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십 인(눅10:17-24)
  • 조회 수: 32, 2013.08.26 07:51:45
  • 이 누가복음 10장 달리 칠십 인들의 한 일에 대해서 기록된 이 성공적인 기록을 우리 성도님들께 여러 차례 읽어보시고 각각 설교를 한번 만들어 보십사 라고 부탁드렸기 때문에 제가 오늘 짧은 시간만 말씀드려도 되리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오늘 중요한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우선 전도의 명을 받은 우리 전도자의 신분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냐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0장 1절을 한번 읽어보면 "이 후에 주께서 달리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이 한 구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전도자가 전도하러 나갈 때에는 예수님이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 혹은 각 집, 각 사람에게 선발대 격으로 먼저 가서 예수님이 당신을 만나려 하신다, 예수님이 당신 집에 들리려 하신다 라는 것을 전하여주는 그런 심부름꾼에서 더 나아가지 말아야 된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러 가는 분이 아침에 일어나서 예수님께서는 어느 집에 들리고 싶어하는지 아무 상관없이 그냥 가방 들고 나가서 나 전도하러 가련다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 가는 것은 주님의 보낸 자가 아니다 그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칠십 인을 둘씩 보내실 때 주님께서는 친히 가시려는 각동 각처에로 둘씩 보내셨으니까 보냄 받은 자는 어디를 가야되겠습니까? 보냄 받은 자의 의지에 따라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보낸 자의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야된다 그겁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고 전도하러 나갈 때에는 "제가 가는 곳이 주님의 가고자하는 곳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심정 속에 결심한 내용이 내 심령을 움직여 주셔서 저의 방향 잡는 곳이 바로 주님께서 잡게 만들어 주셔서 내가 방향을 잡은 결과가 되게 해 주소서."라는 마음으로 출발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또 그 집이 예수 이름으로 베풀 구원을 영접하겠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희가 가지만 우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주님의 이름으로 구원이 가는 거니까 그 구원을 이 집이 받겠는지를 확인해서 그 집이 주의 이름으로 병 고침 받기를 원하고, 주의 이름으로 속죄함 받기를 원하고, 주의 이름으로 새 생명 얻기를 원한다면 그때부터는 자기를 줄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시고 온 진리, 곧 예수님을 그 집에 전하여 주어서 그 만났던 사람들이 나를 만난 인연을 더 많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난 인연에 푹 빠지도록 해 드려야 된다 그겁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능력을 가서 행했거나 좋은 말씀으로 말씀을 전했거나 간에 그 집에 다녀왔는데 몇 달이 지나도록 1년이 넘도록 자꾸만 그 사람만 전화로서 '와주십시오, 와주십시오'라고 하는 경우를 가만 살펴보면, 그 와달라고 하는 집에서는 그 와주던 사람이 예수님을 모시고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느냐 싶을 정도로 자꾸 어느 누구를 와달라는 분이 있어요. 
    그러면 또 와달라고 하면 자기가 또 계속 가면서 자기가 뭔가 예수나 된 것처럼 직접 가서 뭔가 다 해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런데 전도자는 자기가 가서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모시고 간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것이고, 그 능력 행함을 받은 가족도 저 사람이 왔지만 저 사람이 모시고 온 예수님이 나를 고쳐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야 된다 그겁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그 전도하러 왔던 사람은 이제 일 마치고 돌아갔어도 예수님은 영접한 자기 심령에 그냥 두고 가셨다는 것을 알게 해 주어야 된다 그것입니다. 전도하러 왔던 사람은 그 집 일 마치고 돌아갔지만 그 전도하러 올 때에 그 사람이 모시고 왔던 예수님은 내 집에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 그리고 남아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고 떠나가면 그 가정에서 "어느 전도사님 계속 오십시오. 어느 목사님 계속 오십시오. 어느 능력자니까 계속 오십시오." 그렇게 하지 않고 "그분이 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모시고 온 예수님이 한 것 아니더냐. 그 예수님이 내게도 있지 아니하냐." 해서 그렇게 부르지 않고 자기가 스스로 '주여' 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겁니다. 그것이 전도자의 신분입니다. 그 이상 나아가도 안됩니다. 
    그러니까 전도자는 예수님이 가고자 하는 곳에 다만 가서 예수처럼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평안을 제가 소개하는 배달부입니다 하는 심정으로 전하여드리고 그분이 "당신은 별 인상이 안 좋지만 당신이 모시고 온 예수님이 그런 분이라면 그 예수님은 내가 모시고 싶네요."라고 하게 되거든 그 이후부터는 예수님을 계속 소개해서 그 집에서 떠나와도 그 집에서 허전함을 느끼지 않도록, 예수님이 한번 오셨으니 계속 계시다 라는 것을 알도록 해 주어야 되는 것이 전도자의 한계라 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면 아멘 합시다. 이것이 10장 1절만 보아서 충분히 알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 다음에 이제 특기할만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보내려 하였던 제자에게나 달리 보내시려 하였던 그 칠십 인에게 똑같이 내린 지시사항이 있습니다. 그 지시사항 가운데 공통점이 있는가 하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문적으로 교육받아서 전도자로서 전문직인 제자들에게와 그 제자들에게 문제가 생김으로서 아니 보낼 수는 없었고 달리 칠십 인을 세워서 평신도 중에서 내어보내게 된 비전문 전도인에게 지시를 내렸는데, 이 지시 두 개를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도하러 나갈 때에는 이것만은 반드시 있어야 된다 라는 공통점은 아주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그 공통점을 한번 찾아보겠는데요. 10장 4절부터11절까지 내어보내시면서 지시한 내용이 되겠습니다. 4절부터 봅니다.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 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눅10:4-11) 이것이 이제 예수님이 칠십 인을 내어 보내시면서 지시한 지시 내용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보낼 때에는 어떤 지시를 하셨는가? 9장으로 가서 살펴보시면 나옵니다. 9장 1절 이하에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이르시되 여행을 위하여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눅9:1-6)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일단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가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지시 가운데서 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과 이 칠십 인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공통점을 찾아보면 바로 이겁니다. "합당한 자를 만나거든 합당한 집을 발견하게 되거든 그 집에서 다른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겁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얘기입니다. 
    이 내용이 칠십 인에게는 10장 7절 하반절에 있고 또 제자들에게는 9장 4절에 있습니다만 '예수님을 영접할 구원받을 대상 집을 찾거든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그 집에서 그 사람에게서 이리 저리 옮겨가지 말아라. 그 집에 계속 머물면서 계속 그 집에서 일하라' 그 뜻입니다. 
    자, 이것이 이제 공통적인 지시 사항입니다. 누가 가든지 전도하려면 전도하는 사람은 이것은 분명히 지켜야 되겠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무슨 뜻이겠느냐? 그 뜻을 제가 말씀을 드려본다면 그 뜻 하나는 전도 받을 사람을 즉, 예수님을 믿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이 사람에게 전도하고 나 바쁘다고 금방 또 다음 집으로 가 가지고서 한번 전도한 것으로 끝나지 말아라 그겁니다. 

    그러니까 한번 전도해서 주님을 영접할 사람을 만났으면 그 사람과 계속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고 도와주어서 그 사람이 결실할 때가 될 때까지 자기 수준에 오를 때까지 '이제는 내가 돌봐주지 않아도 저가 스스로 더 믿겠구나' 하는 수준에 이를 때까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말아라 그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뜻입니다. 그러니까 "합당한 사람을 만나면 그 집에서 유하라. 그 집에 계속 있어라. 다른 집으로 가지 말라." 그겁니다. 그러니까 자라지도 않았는데 손떼지 말아라 그겁니다.
    우리가 물론 전도하는데 물론 저 역전에나 이런 데에 가보면 "예수 천당! 예수천당!" 하는 분들이 있어요. 믿든지 말든지 그냥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나는 전하고 나면 책임이 없다 해서 천국에 가서 욕 안 먹으려고, 천국 가서 매 안 맞으려고, 자기 책임 다하고 부담 없이 천국 가려고 외치는 분들도 있고요. 또 그렇게 외치다보면 걸려드는 사람 혹 있지 않겠는가 해서 외치는 경우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도 틀렸다 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이런 개별적인 전도를 할 때에는 이 교구에서 이 교회 지역에서 전도를 할 때에는 그저 한번 스치고 믿을 마음이 있는데 한번 전달했다고 끝났다 라고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끝까지, 끝까지 돌보아주고 주일날 가자고 독려해주고 그리고 같이 오고, 성경책도 사주고 또 찬송가도 펴주고 새신자 학교도 가도록 해 주고, 적어도 세례 받을 때까지는 그렇게 하라는 뜻으로 여기는 받아들여야 되겠습니다.

    또 다른 한 뜻은 어떤 뜻이겠느냐 하면 주님을 믿겠다는 집을 만났으면 그 사람에게 전도꾼처럼 보이지 말라 그겁니다. 전도꾼,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보내셔서 예수님이 당신에게로 나를 보내었기 때문에 왔습니다. 나를 당신 집에 보내면서 예수님을 영접할는지 안 할는지를 알아보라고 하셔서 내가 왔는데 예수님은 이런 분입니다. 이 예수님의 당신에게 주고자하는 것을 받기를 원하십니까?" 이렇게 이제 물을 때 즉 "평안을 원합니까?" 병들었으면 "건강을 원합니까?" 귀신 들렸으면 "귀신을 쫓고 자유 하기를 원합니까?" 소망이 없고 불안하고 두렵다면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갈 수 있는 그 길을 주님이 주시고자 하여 당신에게로 나를 보냈는데, 그 주님이 주시고자 하는 평안을 받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이렇게 물어보는 겁니다.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시오. 당신이나 믿으시오. 난 내 주먹을 믿소. 나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요." 이렇게 하고 거절하면 그냥 돌아서서 나오겠지만 "그것 관심 있는 얘깁니다. 매력 있네요. 정말 그런 것을 주실 수 있다면 그 예수님이 나와 내 집에 한번 주도록 해 보시오." 이렇게 될 때에는 그 사람 집에서 어떤 느낌을 갖도록 해 주어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은 나를 당신에게 보냈고 예수님은 당신 집을 목표로 하여 오셨지 아무렇게나 지나가다가 당신에게 복을 흘려주는 것 아니다 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지혜롭게 해야 된다 그겁니다.

    제가 설명을 좀 드리면 이해가 갈 겁니다. 제가 이제 이리 저리 복음 길 따라서 왔다 갔다 하기 때문에 설교 시간은 가능한 한 제가 어려워도 충실하려고 합니다. 제 맡은 분야라 아주 충실하려고 하는데 심방은 많이 못합니다. 
    여러분께서 이해해 주셔서 그저 이렇게 제가 붙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가끔 이렇게 심방을 나가게 되면 하도 자주 목사가 못 가는데, 성도님들 가정에서 목사의 심방 받기를 원하니까 이제 어느 아파트에서 심방 예배를 다 드리고 나면 교구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또 그 어떤 권사님이나 이런 분들이 "목사님,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여기 끝났지요?" "예, 이제 끝났으니까 가야지요." "바로 이 두칸 아래에 아무 아무개 집사 있습니다. 저 바로 옆에 지나가는 그 길에 우리 집사님 가게가 있습니다. 거기에 좀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진작 얘기하시지…." 미리 얘기 않고 지금 갑자기 얘기합니까 라는 표현을 제가 은근히 하면서 별로 탐탁지 않고 그런 경우에 제가 기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아마 저와 같이 다닌 분들이 거의 그것을 느꼈을 겁니다. 
    그것은 왜 그러냐하면 벌써 그 집에 심방을 하고 아직 그 집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는데 그 집 식구가 있는데 "저기 또 갑시다." 이럽니다. 그러면 그 집에서 느끼기를 '오늘 우리 목사가 우리 집에 심방 온다고 해서 나는 우리 집에만 오는 줄 알았더니만 사방 돌아다니다가 여기 걸려들었네' 그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또 이제 "그 아랫집에 갑시다. 옆집에 갑시다." 해서 들려서 이제 가게됩니다. 가면 또 주문하기를 뭐라고 하는고 하니 "목사님 힘드시고 하면 잠깐 들려 가지고서 기도만 한마디 해주고 가면 됩니다." 이럽니다. 
    그런데 이제 기도만 한마디 해주고 이제 가려고 가기는 갑니다만 가서 이제 또 예배를 대체적으로 봅니다. 이렇게 보는데 예배 마치고 오고 나면 그 아랫집 윗집에서 서로 목사 보내놓고 모여 가지고서 뭐라고들 얘기하느냐 하면 "김 집사, 당신 집에는 목사가 와서 찬송 몇 절 불렀어?" "4절 불렀는데? 4절 있는 찬송 불렀는데, 왜 당신 집에는?" "만복의 근원, 한 절밖에 안 부르더라." "그러면 목사가 당신 집에 와 가지고서 어떻게 몇 분 있었어?" "10시에 와 가지고서 11시 1반, 한시간 반 계셨어." "우리 집에는 7분밖에 안 있었어." "너희 집에서 기도할 때 목소리 크더나?" "우리 집에서 기도할 때 목사님 막 목소리 마이크 댄 것처럼 우렁차게 기도를 하시더라." "우리 집에는 모기소리 같더라." 이렇게 비교를 하게 됩니다. 
    그 비교하는 마음은 어떤 심정입니까? 절실합니다. 이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이, 주님을 맞아들일 때에 자기만 만나려고 오시기를 바라는 겁니다. 자기 집에만 오시려고 결심하고 오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고, 전도꾼처럼 사방 지나다니다가 '여기도 한번 들여다볼까, 저기도 한번 들여다볼까?' 이런식으로 그저 들어온 것에 대해서 굉장히 서운하다 그겁니다.

    물론 성경에서 보면 스로보니게 여인이 이방여인이 주님에게 와서 내게도 은총을 베푸소서 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떡을 취하여 자식에게 아들에게 주는 것은 마땅하지만 개에게 던지는 것은 마땅하지 않도다."라고 했더니 그 여자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여, 옳소이다만 상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는 먹나이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그 여자는 "자기는 받을 자격이 없지만 어찌 지나가다가 부스러기도 떨어지면 난 그것을 먹겠다."라고 했을 때 주님이 보통스러운 얘기로 들었습니까? 깜짝 놀랐습니다. "이방인 가운데 이런 믿음 좋은 사람이 있느냐? 부스러기라도 좋다 라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이스라엘 중에 이런 믿음이 있느냐?" 했어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특별난 케이스니까 주님도 깜짝 놀랐고 성경에 기록될 만큼 그것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흔히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집에 전도하러 가거나 축복을 하러 갈 때에는 바로 "주님이 나를 당신 집에만 오늘 어쩐지 보내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지고 주님을 모셔들이든지 밥을 잡숫게 하든지 당신을 상대로 왔습니다." 하고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그 사람과만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기술이 필요하다 그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여기서 막 그렇게 하고 있는데 심방을 하고 있는데 "바쁩니다. 목사님 빨리 끝내고 또 옆에 가야 합니다." 갈 망정이라도 그런식으로 하지 말아라 그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나가면서 기도해주십시오 하는 경우에 기도만 해 드리지 않고 제가 거절한 때가 많습니다. 그 집에 안 간 때가 많습니다. 안가면서 뭐라고 했느냐? "다음날 다른 때에 그 집만을 대상으로 심방 계획을 다시 세우십시오." 그랬어요. 
    이것은 우리가 오래 믿은 성도들도 찬송을 크게 했느냐 적게 했느냐, 1시간 있었느냐 10분 있었느냐 따질 만큼 주님이 내 집에 오셔서 나만 생각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데 이제 막 주님을 영접하려는 사람에게 가 가지고 "이제 예수 믿으세요." "예 믿으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기를 원합니다." "되었어 되었어. 내가 바빠서 또 저 집에 또 가야돼." 이런식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 집이 생겼을 때에는 그 집만에 주님의 관심이 있고 이제 나의 일 끝난 것처럼 돌아가서 다른 동네로 차라리 가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주님의 "합당한 집을 찾거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그리고 옮기면서 옮긴다고 하지 말라." 무슨 얘기인지 알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보통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우리 아버지"라고 하라고 그렇게 주님께서 기도도 가르쳐 주셨지만, 보통 하나님을 아주 사모하고 주님을 절실하게 모시기를 원하는 분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우리 주님' 이렇게 잘 안 합니다. "내 주님, 내 아버지여!" 
    그러니까 순전히 뭡니까? 오직 주님과 나만의 관계, 나만의 사이를 갖고싶어하는 이런 심정을 헤아려서 우리 전도자들이 전도할 때에도 그것을 유념하면 좋겠다 라는 것을 말씀을 드릴수가 있겠습니다.

    그 다음에 공통점은 그렇고요. 이것은 기본입니다. 제자도 그러하고 칠십 인도 그러하고 이 공통점은 그렇고, 전문직인 제자와 이제 겨우 처음 나가는 이 칠십 인과의 차이점은 어떤 것이냐? 차이점을 말씀드리면 재미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경험을 가진 경력을 가진 제자들에게는 이런 단속을 안 했는데 칠십 인에게는 어떤 단속을 했느냐 하면 어느 집에 목표 삼고 그 어느 마을 어느 가정에게로 전도하러 갈 때에는 "네가 도중에 노중에 길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과 인사하면서 시시닥거리지 말아라." 그겁니다. 
    내가 전도하려 가는데 가는 도중에 리어카에다 액세서리를 많이 갖다가 주렁주렁 달아놓았는데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 막 사니까 나도 거기 가서 "이것 얼마요? 아이구, 이쁘네. 이것 진짜 같네. 야, 이 진주 진짜보다 더 좋네." 하면서 그것 본다고 한참 "얼마요? 깍으소." 어쩌고저쩌고, 좀 살까 말까 이런 얘기 하다가 저 건너가 보니까 또 엿장사가 품바 품바 하면서 또 엿장사가 엿가위를 두드리고 있으니까 또 거기에 가서 "앗다 거 신나네. 신나네 그 엿 한가락 줘보시오." 하면서 엿치기한다고 '푸…' 이렇게 다 하다가 시간 다 보내고 "아이구 가야지" 해서 그 집에 가게되면 내가 처음 주님의 보냄을 받고, 거룩한 일을 하고,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여기에 정신 다 빼고 저기 정신 다 빼고 그렇게 해 가지고서 막상 상대를 만났을 때 진정으로 능력이 나가겠느냐 그겁니다.

    제자들에게는 단속하지 않고 칠십 인에게는 단속을 하셨는데 저는 제 자신을 가만히 두고 볼 때 여기에 단속 안 받은 제자들 수준은 제가 못되는 것 같아요. 저는 칠십 인 수준 밖에 안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설교를 하기 위해서든지 심방하기 위해서 갈 때에는 가능한 한 제가 운전도 제가 잘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리고 심방을 마치기 전까지는 또 설교를 마치기 전까지는 복잡한 그 라디오 듣지 않습니다. 심지어 좋은 음악도 듣지 않습니다. 제가 거룩한 일 하러 갈 때에는 저를 태워주시는 분이 다 알겠지만 조용하게 그냥 있습니다. 
    그냥 있는 이유가 뭐냐? 떠나기 전에 기도로 준비하고 그 가정에 가서 어떤 말씀을 전해 드려야 되겠다. 주님이 이 말씀을 주님이 할 것을 내 입에 내 목소리 통해서 주신 말씀으로 주신 줄 알고 그것을 다 붙들고 우리식으로 말한다면 용을 쓰고, 그것만을 갖다 그저 딴 데 신경쓰지 말고 탁 갖다 전해드릴 때와 가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차에 탄 사람보고 이 농담 저 농담 다 하고, "너희 집에 어떻느냐? 아이 잘 크느냐? 뭐 어쩌냐? 무슨 싸운 일이 없느냐?" 온갖 얘기 다 하고 그 집에 딱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런 대화를 다 받아주고 그 집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해보니까 벌써 기도가 나갈 때 기름 발라져 나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내 기도를 막 같이 만들어내는 느낌을 못 받습니다. 그러니까 능력이 차이가 난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제 자신이 제자들 수준이 못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주님의 보냄을 받아서 무슨 일을 하러가든지 그 갈 때까지는 딴 생각을 안 합니다. 설교를 한편하기 위해서도 금요일부터는 금요일 오후부터 토요일까지 복잡한 것을 일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말씀이 주어졌으면 그 말씀만 붙잡고 삽니다. 
    그리고 이제 설교를 합니다. 설교 끝나고 다 끝나고 이제 집에 돌아가는 순간 그때처럼 자유 한 때가 없습니다. 제가 설교 끝나고 쭉 나갈 때 보십시오. 제 차에 안테나가 쑥 올라올 겁니다. 안테나가 올라와요. 그것 왜인 줄 압니까? '끝났다 나도 좀 듣자' 해서 이것도 저것도 듣고 집에 들어가면 설교 끝나고 집에 들어가면 미안합니다만 제가 설교 끝나고 집에 가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TV에 어느 것이 재미있나 싶어서 이것 틀고 저것 틀고, 그래서 보는 TV는 재미난 것 코미디라든지 아주 뭐 즐거운 프로그램 이런 것이 좋아요. 
    어떤 때 영화도 보면 날씬한 사람들이 나와서 뽀뽀도 하고, 그런 것 제가 안보는 것 같지만 그런 것 안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더라구요 보니까. 그런데 그것은 언제 하느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주님의 지시한 것을 한번 받은 다음에 그 일 끝날 때까지는 안 받아들인다 그겁니다. 그것이 저희 가족이 알고 저희 주변 사람들이 아는 제 생활입니다. 
    '이것 끝나고 난 다음에 나도 인생을 찾자' 그 순간은 그렇게 이제 나올만큼 하는데 오늘 주님께서 나를 소개하기 위해서 가는 노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정신 팔지 말아라 그겁니다. 그렇게 될 때에는 "전하고자하는 능력이 다 나갈 수 없는 것이니라." 그것이지요.

    전문적이고 경험이 많고 그저 심방 들어가기 직전까지, 설교하기 직전까지, 사회하기 직전까지, 기도순서 맡은 직전까지 집에서까지 막 지지고 볶고 마음대로 하고 와 가지고서 경건하게 기도하는 사람, 멋지게 기도하는 분, 가짜냐? 가짜는 아닙니다. 그렇게 능력있는 사람에게는 단속을 안 했다 그겁니다. 
    그러니까 막 함부로 놀다가도 바로 올라가도 경건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단속 받을 필요가 없지만 이 칠십 인은 복음 전하러 갈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시간 남으면 하고 하지 말라는 겁니다. 
    1주일에 하루를 할지, 1주일에 1시간을 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러 가기 때문에 내가 모시고 가는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줄로 알고 참 딴 데 정신 팔지 않고 오직 그 일만을 위해서 열심히 가게 되면 좋은 결과가 더 있을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칠십 인들이 갔더니 결과가 좋았다 그겁니다.

    그리고 "네가 어느 집을 찾게 되면 이 집도 반대하고 저 집도 반대하다가 합당한 집을 찾게될텐데 그 합당한 집에 들어가기 전에 거절하는 사람이나 거절하는 마을에서는 발에 먼지도 떨어버려라." 그랬어요. 
    그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열심히 예수님 전해드리려고 복 받으라고 해서 갔더니 문을 확 닫아버리면서 "별 사람 다 봤네!" 하면서 막 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패패 소금 뿌려라." 이런 사람들이 있어요. 예수님 전하러 갔는데 "소금 뿌려라 야야. 아이구, 재수 없다." 이렇게 기분 나쁜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구걸하러 갔습니까? 좋은 예수님, 생명을 영원한 천국을 드리기 위해서 주님의 심정으로 갔는데 이렇게 박대하게 될 때에는 나올 때 기분 나쁩니다. 기분이 나쁜데 그 기분 나쁘다고 해서 그 기분 나쁜 기분을 그대로 온몸과 마음과 얼굴에 새겨 가지고서 그 다음에 딴 집에 가서 '톡, 톡' "평안을 빕니다." 그리 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지금까지 앞집 뒷집 참 한 집을 찾아내려면 어쩌다 걸려드는데 그 걸려드는 집에 갈 때에는 전에 있었던 것은 발의 먼지라도 다 떨어버려라 그겁니다. 거기에 기분 나쁜 것 거기에 복잡했던 생각을 다 지고 막 얼굴과 마음에 상처를 입고 기분이 나빠 가지고 막상 주님을 받아들이려는 집에 가 가지고서는 "이 집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음…, 씩… 씩…" "아니, 선생님 왜 그리 식식거립니까?" "에이, 에이…." 
    그렇게되면 거룩하시고 온유하신 주님은 아무리 좋은 뜻으로 갔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온유하고 깨끗하지 아니하면 나타날 수가 없어요. 그것을 아셔야 되요. 성령님은 거룩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마음만 굳고 형편만 틀림없으면 조건이 어떻든지 나타내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앞집에 있었던 것은 동네를 떠나 나오면서 다른 집에 가기 전에 발에 먼지까지도 다 떨어버리고 나와서 그 집에 들어갈 때 순전한 사랑을 베푸시려는 주님의 마음으로 들어가야지, 그래야 주님의 미소가 얼굴에 가득하고 주님의 사랑스러운 그 감정이 온 몸에 가득 차서 얼굴에 나타나야 될텐데, 그냥 앞집에서 충격 받은 충격을 얼굴에 담아 가지고 씩씩거리고 들어가면 안 된다 그겁니다. 발의 먼지를 떨어버려라 그겁니다.

    그 집에 들어갈 때에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참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다른 사람과의 만났던 여러 가지 신경을 쓰지 않고 가야될 수밖에 없는 것이 10장 5절 이하에 살펴보면 4절은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찌어다 하라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너희 빈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눅10:4下-7上) 이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만일 이 평안을 안 받으려는 사람이 있으면'이 아닙니다. 이것 잘 아셔야 됩니다. '만일 이 좋은 복을 안 받으려는 사람이 있으면'이 아니다 그 말이에요. "만일 이 평안을 받아들일 사람이 있으면…"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온 동네를 이 잡든지 샅샅이 집집마다 방문해서 주님을 소개해 드려도 주님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대부분이라는 뜻입니까? 가뭄에 콩나듯 어쩌다가 하나 나는 겁니까? 어쩌다가 하나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우리들이 생각해보면 예수님 안 받아들이겠다는 사람이 '만일' 이겠는데, 실상 현장에 가보면 받아들일 사람이 만일 하나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루종일 1주일 내내 다녀도 하나도 안 나올 수가 있다 그겁니다. 실망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하나 나올 수 있다는 겁니다. 어쩌다가 하나 나올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전도할 때 어쩌다가 한집을 만나는 그 한 집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 앞에 전부 신경 쓰이고 기분 나쁠 일들만 우리에게 주어질텐데, 그 기분 나쁜 나쁨을 가지고 주님을 영접할 집에 그 얼굴 그 심정 가지고 들어가지 말고 마음 정돈하고 가라 그겁니다.

    저는 목사로 생활을 하면서도 제 가족과 혹 다툴 때 있을 때 마침 가정에 방문했을 때에는 "죄송합니다. 내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이지만 우리 가족하고 한바탕 한지가 5분이 지나지 않습니다. 좀 돌아가 주셨다가 내가 전화 드리면 오십시오." 한 경우 많습니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목사는 집에서 싸움도 안 하는 것처럼 점잔하게 이렇게 불러들이지만 속이 벌써 부글부글 끓고 있으면 어떻게 진실한 주님이 나타나겠느냐는 그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귀신만 붙어갈 뿐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것을 참 주의하라 했고 그리고 전문적으로 일하는 제자들에게는 "그 집에 평안을 빌라. 그들이 받지 아니하면 뭐 발에 먼지는 떨라."고 했지만 제자들에게 안한 얘기를 칠십 인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그 집이 받지 아니하면 네 빈 평안이 너에게로 돌아오리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저처럼 전문적으로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평안이 내게 돌아오든지 말든지 일 해야 되지만, 칠십 인처럼 나가서 일하는 분들은 결실이 없어도 평안을 빌어준 만큼은 땅에 떨어져 그 입에 담아져서 소리로 된 말씀은 땅에 떨어져 썩는 법이 없고 주의 이름으로 나간 복의 말씀은 그가 안 받으면 여러분에게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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