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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기 이스라엘 성전 성가대의 모습(역대상 25:1-8) [새벽]
  • 조회 수: 492, 2013.09.28 12:10:15
  • 영국의 시인 에드워드 영은 “찬양은 기도보다 거룩하다. 기도는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나 찬양은 이미 그곳에 가 있다”고 찬양의 중요성을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찬양은 성도의 마땅히 해야 할 바임과 동시에 놀라운 능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 신학자 토마스 찰머스는 찬양을 “영생을 위한 가장 실질적인 준비”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은 시온 찬양대 헌신예배로 드리는데 이 시간을 통하여 성전중심의 신앙에 찬양이 얼마나 무겁게 다루어지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토를 크게 확장시키고 백성들로 태평성대를 이루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통치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의 말년에 꼭 이루고 싶었던 것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백성들이 예배중심의 삶을 통해 "하나님 중심" "신앙중심"의 삶을 살아 계속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전쟁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렸기에 하나님께서 성전 짓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셨지만, 그 아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재료를 완벽하게 갖추어 주었습니다.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모든 방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불러 모아놓고, 새로 지어질 성전에서 봉사하고 ,제사장들을 도울 30세 이상의 레위 인들의 인원을 점검하게 하고, 그들이 성전을 봉사하는데 그 책임을 체계적으로 분담시킴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여, 그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 중심" "신앙중심"으로 살아가도록 레위인의 체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 때 30세 이상의 레위인의 수가 모두 38,000명이었고, 이중에 24,000명은 성전의 일을 보살피는 일을 맡겼으며, 6,000명은 관원(행정)과 재판관으로, 4,000명은 문지기, 4,000명은 여호와께 찬양하는 일을 맡기고 이들을 24반차(반열, 조)로 나누어 1년에 2개월씩 봉사하게 했습니다. 성전예배가 잘 이루어 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평안히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가 바르게 되어질 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축복 속에서 평안해 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예배를 위해 존재하니까요!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제사 드릴 때 찬양할 12명씩 24개조의 288명의  찬양단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레위 인중 성전에서 찬양으로 봉사할 인원은 모두 4000명이지만 이들이 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288명을 또다시 뽑았다고 하는 사실에서 찬양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합니다. 이들을 선정할 때 1절 말씀에서 보듯이 "다윗이 군대 지휘관들과 더불어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구별하여 섬기게 하되" 군대지휘관들과 의논해서 고르고 뽑아서 할 만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중요했습니다. 찬양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찬양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찬양의 대상은 결코 인간이 아닙니다. 찬양은 흥을 돋우기 위해서 하는 행위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 대상이십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된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그 대상으로 삼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여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시 147:1)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만을, 그분의 인자와 공의만을, 그리고 그분의 능력만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진실로 찬송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2. 찬양은 번영과 능력을 가져다줍니다. 찬양하는 자에게 나타난 결과를 살펴봅시다. 실로 찬양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한마디로 ‘행복한 상태’로 표현되는 그러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찬양하면 정신이 온전해 진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찬양하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바울과 실라는 옥에 갇혔을 때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이 때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열리고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행 16:25,26) 그리고 찬양하면 마음이 즐거워질 뿐만 아니라(시 105:3)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또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치를 당치 아니합니다.(욜 2:26) 참으로 이러한 상태를 어찌 행복이라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시거든 찬양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사모하시거든 입술을 열어 찬양하십시오. 그러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 임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는 "신령한 노래"(1,2,3)입니다. 그런데 "신령한 노래"라는 단어의 원문이 3절에는 "예언하는"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자가 하는 것입니다. 즉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성령에 사로잡힌바 되어 하는 것입니다. 왜 여호와를 찬양하는 일에 이 단어를 사용하였겠습니까?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은 성령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신령한 노래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즉 이들 레위 자손들은 악기가 연주되는 도중에 예언을 할 수 있었거나 혹은 그들 스스로가 악기를 예언의 영으로 연주하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들은 악기의 반주가 진행되는 도중에 예언을 할 수 있었고, 또한 뿐만 아니라 실지로 그들 자신이 악기로 예언의 말씀을 연주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음악과 예언의 밀접한 관계를 알아차렸던 분이었습니다. 그는 예언을 했어야 하는 어떤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언을 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모압을 대적하여 연합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 어전에 불려 나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 여호람과 유다의 선한 왕 여호사밧이 서로 대결하게 되었습니다. 모압을 공격하기에 앞서서, 여호사밧이 여호람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물을만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에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여호람은 엘리사를 데려오도록 보냈습니다. 엘리사는 의분에 가득 차서 도착하는 즉시로 이스라엘 왕에게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었으리이다."(열왕기하 3 : 14) 엘리사는 성이 났던 것입니다. 그는 악당인 여호람을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엘리사도 그 심령이 몹시 동요를 받은 상태로 예언을 하도록 불려 왔습니다. 그는 무엇을 시도했겠습니까? "이제 내게 거문고 탈 자를 불러오소서."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15-6절) 영이나 혼이 몹시 동요될 때에 예언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그의 영을 어떻게 조용하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악사를 청탁하였고, 거문고가 연주될 때에, 그의 영은 평정을 찾았고 여호와의 신이 그의 영을 감동하심을 느끼기 시작함으로 인해서 예언의 사역이 흘러 나왔습니다.

     

    음악은 우리의 심령을 부드럽게 만들어줌으로써 예언의 흐름을 훌륭하게 강화시켜 주어 우리가 한층 더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도록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분명한 것은 음악하는 사람들도 예언의 사역을 담당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연주하게 되면 악사는 볼과 몇 분 만에 사람들의 심령을 여호와를 향해 열 수 있게 하는데 세 시간에 걸쳐 설교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성과를 거둘 수가 있습니다. 악기로 기름부음을 받은 예언의 노래는 경배 예식의 더 한층 질적인 수준을 높여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시온 찬양대가 이런 신령한 찬양대가 되어서 예배하는 무리를 성령의 바다로 이끌어 가는 신령한 찬양의 사역을 감당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찬양은 그냥 노래가 아닙니다. "신령한 노래"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자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어 노래해야 하며, 배워 익숙하게 해서 불러야 합니다. 특히 대장이나 지휘자나 반주자가 더욱 영적으로 충만하고, 배우고 익숙하여야 합니다. 그들과 더불어 대원들이 영적으로 충만하고, 배워 익숙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가대의 영성입니다. 이사야 43:21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울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고 한 것처럼 하나님이 백성을 지으심은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찬양대는 합창단이 아니라 예배위원이므로 합창단의 의미를 가지고 봉사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세로 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음악이란 기능적인 요소가 필수적이지만 그 기능이 우선되는 것이 잘못이며 더구나 세속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합창단의 개념으로 임하는 찬양대의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는 걸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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