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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갈라디아서 2:15-18/ 오직 믿음으로 [새벽]
  • 조회 수: 796, 2013.10.05 22:07:17
  • 하나님 대 인간 간에 가장 중요한 쟁점거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의’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합니다. 하나님은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나님과 교재하고자 열망했던 위인들은 이 ‘의’에 대한 문제로 고민하지 아니할 수 없었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의로워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면해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기준해서 자신의 의를 하나님 앞에 보이기에 힘썼읍니다. 사실 이 율법이라는 것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바라시는 의를 충족시키기에는  아주 불완전하고 보잘것 없는 것입니다. 이 불완전하고 보잘것 없는 율법조차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벽히 지켜 이행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네들끼리는 내가 의인이다, 너는 죄인이다고 하면서 보잘것 없는 자신들의 의를 내세웠던 것입니다. 내가 너보다 율법을 더 알고 더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체 율법에 비추어 볼때 이 율법의 의를 충족시켜준 사람은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들 중에 아무도 없읍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이 율법을 얼마나 잘 지키고 안지키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율법이 조명하는 빛 앞에 나타난 인간의 모습을 바로 깨닫느냐 못깨닫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읍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우리가 어떤 행동을 했고 안했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느냐를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는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전혀 책임질 자신도 없는 율법의 짐을 자발적으로 등에 메고 하나님 앞에 의로움을 나타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아주 나이 어리고 철 없는 자녀가 있는데 이 아이가 자기 스스로 감당할 수도 없는 무거운 짐을 들려고 낑낑거리며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 아이의 하는것을 보다 보다 못해 한없이 안스러워하면서  “애야, 내가 그것을 들어다줄께” 하는데도 이 아이는 고집을 부리며 기여코 자기가 들지도 못하는 짐을 기여코 들려고 하면 우리는 하다 하다 않되어서 “그럼, 한번 해 봐라”고 그대로 버려 둡니다. 지풀에 꺽여야 포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율법주의자가 바로 이 고집쟁이 어린 아이와 같은 것입니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등에 업고  의를 내세우면 그 의가 뭐가 그리 대단한 것이겠읍니까? 

    하나님 앞에 하찮은 율법이라도 이 율법의 의를 완전히 충족시키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읍니다. 그래도 만약 우리가 진심으로 율법에 응해서 이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임을 더욱 더 실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래도 진심으로 율법을 존중하고 율법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 적어도 내가 하나님이 바라시는 의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걸레만도 못한,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교재할 수 있을 정도의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느냐? 하나님과 교재하기란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 이렇게 실망에 빠져서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을 때 여기에 대한 대답이 본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의인으로 설 수 있읍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읍니까?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롬 1:17, 갈 3:11, 히 10:38에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감격에 차서 부르짖고 있읍니다. 

    그렇읍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의는 축적되는 인간의 업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 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교리적으로 ‘칭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칭의의 교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의롭다고 말씀하실 때 그 의로움은 믿음으로 획득하는 것이지 내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더 넘친다”고 한 사도 바울의 말씀은 죄를 지음으로 은혜를 더욱 누리게 된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넘친다는 뜻으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본 전체의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은혜를 쏟지 마십시요.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은 그들이 받은 이 큰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쏟아버리고, 너무나 버겁고, 힘들고, 불가능한 율법의 멍애를 다시 메려고 하고 있어서 사도 바울은 슬퍼서 부르짖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저들에게 남는 것이 무엇이겠읍니까? 짓누르는 율법의 짐과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은혜를 쏟아버리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나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시고 해결해 주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은혜를 쏟아버리는데 있어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과거에 어떻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럼으로써 다시 자기의 걸레같은 의를 붙잡고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과시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겸손합시다. 결국 낮아지는 것 같지만 그것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이 은혜를 기쁨으로 받고, 감사함으로 받고, 겸손함으로 받아드리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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