 영감태기와 그냥 살아줘야겠지요  결국 위기를 넘기고 그럭저럭 살아간답니다. 
      여러분!  왜 문제가 복잡합니까?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이 땅에 오래오래 살 
    것처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을 살는지, 하루를 살는지 누가 압니까?  언제 
    어느 시간에 끝날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을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입니다.  아 
    브라함은 자기가 떠나온 그 고향에 돌아가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안 
    돌아갔습니다.  더 나은 본향,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요 주님이 계신 곳입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 
    셨습니다.  요14:2-3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 
    도 있게 하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며,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 
    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을 만납니다.  그 곳에서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오직 은혜에 속한 사람, 오직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사람,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 
    은 사람은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한국신학대 학장을 지내신 故 김정준 목사 1981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분 
    은 평소에 내가 죽는 날  저 종은 낙원이르니 내 기쁨 한량 없도다 라는 찬송을 끝 
    까지 불러 주시오.  나의 묘비에는  임마누엘 이라고 단 한마디만을 새겨주시오 라 
    고 부탁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지은 시입니다.   
        내가 죽는 날은 비가와도 좋다 그것은 나의 죽음을 상징하는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내 죄 씻음을 받는 감격의 눈물이기 까닭에, 
        내가 죽는 날은 눈이 부시도록 햇빛이 비치어도 좋다 그것은 영광의 주님 품안에 
           안길 내 얼굴의 광채를 보여 줌이라. 
        내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캄캄한 하늘이 내 죽음이라면, 
           저기 빛나는 별의 광채는 새 하늘에 옮겨진 내 눈동자이여라.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 
    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생명이다 하신 이 약속과 
    이 보장을 오늘도 믿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현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믿음의 조상들은 약속을 땅에서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하늘에서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를 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현실이요, 과정입니다.  약속이 그 과정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까?  목적을 재조정해야 하겠습니다.  다가오는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 
    며 나는 이제 무엇을 서둘러야 하는 것입니까?   
      어차피 다 가질 것도 못되고, 다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사람은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해야합니다.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과거로 다시 
    돌아갈 길은 없습니다.  막연한 미래를 절망할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참 고향입니 
    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약속해 주신 참 고향, 여기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댓글 0 ...

번호 제목 닉네임 조회  등록일 
admin 72 2013.08.04
43 admin 86 2013.08.04
42 admin 91 2013.08.04
41 admin 49 2013.08.28
40 admin 45 2013.08.0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