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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갈라디아서 2:19-21/ 옛것은 죽고 새것은 살다. [새벽]
  • 조회 수: 992, 2013.10.05 22:09:01
  • 바울은 그가 율법에 능했을 때 그가 속한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읍니다.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되었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박식한 사람이 되었읍니다.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그는 모든 영광을 온 몸에 받고 있는 사람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그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서신을 통해서 볼때 그는 유독히도 그가 자랑했던 율법을 싫어하고 저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율법에 대하여 히스테리 증세를 보인다고 할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읍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은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님의 죽으심 후에도 한결같이 헌신된 삶을 살았고, 모두가 복음 때문에 사도 바울 보다도 더 혹독한 모습으로 순교를 했는데도, 그들은 율법에 대하여 그렇게 혹독하게 평가하지는 않았읍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 보다도 덜 복음적이었나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초개처럼 불살라버린 그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왜 사도 바울만이 유독 율법에 대하여 그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일까요? 이 질문을 깊이 생각해 봄으로써만이 우리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1:10에서 이렇게 외쳤던 것을 보았읍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랴 하나님을 기쁘게  하랴! 만약 내가 아직도 사람을 기쁘게 하려 든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   또 2:6 하반절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던 것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시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구절들을 참조해 볼때 사도 바울의 이전의 삶은 하나님 중심적이기 보다는 인간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읍니다. 비록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꽤나 종교적인 모습과 경건한 모습을 갖추고 또 그를 감싸고 있는 종교적인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행위의 율법을 준수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지만 그 당시 바울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에게 잘보이고 사람에게 인정받을려고 몸부림쳤던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을 단지 종교적인 신앙으로 포장한 것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 만큼 피곤한 일이 없읍니다. 금방 자기 자신을 향해 쏟아지던 칭찬의 말들이 조금 지나면 비난의 말로 바뀌게 되는게 일반적인 대중 여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중의 여론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늘 남보다 뛰어난 뭔가를 늘 보여 줘야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육상 경기에서 9초가 세계 기록이라고 한다면 그 기록이 깨어지지 않는 한은 그 기록을 세운 선수가 영광을 얻지만 조금이라도 그 기록을 깨는 선수가 있다면 그 영광의 주인공은 한순간에 바뀌고 마는 것입니다. 신기록은 깨어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피온 만큼 다급한 인생, 고달픈 인생이 다시 없다는 말이 있읍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보면 그의 유대주의 사회에서 율법에 관한한 참피언이었읍니다. 이 참피언 자리 때문에 그는 사회가 그에게 안겨다 주는 영광을 온 몸에 받았읍니다. 그는 이 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읍니다. 사람들로부터 여전히 영광을 독차지하고 싶었읍니다. 그러니까 그는 부단히 율법을 준수하기에 바쁜 종교적 걸음을 걷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능한한 완벽하게 율법을 준수하여 그가 사는 종교적 사회에서 계속 최고가 되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됩니까? 인간의 타락 이후 도덕적 능력의 한계를 가진 인간이 어떻게 율법을 완전히 이룰 수가 있겠읍니까? 그러므로 그는 율법에 관한한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불안정하고 다급하고 쫓기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걷으로는 율법을 자랑했는지는 몰라도 속으로는 “아이구 이 율법, 아이구 이 율법”하고 율법을 저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진실로 그분께서 그를 위해 단번에 하신일을 알았을때 그가 그 지긋 지긋한 율법에서 해방되었음을 깨달았읍니다. 
    여러분, 그순간 그가 얼마나 후련하고 기뻤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홀가분했을까요? 여기서 그가 체험한 진리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나타나고 있읍니다. 그는 기쁨에 차서 이렇게 쓰고 있읍니다.

    “나는 이제 율법에 관한 한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율법에 관한 한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처럼 나도 이미 죽었읍니다. 이제 내가 비록 육체를 가지고 살아 있으나 이 육체가 세상적이고 율법적인 것에 응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게 응하기 위해 있읍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사는 것은 나를 위해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고 오직 믿음으로 힘을 얻어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첫째, 우리가 옛것을 미워함이 없이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전에 가졌던 옛 풍습과 자랑거리들 중에 신앙에 맞지 않는 것이 있다면 청산하고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미원하기까지 해야 하고, 그것에 지긋 지긋함을 느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학식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읍니다. 그가 이전에 자랑하던 율법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유달리 혐오감을 가지는 그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름과 물이 함께 석일 수 없고, 벨리알과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하는 사도 바울이야말로 과거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과거를 잊어버립시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과거를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고 오직 믿음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과거는 사라진바 되고 잊혀진바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기 바랍니다.  
    둘째,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이 된다면 그것은 걷모양은 복음적이 될지 몰라도 속은 율법주의에 곪아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터져버리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유독히 사람을 의식하는 것같은 모습이 없읍니까? 사람을 의식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이 어디 있읍니까? 의식해야 될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어야 말이죠. 

    그 모습은 잘못된 모습으로 꼭 고치셔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서 보지만 율법적 모습은 자기의 의를 과시하게 되고 결국은 남을 비난하고 끝내는 분쟁을 일으키고 맙니다. 교회가 은혜로와야지 분쟁하는 장소나 되어서야 되겠읍니까? 여러분의 개인 신앙생활, 전체 신앙생활에서 혹 율법적, 인간적인 것이 있다면 모두 모아서 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오직 믿음으로 유지되는 것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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