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마음(눅 15:1-7)
  • 조회 수: 83, 2013.08.28 17:12:23
  • 자녀를 하나나 둘을 가진 사람들은 자식이 많이 있으면 자식의 귀중함을 모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종종 우리 김상효 집사님과 양정미 집사님이 5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시나 유심히 지켜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저가 발견하는 것은 이 두 분 집사님께서는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귀하게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식이 많으면 자식 귀중함을 모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열 손가락 중 어느 하나를 깨물어도 안 아픈 것이 없듯이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부모의 눈에는 다 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이 많더라도 그 중 누구를 잃으면 슬퍼하며 괴로워 하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저녁, 저는 텔레비전에서 현대판 노예에 대해 방영한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다큐멘타라리로 제작된 이 프로그램은 현재 인도 및 아프리카에서 공공연히 자행하고 있는 노예에 대한 실정을 적나라하게 폭로를 하였습니다. 이 방송 중에 어린 아들이 갑자기 실종되어 애타게 찾는 한 인도인 부부가 나왔습니다. 대부분의 인도 사람들이 그렇듯이 이 부부도 여러 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 하나가 없어지자 이들은 매우 괴로워하며 슬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아들이 하루 속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 부부의 모습을 보며 어떤 부모라도 할지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똑 같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부부는 아들이 누구엔가 잡혀 가서, 어디선가 노예가 되어 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제인가는 그 아들이 그 노예 생활에서 도망쳐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수년 전 괌도에서 일어난 KAL 여객기 추락 사고를 여러분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사고의 원인이 정확하게 조사되지 않아서 아직도 왜 추락을 했는지 잘 알 수 없는 사고입니다. 이 사고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정치인 한 분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분의 이름은 신기하 의원입니다. 그런데 이 비보를 들은 신기하 의원의 노모에 관한 애처로운 기사가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와 한 동안 장안의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늙은 어머니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도 괴로워서 그 날부터 전혀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노모는 죽은 아들을 생각하면서 지내다가 결국 50일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어머니의 슬하에는 아들과 딸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난 손자와 손녀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아들 하나가 죽었다고 해서 외로움에 사무쳐 살지 못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또 생명을 버릴 만큼 슬퍼할 이유도 없어 보였습니다. 물론 아들이 비명에 갔으니 슬프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보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곡기를 끊고 죽는다는 것은 너무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어머니에게는 죽은 아들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다른 자식보다 더 귀해서가 아닙니다.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즉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어머니에게 가장 큰 기쁨이 있다면 아마 죽은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도 그 뒤를 따른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을 둔 부모님들은 이 노모의 심정을 충분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차라리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고 자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노예로 잡혀가 아들을 잃어버린 인도에 있는 부모의 경우나, 비행기 추락 사고로 아들을 잃어버린 이 노모의 경우를 보면서 저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도 부모나 신기하 의원의 어머니나 잃어버린 아들 외에도 다른 자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독 그 아들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은 가지고 있었던 것은 그 아들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을 마치 잃어버린 자식과 같이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신기하 의원의 어머니처럼 고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 물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있을까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마음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어지기가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사실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 더 많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 더 많은 마음을 갖고 계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교회 밖에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쏠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얻은 사람이지만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잃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잃은 사람들로 보시고 다시 찾으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잃어버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세 가지 비유를 들면서 연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첫째 비유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두 번째 비유는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비유는 “탕자의 비유”입니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는 잃어버린 측에서 찾는 비유입니다. 이에 반하여 “탕자의 비유”는 잃어버린 측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잃어버린 자를 찾으며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심경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본문은 세 비유 중 제일 먼저 나오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 당시 배경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주로 목축업을 하고 삽니다. 그 중에서도 양을 많이 키웁니다. 양을 치는 목자는 아침 일찍 양들을 우리 안에서 끌어 내어 풀 밭에 내 놓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풀을 뜯게 합니다. 이스라엘은 영국과 달라 목초지가 아주 귀합니다. 그래서 한 장소에서 풀을 다 뜯어 먹으면 다른 장소를 찾아 떠납니다. 또 양들이 물을 마실 수 있도록 시내가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다가 해가 지어 가면 양들을 몰고 우리로 돌아옵니다.

    오늘날 목축을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당시 목자는 양에 대해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마치 자기 자식과 같이 여겼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각각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의 이름을 부르면 그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 듣고 목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부르면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알며(요10:14)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양들도 내 음성을 알아 듣는다(요10:16)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목자는 좋은 풀 밭을 발견하고 양들로 하여금 싫컨 풀을 뜯어 먹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양들을 지켜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양이 그 양 같아서 어떤 것이 어떤 것인지 잘 분간을 할 수 없습니다만 목자는 한 눈에 금방 식별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양들을 차근, 차근 살펴 보았지만 한 마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십중팔구 가시덤불에 걸렸거나 구덩이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늑대나 다른 야생 동물에게 잡혀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이란 동물은 참으로 둔하고 미련한 동물입니다. 양은 시력이 나빠서 1미터 밖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가 앞서 가며 인도하지 않으면 구덩이에 빠지거나 아무 데로나 갑니다. 이빨도 짧고 날카롭지 못합니다. 천상 풀이나 뜯어 먹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 몸이 날쌔지 못합니다. 그래서 늑대 같은 동물이 오면 도망하지 못하고 금방 잡혀 먹습니다. 그래서 목자가 항상 옆에서 지키며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만일 늑대가 오면 목자는 물매질을 하여 늑대를 쫓아 버립니다. 어쩌다가 가까이 달려들면 가지고 있던 지팡이로 때려 쫓아 버립니다. 그리고 양은 몸에 털이 많아 나무나 가시덤불에 쉽게 걸립니다. 양은 정신 없이 풀을 뜯어 먹다가 나무 가지 사이나 가시덤불 속으로 가끔 들어갑니다. 그러다가 털이 나무 가지나 덤불에 걸리게 되면 빠져 나오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하루에도 수시로 양의 숫자를 세어보고 다 무사히 있는지 확인을 합니다.

    한 마리가 없어진 것을 확인한 목자는 나머지 99마리 양들은 들에 그냥 내 버려 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때부터 목자의 마음은 99마리의 양에 있지 않았습니다. 온통 잃어버린 한 마리에게 있었습니다. 혼자 떨어져서 벌벌 떨며 울고 있을 양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양을 찾아야 했습니다. 목자는 오늘 다녔던 길을 기억 속에서 더듬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양돌아, 양돌아” 양의 이름을 부르는 목자의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졌습니다. 들을 넘고 시내를 건넜습니다. 양을 찾을 수 없자 목자는 목이 터져라 불러댔습니다.

    이 때 목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알아 듣고 멀리서 “음메에. 음메에”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목자는 그 소리를 향하여 달렸습니다. 저기에 가시덤불에 걸려 나오지 못하고 있는 양이 보였습니다. 목자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가까이 가서 끄집어 냈습니다.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치다가 난 상처의 피를 닦아 주고 올리브 기름을 발라주었습니다. 목자는 너무도 좋아서 양을 번쩍 들어 어깨에 매었습니다. 그리고 휘파람을 불며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다리가 아프고 피곤하다는 생각은 잊을 채 친구들을 불렀습니다. “야! 찾았다. 찾았어. 내가 오늘 양 한 마리를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가시덤불에 걸려 있는 것을 찾았지 않아. 야! 오늘은 너무도 기분이 좋고 기쁜 날이다. 우리 한번 신나게 놀아 보자구나.”

    여러분! 이 목자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목자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조금은 짐작을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잃었던 자식을 다시 찾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 목자의 심정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을 찾은 목자의 심정처럼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안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뻐하시는데 저 수많은 영혼들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말씀을 들으려 예수님께 가까이 나왔습니다. ‘세리와 죄인’은 유대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항상 멸시와 조롱을 받아왔습니다. 세리는 세금 징수원입니다. 이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서 일정한 액수는 로마 정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가졌습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많이 거둘수록 세리는 돈을 더 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리들은 악착같이 세금을 거두어 들었습니다. 이런 세리를 유대인들은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로 취급을 했습니다. 한편 ‘죄인들’이란 창녀들을 가리킵니다. 몸을 파는 창녀이니 유대인들이 어떤 눈으로 보았겠습니까? 옛날이나 지금이나 창녀는 사람들 눈에 죄인으로 보여질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면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규범에 따라 소위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죄인을 멀리 하여야만 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저기에서 세리나 창기가 서 있는 것을 보면 눈을 가리고 다른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온지도 잘 알 수 없는 이 예수라는 사람은 죄인들을 가까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말씀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음식도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 있어서 죄인과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친밀한 교제를 뜻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고 좋다고 같이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들은 심기가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해 원망을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2절). 예수님을 가리켜 ‘이 사람’이라고 한 것은 경멸적인 말투입니다.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4절). 이 말씀은 이런 뜻이 됩니다. “목자가 양을 치다가 양을 잃으면 나머지 양을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으려고 다니지 않겠느냐?” 즉 잃은 양을 찾아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보기에는 잃어버린 양에 해당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목자인 내가 찾는 것이 어찌 잘못된 일이냐?”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부터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이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은 제 멋대로 살다가 결국 죄로 인해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의 모습을 입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통하여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사람들을 찾게 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정말로 인간을 만들어야 할지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합니다. 공의의 천사가 먼저 의견을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만드는 것을 반대합니다. 인간을 만드시면 온갖 불의와 죄악을 저지를 것입니다. 진리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저도 반대입니다. 그들은 서로 속이면 살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까지도 속일 것입니다.” 거룩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만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다고 해도 인간은 죄로 인해 더러워질 것입니다.” 이 때 사랑의 천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 인간을 만드십시오. 아무리 불의와 죄악과 거짓을 일삼는다고 해도 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인도해 오겠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도록 하겠습니다.” 이 천사의 말을 듣고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사랑을 베풀어 죄인들을 돌아 오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또 찾은 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5절). 목자가 양을 찾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또 많은 수고와 노력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을 찾은 기쁨은 피곤을 잊게 하였습니다. “양을 어깨에 메었다”는 것은 우리가 가끔 성화에서 보는 장면을 연상하게 합니다. 양쪽 어깨에 양을 둘러 매고 한 손으로는 양의 앞 다리를,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양의 뒷다리를 잡고 있는 목자의 그림입니다. 이런 목자의 모습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6).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목자는 그 기쁨을 자기 혼자만 누릴 수 없었습니다. 그 기쁨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아주 기쁜 일이 생기면 혼자만 기뻐하지 못합니다. 너무 좋고 기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누기를 바랍니다. 목자의 심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와 이웃을 불렀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이것은 친구와 이웃에게 “우리 서로 함께 이 기쁨을 나누며 교제하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보면 목자가 얼마나 양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올 때 하나님 한 분의 기쁨 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늘 나라 전체가 기뻐하는 일이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절을 또 보십시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의 의미가 명확해졌습니다.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왜 세리와 죄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음식을 먹으며 교제하는지 이유와 목적을 몰라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여 다시 하나님의 품으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인가 하면 이미 구원을 얻은 의인 99명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그것은 첫째, 사람의 영혼이 온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8장 36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8:36)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영혼의 가치를 온 천하 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시고 계십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나를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 여기고 계시는지 알게 됩니다. 둘째로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죽을 만큼 귀하게 때문입니다(롬14:15). 어떤 신학자는 말합니다. “만일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것이다” 그렇습니다. 나의 영혼이 이렇게 귀중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한 영혼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 믿어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안 해본 사람이라면 좀 이상합니다. 우리 자식들도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하는데 어떻게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해 주신 영적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려는 생각을 안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해 봅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교회에서 봉사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까? 구제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까? 기도를 많이 하면 기뻐하실까? 금식을 하면 기뻐하실까? 정성을 다해 예배를 드리면 기뻐하실까?”

     

    예, 하나님은 이런 것들도 다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더욱 기뻐하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인도에 있는 부모가 실종되었던 아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이 그 부모에게는 가장 기쁜 일이 듯이, 또 신기하 의원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 그 노모에게는 가장 기쁜 일이 듯이, 우리 하나님에게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 오는 것이 가장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죄인이 돌아오겠습니까? 예, 간단합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죄인이 그것을 듣고 하나님께 나올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전도하는 일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전도하는 사람을 제일 기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헌금을 많이 해도 기뻐하십니다. 봉사를 많이 해도 기뻐하십니다. 구제를 많이 해도 기뻐하십니다. 기도를 많이 해도 기뻐하십니다. 금식을 해도 기뻐하십니다. 예배를 정성껏 드려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더 기뻐하십니다. 이것만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전도가 하나님이 이렇게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한다면 어찌 전도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는 전도와 선교가 최고입니다. 다른 것들도 다 중요하지만 이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을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나 개인이 이 일을 제쳐놓고 다른 일을 우선한다면 그만큼 하나님은 섭섭해 하고 계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전도해야지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전도하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혼을 구원 시키는 방법입니다.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 오늘 예배 드리러 나오신 분들께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어느 날 꿈 속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예수를 믿으라고 지시하셨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교회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모태 신앙이라고 하는 분들도 잘 생각해 보면 스스로 믿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부모가 먼저 믿었기 때문에 부모에 의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떤 분은 누가 특별히 전도를 해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잘 생각해 보면 반드시 누가 전도를 해서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이었던지, 여러 사람이었던지, 또는 신앙 생활을 잘 하는 사람을 보고서던지, 누군가에 의해 교회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만나던지 못 만나던지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전도를 못하게 합니다. “네가 무슨 전도냐? 네 행동이나 먼저 바르게 한 다음 해라.” 또는 “네가 전도한다고 저 사람이 예수를 믿을 것 같으냐?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마라.” 그렇지 않으면 “저 사람은 아무리 얘기해도 들을 사람이 아냐. 그러니 포기해, 포기.” 여러분들은 이런 경우를 당해 보지 않았습니까? 전도하려고 잔뜩 마음을 먹었더니 마음 속에서 마귀가 이렇게 속삭이지 않았습니까?

    마귀가 전도를 못하게 하는 기가 막힌 술책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듣지만 못하게 하면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열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입만 살았습니다. 그들은 아마 죽어도 입은 둥둥 뜰 것입니다. 입으로 복음을 전하기 앞서 삶으로, 행동으로 본을 보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전도가 아닙니까?”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겨우 전도하려고 하였던 마음에 찬 물이 끼얹는 말입니다.

    이 말이 맞는 말입니까? 틀린 말입니까?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이 주장이 전도를 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궤계입니다. 이 말을 듣고 움추려들지 않는 신자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인 저도 이 말을 들으면 내 삶과 행동을 되돌아 보고는 주저 앉고 싶습니다. “그래, 나 같은 것이 어떻게 남을 보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이냐? 먼저 진실되게 살아 나의 삶과 행동으로 본을 보이며 전도해야 되지.” 여기에 생각이 이르게 되면 마귀의 술책에 넘어간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내가 내 삶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겠습니까?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아마도 생전에 이런 일은 거의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내 삶과 행동 때문에 낙심하거나 실망하면 하지, 그것 때문에 예수 믿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소위 문화인의 전도요, 지성인의 전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아닙니다. 인본주인적인 생각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영혼을 회심 시키는 것은 나의 삶이나 행동의 본이 아니라 나의 입술을 통해 나오는 복음입니다. 내 입으로 전한 그 말씀이 잃어버렸던 영혼을 하나님께 돌이키게 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이 행동으로 전도했습니까? 말로 전도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삶을 보고 믿은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90% 이상은 다 입을 통한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교회를 통해서, 예수 믿는 나를 통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기 원하십니다. 그 양을 찾는 방법은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미련하게 여기는 전도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구원하십니다(고전2:21). 그러므로 전도하는 것은 첫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둘째, 버림 받은 영혼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고, 셋째,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를 해야 합니다. 꼭 내 교회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 전도하려고 하지 마시고 그 영혼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십시오.

    영국 상황은 특수하기 때문에 한국만큼 전도할 대상을 찾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적당한 핑계가 될까요? 만일 전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 그렇게 이유를 댄다면 “그러면 너는 전도할 대상을 보내 달라고 나한데 기도해 본 적이 있느냐?”라고 하나님은 물으실 것입니다. 아무도 상황과 현실 때문에 전도하지 못한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내가 전도할 마음이 있으면 전도할 사람이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지 않은 것은 다 나에게 책임이 있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게을러서, 열심이 없어서, 영혼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에 관심이 없어서 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한 번 못해 보겠습니까? 이렇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일이라면 한 번 안 해 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나는 안하겠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는 못하겠다”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영적 불효 자식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만 믿고 천국 가겠다는 지독한 이기주의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들으실까요? 이런 사람의 예배를 받으실까요? 이런 사람의 장래를 축복해 주실까요? 이런 사람의 가정을 평안하게 해 주실까요? 저의 대답은 “No, Never”입니다. 여러분들이라면 하시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가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전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전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업체, 전도하는 교회를 하나님이 그냥 두시겠습니까? 전도를 더욱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쪼록 전도를 열심히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큰 복을 받은 성도님들과 킹스크로스 교회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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