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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시대에 물질은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한 부자 청년을 가리키면서 부자는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종종 쉽게 오해되어 물질을 소유하는 것은 죄로 오해되어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약시대와 같이 분명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당신의 백성들에게 풍족한 물질을 주신다. 이 물질은 복이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접하는 청년에게 있어서 물질은 하나님의 복이 되지 못하였다.
1. 청년의 신앙
청년의 고민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 세상에는 쓸데 없는 고민이 있고, 때로는 해야 하는 고민이 있다. 고린도전서 9장에 보면 멸망으로 인도하는 고민이 있는가 하면 축복으로 인도하는 고민이 있다고 하였다. 이 시대의 많은 청년들이 고민하고 있다. 좋은 배후자를 만나는 고민,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고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고민, 또는 자신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 말하자면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른 길일까 하는 등등.... 이러한 고민들은 결국 사람들을 발전하게 만든다. 흔히 철학자들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있었기에 문명이 발달하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청년이 하고 있는 고민은 복 받을 고민임이 틀림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까?” 이러한 고민은 믿음으로 인도하는 고민이고, 영생으로 인도하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영생에 대해서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우리의 믿음을 돌아보자. 과연 복 받기에 합당한 삶이고, 믿음인가? 이런 고민은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준다.
2) 영생을 행위에서 얻는 줄 알았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라고 청년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이러한 청년의 질문은 그가 믿음에 의한 구원의 도를 분명히 깨닫지 못한데서 바리새인들과 똑같은 무지를 드러냈음을 보여 줍니다. 또한 그는 선이란 외적 행위와 규율에 부합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 무엇을 행함에서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리새적 규율을 준수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가 실패한 것은(22절) 단순히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처음에 가지고 있던 행위의 구원론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계명에 대한 오해와 영적 자만 -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20절)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율법 준수를 오해하고 단지 외형적 계명 및 가치로만 자기가 다 된 줄 알고 있었던 모습을 보여줍니다. 진정 이 세상에서 율법 전부를 다 지켰노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께서 기대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 의 수준에서 자기의 공적을 은근히 드러내면서 이같이 대답했던 것입니다.
4) 청년의 소극적 선행 - 청년은 많은 재물을 가진 자로서 소극적으로 계명을 지킨다는 데에 급급했지 보다 적극적인 마음으로 자기의 재물을 사용하여 가난한 자를 구제한다는 것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와서 나를 좇으라'(21절). 예수께서 이렇게 요청하신 것은 언제나 곁에서 주님을 수종들며 따르려는 의미였습니다. 마치 열두 제자들이 주님을 따른 것처럼 그도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소유보다 주님의 일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모든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준다 해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좇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바친다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그것 역시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였습니다. (골3:17)
2. 예수님의 가르침
이러한 모습의 청년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가르치셨습니다.
1)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야 함을 가르치셨습니다.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17절).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든지 주어지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로만 돌려 드리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를 '선하다'고 부른다면 그 모든 선은 하나님에게서만 나옴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이외에는 아무도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변함없이 선하지 않습니다. 피조물 가운데 있는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약1:17) 그는 선의 기준이시요, 가장 위대한 선의 전형이요, 본보기이십니다. 그에 의하여 모든 선이 측정되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권위로써 영생의 길을 선포하셨습니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17절). 특별히 이 말씀은 계명을 지킴으로 생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라 생명에 들어간 자 즉 구원받은 자는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한다는 뜻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면서도 실생활에서 하나님과 무관하게 지내는 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자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요14:21)
3)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출20장에 있는 십계명 중 둘째 돌비에 새겨진 제 6,7,8,9계명을 차례로 말씀하신 후 마지막으로 제5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탐내지 말라'는 제 10계명은 생략하고 대신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19:18)는 말씀을 첨가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 제10계명과 함께 이웃 사랑이라는 새계명(요13:34)을말씀하신 것은 청년이 가지고 있던 외적 선행에 대한 자만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또 신약의 새계명을 통해서 현대인의 자만심을 허물어뜨리시고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를 가르치고 계십니다.
4) 이웃사랑의 실천을 촉구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 가운데서도 둘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들을 나열하시면서 이웃 사랑의 귀중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이는 첫째 돌비에 새겨진 계명에 비해 이 계명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당시 만연해 있던 바리새적인 신앙태도(마23:23)를 일소시키고자 하신 의도였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 과의 수직적 관계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간의 수평적 관계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극히 중히 여기셔서 이를 행하도록 촉구하셨던 것입니다. 이같이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사랑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질 때 그 사랑은 비로서 온전한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3. 결단하지 못하는 부자청년
청년은 영생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고 그 답을 알았지만 마치 롯의 처와 같이 놓아야 할 것을 놓지 못함으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말씀한다. 인생의 문제에 접근하는 3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문제의식 조차 없는 사람이 있고, 문제의식으로 답을 찾으나 이미 잡고 있는 것을 놓지 못하므로 결단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문제 속에서 답을 알고 결단하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사람이 첫 번 째 사람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고민만 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문제의식이 없이 살아간 사람과 똑 같다. 오직 결단하고, 행동하는 것만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4. 세속적인 재물의 부정적 영향
부자청년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심하며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부자도 천국에 들어갈 수는 있으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1) 재물은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듭니다. - 인간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는 자기희생적인 자세를 가지다가도 부자가 되면 즉시 이기적으로 변합니다. 부자의 이러한 이기적인 특성은 그의 신앙을 방해하거나 반대합니다.
2)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킵니다. - 물질은 일단 우리에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가져다 줍니다. 부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재물 이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신을 만족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부자의 불행입니다. 그들의 육체는 부족함이 없으므로 정신과 영혼조차도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착각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멀리하게 하고 스스로 자고하여 범죄케 하는 것입니다.
3) 부자는 재물에 대해 과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 우리는 부자라는 말을 지식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 등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나 부자는 대체로 무엇이든지 많이 소유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도 무형의 재산보다 유형의 재산에 집착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소유가 많은 사람일수록 욕심 또한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욕심은 결국 온전한 신앙을 방해하는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5. 부자와 구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는 주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부자는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다윗이나 솔로몬, 그리고 삭개오나 아리마대 요셉 등 성경에 나오는 부자들은 모두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와는 달리 유대인들은 부자는 영생을 얻기가 쉽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은 부자들이 소유한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부자에 대한 그릇된 인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천국 가는 길이 바늘귀에 비교된 것은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바늘귀는 실을 꿰기도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약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것은 흡사 재물을 많이 소유한 부자의 모습이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막에 짐을 등에 가득 싣고 땀을 뻘뻘 흘리는 약대와 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리는 주인의 짐을 내 것인 양 등에 지고 허덕이는 약대의 모습이 집요하게 재물에만 집착하는 부자를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문은 바늘귀처럼 좁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비유는 이런 내용의 부자는 구원 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실은 부자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우리로선 구원을 얻기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에 제자들이 ‘그렇다면 부자는 구원을 얻기가 불가능하겠군요’ 라는 식으로 되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고 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구원론의 대강령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근거가 사람의 선행이나 수양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총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엡2:8-10)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가 보기에 전혀 구원받기에 적합하지 않는 자라도 마치 낙타가 바늘귀를 유유히 통과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뿐만이 아니라 우리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큰 기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왠 은혜이며 왠 사랑인가...? 이렇게 감격해 합니다. 구원은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게 하는 첩경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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