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갈라디아서 3:6-14/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축복 [새벽]
  • 조회 수: 1047, 2013.10.05 22:15:29
  •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을 그들의 조상으로 둔 것을 큰 축복이라고 여겼읍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나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조상임을 자랑스럽게 내새움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모든 자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유대인들이라도 하나님의 축복은 경히 여기지 아니하였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줄로서 아브라함의 혈통에 고집스럽게 메달렸읍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축복은 아브라함의 혈통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을 통하여 만민이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축복의 길은  이미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열려져 있었읍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때  하나님의 축복은 혈통으로 따질 문제가 아니었읍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들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율법을 지켜서 그들만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한 존재들로서, 어떤 무엇인가를 갖춘 존재들로서 구별되게 하셨다 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교만한 민족이 되었읍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의로와야 합니다. 의인이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과는 달리 단연코 의인은 혈통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믿음에서 나는 것이라고 율법주의자들에게 논박하고 있읍니다.

    유대인들은 의인의 기준을, 얼마나 율법을 지켜 행하느냐에 두었읍니다. 여기에는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행함의 문제만이 있읍니다. 우리가 온전히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완전한 의인으로서 신앙이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가 율법을 온전히 행함으로 의인이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읍니까?

    그러나 문제는 내가 율법을 부분적으로는 지킬 수 있지만 완전히 율법을 지켜나갈 수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신명기 27장 26절에 보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고 하였읍니다. 율법을 이만큼 지켰으니 너는 이만큼만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너는 율법 100개의 조항 가운데서 99개를 지켰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개를 어겼으므로 저주의 자리에 들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보아도 좋다는 투로 말씀하고 있읍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저마다 나는 저 사람보다는 더 온전하다는 비교의식 속에서 자기 자신이 의인임을 내새웠읍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때에는 그 비교의식이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합니다. 밝은 태양 아래서는 촛불이나 형광등 불빛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읍니다. 내가 뭐 잘난 것처럼 보이지만 다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것 없읍니다. 자기의 존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인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인을 강조합니다. 본문에서 그는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니... 라고 되어 있읍니다.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아브라함이라고 할찌라도 그는 율법 앞에서는 온전치 못했읍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 자기의 아내를 팔아버리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는 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가정의 윤리를 파괴하고 첩을 거느린 사람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얼마나 파렴치하고 비겁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대로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돋보이는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읍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읍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칠 수 있었읍니다. 욥이 의인으로 평가된 것도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 11장 6절에서는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 

    우리가 능력이 있으면 누구를 의탁할 필요가 없읍니다. 내가 어릴 때에는 무능력하기 때문에 부모를 의탁하고 부모가 나를 위해 하는 모든 일을 믿고 순종하면 그것이 내게 유익이 됩니다. 그러나 내가 결혼하고 독립하게 되면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때때로는 부모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판단해서 처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모를 의탁하는 믿음이 없어도 좋읍니다. 내가 책임지고 모든 일을 행하고 그 결과도 내것이 되는데 누구를 의탁하겠읍니까? 이것이 율법적인 자세입니다. 따라서 율법주의자는 신앙이 없는 자세를 가리킴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이 있고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내가 연약하고 무능력하기 때문에 비록 아픔이 뒤따른다고 할찌라도 나를 이끌어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무능한 어린이가 부모를 의탁하고 믿음므로 순종하고 따르는 것, 그 자체가 유익이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자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못미치고 무능하기에,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살고 싶어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아니겠읍니까? 내가 비록 못났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내가 모든 것에서 불가능함이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능력있는 자로 만들고 또 의인으로도 만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해지기를 바랍니까? 내 못된 성품이 죽어지기를 바랍니까? 나의 악한 습관이 사라지기를 바랍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신실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까? 정직한 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요.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십시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십시요.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요.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십시요. 그분께서 다 행하실 것입니다. 나에게 문제가 있다면 나의 부족하고 연약한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 내놓지 않고 자신이 그것을 해결하려는 자세입니다. 우리의 모든 부족에 대해서 후히 채워주시고 꾸짓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내어 놓고 그분을 바라봅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라는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큰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7840
1738 계시록 1319
1737 계시록 970
1736 계시록 938
1735 계시록 997
1734 계시록 652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