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십인의 파송(눅 10:1-9)
  • 조회 수: 40, 2013.08.26 07:46:00
  •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신 구도자 여러분, 우리는 지난주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한 세 사람을 만나 보았습니다. 모두 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제자가 되고 싶었으나 제자가 되는 값을 치르는 데는 주저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일단의 신실한 일꾼들을 만납니다. 서슴지 않고 주님의 부름을 따라 나서는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상당한 성공을 거둔 무리들입니다. 주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충성스런 제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바라보는 우리에게조차도 기쁨이 됩니다. 

    우선 본문의 흐름을 살펴봅시다. 10장은 분명히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부분은 24절까지입니다. 또한 이 첫 부분은 네 문단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문단은 12절까지로 칠십 인의 파송에 관한 기사이고 둘째 문단은 16절까지로 메세지를 거부한 사람들에 대한 심판선언이요 셋째 문단은 20절까지로 칠십 인의 사역보고와 주님의 충고이며 넷째 문단은 24절까지로 주님 자신의 기쁨과 감격의 선언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첫 문단을 중심으로 그것도 9절까지 한정해서 파송받은 제자들의 사역의 한 측면만을 중점적으로 살피려고 합니다. 파송받는 제자들의 앞길에는 두 가지 상황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영접받는 상황이라면 또한 영접하지 아니하는 상황도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우선 몇 가지 서론적 고찰을 할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개역 성경은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라고 번역되어 있는 반면 표준 새 번역에는 주께서는 달리 일흔 두 사람을 세우셔서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보고 사본상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성경이 기록되어 있는 본래 사본에 차이가 있어서 어느 것을 대본으로 취했느냐에 따라서 칠십 인 혹은 칠십 두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칠십 인이 맞는가 아니면 칠십 두 사람이 맞는가 하는 문제는 별반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권위 있는 사본학자가 밝힌 바대로 유대인들로서는 칠십이란 숫자와 칠십이란 숫자는 언제든지 서로 섞어 쓸 수 있는 숫자입니다. 다만 왜 칠십 인 혹은 칠십 이 인을 세우셨나 하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흔히 세상나라의 숫자를 그렇게 파악했습니다. 이 숫자는 창세기 10장에 근거한 것입니다. 창세기 10장에 노아 홍수의 각 나라를 죽 열거할 때에 히브리어 성경 원본에는 칠십 나라가 나와 있고 그것을 번역한 헬라어 번역 성경에는 칠십 두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세상 나라 하면 칠십 나라, 혹은 칠십 두 나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세우신 사람들의 숫자는 열방을 위한 일꾼들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열두 사도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위해서 보냄을 받았다면 칠십 인 혹은 칠십이 인은 온 세상을 위한 일꾼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앞으로 되어질 일을 미리 내어다 보고 있습니다. 누가는 미리 내다보는 일을 즐기곤 합니다. 그는 이 숫자를 언급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계선교의 시대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세계 선교 현황판이 걸리기 전에 누가의 마음속에는 이미 세계 선교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은 주님의 사명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의 사명은 승천하실 이후에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점은 왜 하필 둘씩 파송하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서로 돕고 격려하기 위해서 둘씩 파송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거기에다가 유대전통에 따라서 증인으로서 자격을 갖추기 위해서는 둘씩 나가야 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증할 것이요 신명기 19장 15절에서는 사람의 범죄 행위를 입증할 때에 적어도 두 사람 아니면 세 사람이 증거해야만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런 전통이 자주 반영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함께 사역을 한다던지 바나바와 사울, 바울과 실라가 같이 동역하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끝으로 언제 이 일이 있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본문에는 이 후에 라고만 언급되고 있습니다. 자연스런 추론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우선 이 후에를 9장 51절과 관련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그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후에도 변함없이 그 본래의 사명에 충실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평소에는 신앙이 좋은 것 같았는데, 암이란 선고를 받고 나니까, 그 동안 믿고 따랐던 주님에 대해서 흔들리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그 동안 하던 일에 대해서 의미를 상실하고 실의에 빠져서 마치 죽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동일한 선고를 받고도 이전 못지 않은 열심으로 해 오던 일을 완성하려고 더욱 애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삶을 사는 모든 인생의 첫번 주자와 같습니다. 그 얼굴을 예루살렘으로 향한 후에도 삶의 방향과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의 생의 목표와 자세는 위기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 납니다. 무엇 때문에 사는지가 분명한 사람은 어떤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선고도 그의 길을 바꾸어 놓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사역을 중단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 열정을 쏟아 붙고 계십니다. 칠십 인을 세우셔서 친히 가시려는 마을로 앞서 보내셨습니다. 

    또한 이 후에를 9장 1절-5절 사건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칠십 인의 파송은 열두 사도의 파송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께서는 선포의 사명을 열두 제자에게만 한정하지 않으셨습니다. 9장 1-6절에는 열두 제자가 복음 선포할 사명을 받아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여기는 더 많은 사람들, 칠십 인이 파송을 받습니다. 

    예수께서는 선택된 소수에게만 사역을 위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열두 제자 수준에 속하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아니 나는 울산교회 스무 명 장로 수효에도 들지 못하고 나는 안수집사, 권사 명단에도 들어 있지 못하다고 책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역을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누구든지 그의 일에 동역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가 아주 다양합니다. 다양한 은사는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합니다. 공동체의 사역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각각 다른 능력들을 주셨습니다. 그 은사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은 몇몇 사람에게만 한정될 수 없습니다. 앞서는 열두 제자에게 복음전파의 사명을 맡기시고 여기는 칠십 인에게 동일한 사명을 부과하십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그 앞에 예배하는 여러분 각자에게도 동일한 사명을 맡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잘 살펴보면 파송받은 칠십 인이 나가서 한 일에 대해서는 별반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대신 파송하시는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가 주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잘 들어보면 몇 가지 내용으로 주님의 분부를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맨 먼저 주님은 파송받는 자들에게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특별한 요청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주님께서 전도하는 것과 추수하는 것에 대해 비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농사 짓는 사람은 이 말씀을 우리보다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추수는 한해 농사를 마무리짓는 일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종종 하나님이 그 백성을 모으는 일을 추수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비유를 보면 천사들이 인자 혹은 추수꾼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는 제자들에게 이 추수의 사명이 위임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그 백성을 불러 모으는 추수가 제자인 우리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추수 자체가 한 해 농사의 끝마무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종말의 성격을 강조하는 대신에 그 일이 엄청난 것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칠십 인을 파송해야만 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일 뿐만 아니라 열방을 구원하는 일은 엄청난 일꾼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농사 지어본 분들은 알지만, 무르익은 곡식은 농부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곡식이 익으면 바로 그때 때를 넘기지 말고 추수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 때가 되면 시골에는 죽은 송장도 일어나서 일한다고 할만큼 바쁜 때가 된 것입니다. 추수하는 일은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마땅히 더 많은 일꾼을 보내 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올 한해동안 두 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가집니다. 이번 하반기에는 영적 추수를 위한 세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우리가 갖기를 원합니다. 내일부터 여러분들이 나와서 기도해야 할 것은 추수를 위한 일꾼을 보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추수할 주인에게 요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이 말씀을 보면 선교는 무엇보다도 기도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영적 추수 그것은 기도서부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주간 후에 추수감사절 그리고 그날 밤에 영적 추수를 풍성히 거두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합니다. 선교는 기도가 뒷받침되지 아니할 때에 제대로 열매를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제가 도왔던 변재창 선교사님이 하고 있는 그 열두 사도 공동체 신학교는 저희들이 몇 년전부터 도와 왔습니다. 변선교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정말 그 분은 일본 선교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놀라운 사역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일본에 6,7천 교회 가운데서 적어도 살아 있는 십분의 일은 그가 하고 있는 소목자 훈련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일본 선교 역사상 그런 일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탁하신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일본 선교의 기반이 닦여졌고 현지에서도 후원이 되고 있기 때문에 필요한 것은 한국교회의 기도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하나님의 사역들을 할 때에 선교사 자신이 건강에 공격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약1년 전에는 동역 하던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이런 일들이 아주 우연찮게 선교지에는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로 동역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무르익은 추수를 잘 감당하기 위해서 많은 일꾼이 필요합니다. 우리 이제 3주간 동안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만 합니다. 울산 복음화를 위해서 많은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곡식은 무르익었으나 거둘 일꾼이 심히 적은 상황을 인식하십시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밭은 울산광역시가 전부가 아닙니다. 교단의 장자교회로서 울산교회는 전국을 추수할 땅으로 여기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세계화 시대의 지구촌의 필요를 기억하고 기도하십시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라고 호소하는 3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또 하나 명심해야 할 사실은 추수하는 주인을 의식하는 일입니다.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때에 기도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추수의 주인이라는 것을 알 때에 우리는 영적 추수를 위해서 주인 앞에 아뢰는 시간을 먼저 가지는 것입니다. 일꾼을 부르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일꾼을 파송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현장에 추수를 총지휘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추수하는 주인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자들에게는 마땅히 해야 할 바입니다. 

    더 많은 일꾼을 요청하는 일은 더 많은 전도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절실한 일입니다. 사람이 주 앞에 많이 돌아오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명감을 가진 일꾼들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일꾼을 보내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꾼의 뒷감당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추수하는 주인으로 불리우고 있습니다. 여러분 농사짓는 사람들이 논밭으로 사람을 내보내고 일꾼들의 먹고 마시는 것을 책임지지 않는 주인을 봤습니까? 그런 주인은 없습니다. 일꾼을 보내시면 그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주인이십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또한 소비자 지향적인 상품이 아닙니다. 회심의 과정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필요합니다. 복음의 진수는 무엇입니까? 그대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돌아서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처음 들으면 사람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듣고 돌아서며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듣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그 마음을 열도록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영적 추수를 앞두고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도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주님은 당신의 사역자들을 위한 특별한 보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주님이 전도자가 가게 되는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를 이 말씀 속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예루살렘을 향한 첫 마을에서 거부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마을에서만 한정된 것은 아닙니다. 전도하러 나가다 보면 환영도 받고 거절도 당하는 것입니다. 여기 누가는 "이리 가운데 어린 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이라고 표현한 반면 누가는 이리 가운데 있는 어린양이라고 말함으로써 위험에 노출된 상황을 더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리 가운데로 보냄 받은 양과 같은 처지들입니다. 

    그 상황에서 양이 살아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목자에게만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적대적입니다. 그러나 제자로서 우리는 물러설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복음의 선포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갈찌어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참여와 봉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도망쳐서는 결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웃집에 벨을 누르지 않고는 제자의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들어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비록 이리 가운데 일 망정 주님은 그 제자들을 향해서 "갈찌어다"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린 양떼들을 몰사시키려고 사지로 주인이 몰아넣고 있습니까? 적대적인 세상 속에 그 백성을 향해 가라고 명하시는 주님의 심중을 헤아려 보십시오. 여기는 말로 나타내지 아니했지만 "갈찌어다"라고 말했을 때는 주님이 어떤 결심을 했겠습니까? "내가 지켜 주마, 내가 보호하마, 내가 함께 하마" 이런 결심을 주님 편에서 하셨을 것입니다. 

    갈찌어다 내가 너희를 보낸다는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우리를 세상가운데로 보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명령하시는 분은 어린 양 같은 그 백성의 목자이십니다. 그를 떠나서는 속수무책입니다. 현재 뿐 아니라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명령은 주님으로부터 발해졌습니다. 그가 명령하셨으면 그가 지키실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그 위험을 아셨습니다. 이리 가운데 어린 양을 보내는 것 같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당신이 보호하실 것을 결심하신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셋째로 칠십 인을 파송하시는 주님의 구체적인 지시를 들어봅시다.(4-9절)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주님이 하신 구체적인 명령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는지 살펴봅시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명합니다. 

    전대(지갑)나 주머니나 신(메고 다니는 쌕)을 가지지 말라고 여행준비에 관련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와 같습니다. 그 때는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주머니 말고는 서로 일치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곳에 나오는 목록은 일례에 불과한 것입니다. 

    모두가 여행에는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는 데 왜 아무 것도 준비하지 말라고 했을까요? 간편한 차림으로 여행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명했을까요? 선교가 주님의 일이라면 제자의 삶은 주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할 때는 주님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공급하십니다. 

    또한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여행에 관해서도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임무가 긴급하기 때문입니다. 준비한다고 세월 보내고 있어서도 안되지만 긴 인사한다고 노닥거리고 길에서 시간 보내서도 안 된다는 겁니다. 왕의 임무는 중차대하고 긴급합니다. 동양사회서 인사 주고받는 것 정말 중요합니다. 한번 헤어질 때에 평균 몇 번 인사하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어제 어떤 성도의 집에 입택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갔습니다. 일어서는데 인사를 몇 번 하는가 헤아려 보니까 인사를 수없이 하더라구요. 밥상에서 일어나면서 인사하고 신발 신으면서 인사하고 대문 앞에 나와서 정식으로 악수하고 인사하고 그러고도 차에 앉으면서 또 인사하고 차가 떠나면서 또 손까지 흔들어서 인사를 해야만 우리는 직성이 풀리는 것 같습니다. 주의 일을 맡은 자는 신속하게 그 일을 하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인사말조차 나누지 말라고 한 것은 우리가 맡은 사명이 얼마나 긴급한 것인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경우를 열왕기하 4장 29절에서 읽어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주의 일을 맡은 자는 언제나 신속하고 긴급한 심정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생명을 다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집에서는 어떻게 처신해야 합니까?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길에서는 인사하지 말라고 했으나 여기서는 전도자가 먼저 문안하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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