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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애가 1:12/ 우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주일낮]
  • 조회 수: 102, 2013.10.06 21:59:40
  • 전도서 7:2에 보면 초상집에 가서 교훈을 얻는 것이 잔치집에 가서 연락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역자로서 인생을 많이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병들어 고생하다가 꺼져가는 불꽃처럼 사그라져가는 생명을 본다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읍니다. 저는 암으로 고생하다가 죽어간 사람들을 지금까지 4명을 목격했읍니다. 심방을 가서는 숨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뼈만 앙상한채 죽어가는 환자들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면서 늘 인생의 비애라고 할까 또는 슬픔과 같은 단어들을 떠올렸읍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미래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있게 확신할 수 있겠읍니까?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호소력 있게 들려집니다. 

    “무릇 지나가는 자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내게 임한 근심같은 근심이 있는가 볼지어다. 여호와께서 진노하신 날에 나를 괴롭게 하신 것이로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나라에 대하여 한많고 눈물 많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폐허가 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비탄에 젖어서 한 말씀입니다. 북 이스라엘은 그 당시 강력한 무력국가였던 앗시리아에게 B.C 722년에 멸망을 당하였고, 그보다 조금 뒤에 남쪽 유다 왕국은 586년에 신 제국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채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고, 여러 유력한 백성들도 함께 포로로 잡혀 갔읍니다. 이 때에 예루살렘 성은 이방인의 잔인한 발길에 채이고, 밣혀서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읍니다. 성전의 집기는 바벨론으로 옮겨져 갔고, 창고의 모든 보물은 이방인들의 노략거리가 되고 말았읍니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빠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눈물을 흘리면서 울부짖읍니다.

    “아, 슬프다! 예루살렘이여,/ 한때는 사람들로 붐비더니 / 이제는 적막하게 되었도다 / 대적이 그의 주인이 되고 / 원수가 번영을 누리게 되었으니 / 그 어린 자녀들이 / 대적에게 멀리 사로잡혀 갔구나 / 그 지도자들은 / 꼴을 얻지 못해 기진맥진 하여 / 몰이꾼 앞에서 / 더 이상 달아날 수 없는 / 사슴의 신세가 되었구나!”
    이런 즈음에도 유다의 지도자들과 자칭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기기 보다, 더러는 애굽의 편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바벨론에 발붙어서 아첨하며 자기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모습을 볼 때 예레미야 선지자는 안타까왔읍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왕과 종교 지도자들의 죄 때문이 아닙니까? 
    나라가 망하기 오래전부터 예레미야 선지자는 죄에 대한 유다의 회개를 촉구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수차례 왕과 방백들에게 경고한 바가 있었읍니다. 그러나 왕과 방백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더 신뢰하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박해하며 괴롭혔읍니다. 이제 그들로 인해 유다가 망한 꼴이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유다의 멸망이 자신들과는 상관이 없는양 처신을 했읍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르짖읍니다. “너희에게는 나라를 잃고 고통을 당하는 이 일이 아무런 관계도 없느냐? 너희와는 관계가 없느냐?” 예레미야 선지자가 외치는 이 안타까운 외침을 새겨보면서 우리는 몇가지 사실에 대하여 돌이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첫째, 모든 인류가 당하는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지금 지구촌이 당하는 어려움을 생각해 볼 때, 그리고 작금 우리 나라의 현실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심직한 이 한가지 질문 “이 모든 일이 너희와는 상관이 없느냐?”는 질문을 상상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우리는 늘 남을 탓하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읍니다. 나라가 점점 나빠져가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과는 무관한 듯이 말합나다. 그래서 늘 남의 타령만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은 축소하고 남의 약점은 과장되게 드러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 때문에 더 그렇읍니다. 남은 잘못하고 자신은 잘했다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더욱 더 남의 약점을 드러내고 자신의 약점은 숨기려고 합니다. 나라가 나빠져가는 것에 대해서 서로가 무관한 듯이 남의 탓으로만 돌립니다. 정치가는 정치가들대로, 정당은 정당들대로, 지도자는 지도자들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오늘날 것도는 정치에 대해서, 나빠져 가는 경제에 대해서, 나락으로 나락으로 깊은 심연 속으로 추락하는 도덕성에 대해서는, 서로가 나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남의 탓으로만 돌립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의 풍토요, 참된 진면목입니다. 이러한 우리 나라의 풍토 속에 깊이 물들어 있는 한국교회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와는 상관이 없느냐?” 왜 남의 탓만을 합니까? 내가 먼저 잘못했다고 말해 봅시다. 정부는 정부대로 잘못했다고 솔직히 인정하고, 야당은 야당대로 “우리가 잘못했다”는 소리를 좀 들어 보면 좋겠읍니다. 국민도 국민대로 “우리가 정말 잘못했다. 이래서는 않되겠다”는 인식을 가졌으면 좋겠읍니다.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것처럼 우리 나라가 경제, 정치 등등의 모든 것에서 회복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면 됩니다. 서로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우기니까 잘못한 줄 뻔히 알면서도 고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대권 주자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 뛰고 있읍니다. 정치의 모든 것에 식상한 국민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는 말들을 하려고 서로 애쓰고 있는 그들에게 한마디 도움을 주고 싶은 말이 있읍니다. 어떤 말을 하는 것이 국민에게 가장 신선한 느낌을 주겠느냐 하면 바로 “내가 잘못했읍니다.”라고 하는 이 솔직한 말 한마디입니다. 누구든지 먼저 이 말을 해서 국민에게 솔직하다는 느낌을 준다면 그가 바로 대권을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큼니다. 하도 저잘났다고 하는 말만 들은 국민들로서는 고개 숙여서 “잘못했읍니다”고 하는 이 한마디를 앞지를 수 있는 다른 신선한 말은 없을 것 같읍니다. 이 어려운 현실에 대해서 “너희와는 상관이 없느냐”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회개할 수 있는 한국 교회, 회개할 수 있는 염광 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예레미야 선지자가 부르짖는 이 외침을 생각하며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흘리며 고통 당하시는 그 순간에 인류를 향해 외쳤음직한 음성, 곧 “이 괴로움, 이 고통이 너희와는 상관이 없느냐?”는 주님의 외침을 상상해 볼 수 있읍니다. 사실, 주님은 인류를 향해 이러한 외침을 하지는 않았읍니다. 그 분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양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 분은 고통에 못이겨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읍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이 고통을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었읍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얼마나 괴로웠으면 하나님을 향하여 이와같이 외치셨겠읍니까? 이러한 주님의 절규를 생각해 볼때, 그 고통이, 그 괴로움이 무엇 때문에 비롯되었나를 아는 우리들로서는 하나님을 향한 그 분의 절규를 우리를 향한 외침으로 바꾸어 생각할 필요가 있읍니다. “이 고통이 너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냐?” 주님의 그 고통, 그 괴로움, 그 죽음이 무엇 때문에 비롯되었읍니까? 그 분의 운명 때문입니까? 그 분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자신이 행한 종교적 혁명의 실패 때문입니까? 그 분의 죽음은 우리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 우리가 받아야 할 수난, 우리가 받아야 할 부끄러움, 우리가 받아야 할 수치를 하나님께서 그 분에게 돌리신 것이 아닙니까? 그 분 자신은 하나도 죄가 없으셨읍니다. 그분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이 당한 고통은 그 자체가 모든 인류와 깊은 연관성을 지니고 있읍니다. 그런데도 이 사실을 모르는 로마 군병들과, 또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 부끄러움, 수치를 놀려되면서 자기들의 운명과는 상관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웃었읍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읍니다. 그들이 목격하고, 그들이 놀리며 웃어대는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처지가 앞으로 그들이 당하게 될 처지라는 사실을... 아마도 고통 받으시며 괴로워하시던 그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발 밑에서 그를 놀려되는 이 무지한 자들에게 닥쳐올  고통스러운 미래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도 이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진 자들이 있읍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그들과는 상관없다고 말합니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읍니다. 우리는 부자예요. 우리는 잘 살고 있어요. 그러니 무지하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나 가서 이야기 해 보세요. 우리와는 상관이 없읍니다.”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받아드리지 않고 있읍니다. 

    이와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존재가 되어져 있읍니다. 그 분과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학문과 부요함을 가득히 채워 부풀은 고무 풍선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고무 풍선이 부풀어 터지듯 그들의 운명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그들은 그들 앞에 닥치게 될 운명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두려움, 떨림보다 한층 더 강도 높은 두려움으로 덜덜 떨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때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노라고 아우성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시계가 멈추고, 경기는 끝나 텅비어 있는 경기장에서 허탈감을 가눌길 없는 패배자의 심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뻔히 보이는 자신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음성을 듣는 자들의 심정이 어떠하겠읍니까? 그러나 우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았으니 우리가 알바 아니지요. 

    그러나 심령이 상한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모든 것이 되십니다. 당신은 사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읍니까? 그리고 당신은 용서받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마귀의 편인 세상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요. 그리스도의 고난이 당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깨닫게 되어질 때까지, 그리고 죄로 슬퍼서 당신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일 때까지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 분을 붙들지 아니하면 당신의 죄를 대신해서 무엇을 재물로 삼겠읍니까? 병들고 죽어가는 자들에게 부자가 되는 특효약을 가지고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철학이라고 하는 인생의 약품을 들고 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위로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위로가 될 수가 있읍니까? 저 로마 원형 경기장 가운데서 죽어가던 수많은 성도들의 입에서까지 즐겁게 외쳐진, 예수 그리스도, 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이신 사실을 외 받아드리지 않읍니까?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인류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죽음이 아직도 너와는 상관이 없느냐? 다 내게 오라. 병든자여 내게 오라. 가난한 자도 내게 오라. 삶에 지친 모든 사람들아, 모두다 내게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당한 이 모든 고통에서 너를 면케 하리라. 너를 쉬게 하리라” 

    “너희와는 상관이 없느냐”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아멘」으로 대답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든 주님의 고난이 나의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하는 인생이 복받은 인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죄에 대해서 용서받은 인생만큼 복받은 인생이 없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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