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로마서 8:18/ 대나무 신앙 [주일낮]
  • 조회 수: 884, 2013.09.21 17:31:24
  • 대나무는 아무리 키가 커도 그 모양이 가늘며, 속이 비어 있습니다. 다른 나무가 그와 같으면 높이를 지탱하지 못하고 바람에 휘어진다든지 쉽게 부러질 것입니다. 대나무의 크기가 높은 것은 무려 40m나 된다고 하네요. 그런데 왜 대나무는 부러지지 않고 그렇게 곧게 하늘 높이 솟아오를까요? 그 비결은 대나무의 마디에 있습니다. 중간 중간에 튼튼한 마디가 그 큰 키를 지탱해주는 힘이 됩니다. 그리고 대나무는 마디에 성장판이 있어서 마디를 통해 성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나무의 마디마디는 질병, 고난, 아픔을 통해 성장하는 인생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고난은 마디가 생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니 고난을 잘 극복하면 우리도 대나무와 같이 쑥쑥 자랄 뿐 아니라 부러지지 않는 튼튼한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대나무 신앙이라고 정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14 서신서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면서 돋보이는 서신은 옥중서신들입니다. 특별히 빌립보서신 같은 사도바울의 편지는 언제나 읽는 성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어떻게 감옥에서도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할까... 하는 감동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가 믿는 기독교가 위대한 것은 “십자가”를 수치의 상징으로 여기지 않고, 승리와 사랑의 상징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셨고, 죄와 죽음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기독교가 부활의 종교인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하면서 “핍박하는 사람”에서 “핍박받는 사람”으로 바뀌었지만 그의 삶에는 이전보다 더 놀라운 신앙의 열정이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을 상상하며 묵상해 봅시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런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금 많은 고난 가운데 있지만 이러한 고난들은 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로마서를 쓰기 전에 많은 고난을 받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으로 살려면 고난이 따릅니다. 세상 이치도 그렇지 않습니까? 적당히 살면 문제를 피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올바르게 살려면, 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려면 힘들지요. 세상 이치도 그런데 하물며 신앙의 길이라는 게 얼마나 마귀가 역사합니까? 신앙대로 사는 것이 그저 고난의 연속인 것 같아요. 그러나 그 고난은 영광을 이루는 고난이기에 우리가 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마땅한 고난보다는 억울한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아니 오히려 의인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많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해 살아간다면 겪지 않아도 될 고난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많은 고난들이 있습니다. 사명은 우리에게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거룩한 부담을 져야 하고 그 거룩한 부담은 많은 경우 고난이 뒤따릅니다. 사람들이 화가 나서 한 마디를 합니다. ‘더러워서 못해 먹겠다...’ 이것은 사명자의 할 소리는 아닌 거죠. 사명자가 되었으니 어떤 소리를 들어도, 어떤 고난이 와도 내가 감내하며 이 사명을 이루겠다.... 이게 사명자의 자세인 것입니다.


    사명자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지금 당하는 고난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감당한 이후에 나타날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장차 드러나게 될 영광”을 생각하면 지금 당하는 고통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사역을 보면 한 번도 고난이 그를 떠나간 적이 없습니다. 그가 소명을 받은 이후에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시온의 대로”가 활짝 열린 것이 아니라 가는 곳마다 막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만, 그의 ‘사도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이 그를 배척했습니다. 그의 마음은 뜨거웠으나 환경은 차가웠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할 때, 믿고 변화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죽이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참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고 싶었던 곳에도 하나님은 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복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계속 그를 감옥에 가둬두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때를 지나며 실족하지 않고 소망 가운데 인내하며 견뎌냈습니다. 로마서 5장 3-4절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말씀에서 소망은 환난, 연단, 인내라는 말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봅니다. 사실... 걱정할 일이 없는데 소망이 있겠습니까? 소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영광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소망은 믿음의 경험을 통해 더욱 견고해집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 알고 즐겨 부르는 찬양 가운데 이런 가사가 있죠. “하나님 한 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하신 주...”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참 멋진 말씀입니다. 영광은 장차 받는 것이지 지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속담에 “누군가 침을 뱉어도 닦지 말라, 조금 있으면 마른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편 126편 5-6절의 말씀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사실 사도 바울의 주옥같은 믿음의 고백들은 대부분 감옥에서 쓰인 것들입니다. 감옥은 사방이 막힌 곳이고, 감옥은 자신의 능력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포기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믿음이 증명됩니다. 감옥에서 기적을 체험합니다. 몸은 감옥에 있으나, 감옥 너머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욥을 가리켜 왜 우리가 ‘의인’이라고 합니까? 욥은 사람이 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난 가운데서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가 얻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욥기 23장 10절에...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고난을 겪지 않는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긴 것이 위대합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고백이 빛나는 것은 로마서 8장 26-28절과 연관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디모데 후서 4장 7-8절을 보세요.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이 그의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을 회고하면서 보니까, 한 번만 싸움을 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싸우며 달려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D-day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 D-day라는 말이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나온 말이라고 합니다. Decision Day... 결전의 날.... 이 결전의 날에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거센 독일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V-day... 즉 Victory Day를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불림을 받은 순간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이제 D-day를 통해 V-Day를 향해 기꺼이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이며 사도 바울의 위대함은 그가 영광의 날을 바라보며 끝까지 싸우며 나갔다는 것입니다. 달려갈 길을 다 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이 영광 앞에 서는 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고 그 길을 가는 한, ‘고난’이 ‘영광’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의 힘과 능력이 무엇입니까? 영광을 바라보며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과 아픔이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캄캄한 감옥 속에서 부르는 찬양이 빛나고, 절망 가운데서 의지하는 믿음이 확고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난 속에서 멀리 바라보는 영광. 그것이 힘이고 능력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대나무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가늘고, 속이 빈 상태에서 대나무가 어떻게 40m까지 하늘을 치솟아 휘어지지도 않고, 부러지지도 않은 채 수년, 아니 수 십 년을 서 있을 수 있는가요? 그것은 대나무의 마디에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마디마디는 대나무가 가진 고통의 역사요, 아픔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런 아픔과 시련을 상징하는 수많은 마디가 모여서 대나무를 이루고 그 모진 바람에도 부러지지 않고, 휘어지지 않은 채 그 우아한 자태를 수 십 년 뽐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련이 올 때마다 그 자체가 우리의 인생을 지탱해 줄 수 있는 튼튼한 마디가 되도록 더욱 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겨나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3593
2068 주일낮 846
2067 주일낮 123
2066 주일낮 887
주일낮 884
2064 주일낮 145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