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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신명기 33:29/ 행복을 찾아서 [주일낮]
  • 조회 수: 425, 2013.08.31 16:30:38
  • 오늘은 “행복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한 심리학자가 행복과 건강에 대한 오랜 연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람이 행복할 때 눈도 잘 보이고 입맛도 좋고 냄새도 잘 맡고 촉각과 판단력도 더 정확해진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또 다른 연구는 행복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기억력이 크게 발달하고 마음에 평정을 갖게 되지만 행복하지 못하면 기억력도 희미해지고 마음에 불안하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험과 연구는 성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살고 건강하고 멋진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나는 성공하기 때문에 행복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 성공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환경적인 성공과 관계가 그렇게 밀접하지가 않습니다.


    성경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마음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했습니다. 오늘날 치료하지 못하는 많은 병들이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다가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사회에서나 직장에서나 집에 들어오나 어디 가 봐도 스트레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마음에 억압을 당하고 그것이 육신의 병으로 드러나서 약을 먹고 수술을 해도 낫지 않는 병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주도하신 창조의 윈리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나는 운명적으로 불행하구나. 팔자가 불행하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는 우리가 그렇게 지음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는 성경 말씀에 보니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고 빛이 있으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런데 둘째 날에는 궁창이 생겨나라 하시고 궁창이 생겨났는데 좋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가요? 그것은 장차 마귀가 타락해서 공중에 권세 잡은 자의 아지트가 될 것이기 때문에, 공중에 마귀가 진을 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공중 즉, 궁창을 지어 놓으시고 난 다음에는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외에는 셋째 날,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모두 다 좋았다고 말씀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니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 항상 좋은 일이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은 좋은 일을 이루시고, 그러므로 하나님과 같이 계시면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을 기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 행복을 잃어버렸습니까? 저는 이것이 바로 주권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권자로 삼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을 행복자라 그랬어요.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행복하냐....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전쟁에서 구원해주시는데 이스라엘은 칼과 방패를 잡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들의 방패와 칼이 되시기 때문에.... 방패와 칼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다 자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행복자다.....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향해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면 이스라엘은 행복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 주권자는 하나님 밖에 없는 줄 믿습니다. 주권자가 둘 이상 여럿이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가정에도 주권자가 둘이 생기면 문제가 있어요. 요사이 남편이나 아내가 서로 주권 다툼을 해서 가정이 복잡합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그래야 가정이 평안하니까. 아내가 남편과 똑 같이 주권행사를 하면 집안이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선악과는 좋다 나쁘다를 결정하는 과실 아닙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좋다 나쁘다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면 그들 스스로가 주권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 하는데 아담은 안 좋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안 좋다고 하는 것을 아담은 좋다고 말할 수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똑같이 동등하게 선악을 판단하면 하나님과 주권다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정면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자기는 다 잘 하고 다른 사람은 다 못한다.... 이런 점에서 문제가 생겨요. 당장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담은 하와를 원망하고 하와는 뱀을 탓하고 가정불화가 생겼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아담과 하와가 정이 깊었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죽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담이 너 죽으면 나도 같이 죽자. 그리고 하와가 주는 선악과를 받아먹었습니다. 그와 같이 아담은 하와를 깊이 사랑하고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고 난 다음 죄가 들어오자 아담 마음이 싹 달라졌습니다. 아담은 하와를 탓하고 하와는 뱀을 탓하고.... 그 행복한 가정이 불평과 원망으로 꽉 들어찬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을 그냥 보고 있겠습니까? 왜 당신이 선악과를 먹고선 하나님 앞에서 내 핑개를 되느냐... 이렇게 부부가 서로 싸우지 않겠습니까? 하와에겐 평생 상처로 남으면서 두고두고 싸우지 않겠습니까? 싸우는 부부는 꼭 싸우는 자식을 만들어요. 가인이 시기심으로 그 동생 아벨을 죽입니다. 부부 간에 서로 불화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는 중에 자식들이 또 서로 싸워서 피를 흘리는 살인의 고통을 가져오니 아담과 하와의 가정이 얼마나 비극인 것입니까? 아담의 이러한 불행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감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 때는 행복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잃자 모든 불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아담과 하와의 모습이며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잃어버린 행복을 찾기 위하여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에게 주권을 돌려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의 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재산 절반을 가지고 집에서 나가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으나 얼마 못가서 비참한 노예가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 먹고 싶어 침을 삼켜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품을 그리워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도 나와 같이 비참한 신세가 되지는 않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서 죽는구나...” 차라리 죽을 땐 죽더라도 아버지 집에 가서 죽자.... 이런 체면불구의 회개 가운데서 아버지의 품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탕자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 탕자는 하나님을 떠나 불행에 빠진 인간이며,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으로 비유된 것으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의 품속으로 들어가야 다시금 잃어버린 행복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처음 아담은 사람에게 불행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둘째 아담으로서 인간의 총체적인 절망을 대속하고 행복을 되돌려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모든 부정적인 것, 죄, 더러움, 질병, 저주, 절망, 탄식, 죽음, 고통, 총체적인 모든 불행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다 걸머지고 몸 찢고 피 흘려서 고통당하시고 난 다음.... ‘내가 다 이루었다’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가 10%만 이루었다, 내가 삼분의 일만 이루었다’가 아니라 ‘다 이루었다!! 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저주의 고통은 예수님이 이미 다 청산한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하셨듯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올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담대하게 주님께 구하고 의지하면 주님께서 능력으로 우리를 좌와 저주에서 건져서 행복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1절로 32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이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확실한 은혜가 아닙니까? 그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너무 우리 환경에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못하고, 안 되고, 죽는 것, 절망인 것, 낭패하고 실망한 것, 벌거벗은 자기의 환경을 바라보고 원망,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환경보다 더 크신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잊지 마십시오. 천지와 만물을 지으시고 태산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 앞에 여러분과 나를 이끌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있으므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맡기십시오. 마음도 몸도 생활도 맡기고 의지하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성하든지 망하든지 패하든지 주여 주님을 따라갑니다. 맡기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제인 애덤스는 상원의원이던 부친의 슬하에서 유복한 생활을 했습니다만 후천성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되고 맙니다. 돈도 많고 교육도 잘 받고 부모도 좋고... 그런데 장애인이 되고 나니까 자기의 이런 환경이 별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대학을 공부하고 난 뒤 스스로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잊기 위하여 그 당시로서는 참 어려운 유럽여행을 하게 됩니다. 지금과는 달리 그 때에는 교통수단도 마땅치 않고 배를 타고 다녀야 하는데 장애인으로 이런 여행을 하기는 어려운 것이죠. 그래도 마치 자기를 혹사시키듯이 그렇게 여행을 고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럽에 가서 아주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 사는 판자촌 같은 곳을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 자원 봉사하는 사람들을 보니 얼굴에 그렇게 빛이 나거든요. 저 사람들은 나처럼 공부도 못하고 나처럼 행복한 가정도 없고 돈도 없는데 왜 저렇게 얼굴에 빛이 나나? 가만히 보니까 찬송을 부르면서 너무너무 기쁘게 빈민들을 섬기고 봉사하는 겁니다. 그들이 구세군들이었어요. 그래서 이 분도 그들 틈에 끼여서 찬송하고, 빈민들을 섬기기 시작했어요. 그 가운데 인생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면서 미국으로 부랴부랴 돌아와서 자기 재산을 정리하여 더 적극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1889년 시카고에 빈민 복지 기관인 헐 하우스(Hull House)를 세우고, 미국 내에 200만 명에 달하는 아동 노동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백악관 아동회의를 창설했습니다. 그 결과 1931년, 제인 애덤스는 소아마비에 곱사등이면서 미국 여성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합니다. “아무리 좋은 명문 가정, 많은 재산이라도 소아마비에 곰사등인 나의 외모를 볼 때 절망하고 불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사랑의 품에 안기면서 위안을 얻었고 지금은 모든 재산을 다 나누어주고 빈털터리가 되고 여전히 소아마비에 곱사등인 나의 모습을 보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예수님 떠나서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큰 사랑에 의해서 행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지음을 받았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모든 불행은 죄가 세상에 들어와서 오만과 교만, 욕심과 탐심이 우리 생애를 망쳐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퍼부어 주었습니다. 찬송 293장에 이런 신앙고백이 있어요. ♬ 주의 사랑 비칠 때에 기쁨 오네 근심 걱정 물러가고 기쁨 오네 기도하게 하시며 희미한 것 물리쳐 주의 사랑 비칠 때 기쁨 오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충만하게 비칠 때에 찬송하네 그 큰 사랑 내 맘 속에 화평함과 기쁨 주네 그 큰 사랑 ♬


    우리의 인생 삶에도 주의 사랑 비쳐서 근심걱정 다 물러가고, 의심의 구름 다 사라지고 기쁨 평화 가득 찬 행복한 인생 다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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