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그네의 하나님(히 11:13-16)
  • 조회 수: 87, 2013.08.04 16:03:48
  • "수구초심(首邱初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로 향한 다는 뜻으로써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컫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살다보면 고향의 푸근한 정취가 그리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눈물짓기도 하고 때로는 예정에도 없이 갈려가고픈 곳이 바로 고향입니다. 물론 명절에 고향에 가는 길은 매우 험란합니다. 그러나 고향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고생을 자초합니다. 계절은 다르지만 고향을 생각하면서 지은 한 편의 시를 소개드립니다. "한낮이 기운 듯 / 나른한 호박잎 사이로 / 고추 잠자리 한 쌍 쉬어가고 /원두막 아래 수박밭에는 빨갛게 / 여름이 익어 가는 곳 / 가마솥 가득히 / 갓 쪄낸 노란 옥수수, 햇감자가 별미인 고향에는 / 풋풋한 실바람이 좋아 / 종일을 / 울어대는 매미 소리에 / 호박꽃,박꽃이 / 취한 듯이 피어 있는 곳 / 백일홍이 고운 뜰 안에는 / 채송화,봉선화 / 곁들여 피어나고 / 어린 날 여름 밤은 / 평상에 누워 / 별을 세다 잠이 들면 / 긴 종아리에 / 베 홑이불 덮어 주시던 / 어머니의 손길 / 고향에는 / 지금도 그여름이 남아 있을까" 이 시는 고향의 잔잔한 정취를 생각나게 하는 시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육신의 고향이 있다면, 이 시간 꼭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에게는 또 한가지 고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삶이 끝날 때 돌아갈 영혼의 고향인 "천국(하늘나라)"입니다. 성경은 그 곳을 "본향"이라고 부릅니다. 이 땅으이 고향에 대한 개념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고향은 어린 날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이것은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애창해 온'고향의 몹'이란 노래의 한 소절입니다. 이 역시 어릴 적 시절을 노래하는 과거 지향적인 노래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본향은 미래에 살아야 할 저 앞에 있는 곳이요, 우리가 갈망하고 사모할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16절의 "사모하니","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훗날 가게 될 소망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한 공작이 여름 축제를 주최하였답니다. 그런데 그는 축제 기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지친 음악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계속 그 곳에 붙잡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 때 유명한 고전 음악가인 '죠셉 하이든'이 집으로 가고 싶어하는 그 음악가들을 동정하여 특이한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그 교향곡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 연주되는 악기의 수가 점점 줄어들어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자신의 파트가 끝나면 악기를 가지고 무대를 떠나는 곡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향곡이 끝날 즈음엔 바이얼린을 연주하는 단지 2명의 음악가들만이 남아서 아름다운 이중주를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하이든의 교향곡 제45번인 "고별교향곡"입니다. 공작은 그 곡을 듣고 작곡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되어 고용했던 음악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 다른 고별 교향곡의 연주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언젠가는 우리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역할이 끝날 때마다 본향으로 불러 가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느 날 인생이라는 이생의 무대를 떠나 본향에 입성할 때가 올 것입니다. 근래 한국의 대승이었던 효봉스님은 죽을 때 "인생은 無다"라는 한마디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유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완고하고, 불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허무하고, 기독교는 깊이 들어갈수록 기쁨이 있다'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에게는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 그 사귐을 그리워하네 / 그러나 그들이 우리 주님을 알고 사랑했다면 / 어느 날엔 그들과 동거하리. / 임종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안녕'이라 말하지 않고 '다시 만나요'라고 말하리" 라고 노래한 시도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본향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성도의 신분을 본문의 13절에서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즉. "나그네"라고 칭하셨습니다. 이 말은 성도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나그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처럼 본향을 소유한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어느 전도자가 " 천국이 나의 고향이지만 나는 향수병에 걸려있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천국에 대한 소망과 기대를 경시한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사는 날 동안 하나님 자녀로서 신분에 부끄럽지 않은 최선의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고백한 것입니다. 물론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 외롭고 우울한 사람들이나, 몸이 약하고 병에 시달린 사람들이 더 이상 마음의 고통이나, 아픔이나, 눈물이 없는 천국의 형언할 수 없는 축복을 동경하리라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살면서 본향을 사모하는 자세는 좋으나, 주어진 삶 속에서의 책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찬송가 543장의 2절은 원래' ♪괴롬과 죄만 있는 곳 내 어이 여기 살리까♪'라는 가사에서 '♬괴롬과 죄가 있는 곳 나 비록 여기 살아도♬' 라고 가사를 고쳤습니다. 이것이 보다 진정한 성도의 삶을 올바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에 바로는 물론 궁전의 모든 신하들이 기뻐하였고, 바로는 야곱의 가족이 애굽에 이주하여 살도록 기꺼이 많은 양식과 야곱의 가족이 타고 올 수 있논 수레와 선물까지 주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록 요셉이 한 때 애굽의 노예였고 죄수였다고 할지라도 요셉이 애굽에 끼친 공로에 대해 바로와 그의 신복들이 깊이 감사하고 있었다는 점과, 평소 요셉이 주위 사람들에게 신앙과 인격적인 존경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증거해 줍니다. 이것이 바로 본향을 사모하는 자의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고린도후서 2:15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라고 나와 있습니다. 성도라면 마땅히 그 신앙과 인격의 향기를 가족을 비롯하여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눠주어 그들을 감화시켜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럴 때 그들도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5:16에서도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의 빛괴 소금된 삶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여! 인생의 본향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뜬구름만 잡으려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을까요. 고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늘나라를 본향으로 삼고, 오늘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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