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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4:3-11/ ‘만일’이라는 그 치명적인 단어 [주일낮]
  • 조회 수: 690, 2013.10.06 22:01:19
  • 수요자의 구매욕구 8단계가 있읍니다. 그 중에 한 단계가 “만일 저 물건을 사면 어떨까?”하고 상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요즈음은 오너 드라이버 시대라고 해서 차를 사는 것이 유행인데 그렇다고 아무나 차를 살 수 있읍니까?  차를 살려면 돈도 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 한달의 적당한 유지비가 보장되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여건을 고려하면 우리 나라의 중산층 수준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쉽게 차를 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T.V광고와 주변 환경이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브라운관에 나타나는 광고는 다분히 시청자들을 정신없이 빠져들게 합니다. 그래서 시청자는 자기의 형편과는 관계없이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비슷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빨간 르망에 흰옷, 그리고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긴 머리칼을 날리며 해변 도로를 질주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수요자의 마음 속에 상상력이 발동되기 시작하면 상상이 상상을 낳고 비약을 낳아 이제는 모든 생각이 완전히 차 속으로 몰입되고 맙니다. 그때부터는 머리 속에 온통 차생각으로만 가득찹니다. 오직 자나 깨나 차뿐입니다. 

    이렇게 ‘만일’이라는 이 단어가 사람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세일즈맨이 우리 염광교회를 지나가다가 오늘의 설교제목을 보았다면 한번쯤은 흥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가장 놀랍고 매력적인 단어가 어떻게 치명적이 된다는 거지?” 세일즈맨에게 있어서 ‘만일’이라는 이 단어야말로 얼마나 놀랍고 매력적인 단어입니까? 이 ‘만일’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추운 지방에 사는 에스키모인에게까지도 냉장고를 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제목이 무엇입니까? 「‘만일’이라는 그 치명적인 단어」가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왜 ‘만일’이라는 단어가 세일즈맨에게는 매력적이고 놀라운 단어이면서도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단어가 됩니까? 오늘 본문에 비추어서 이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의 시험받으심에 대한 사건을 다루고 있읍니다. 본문에 보면 사탄이 예수님께 세가지의 시험을 합니다. 사탄은 이 세가지 시험의 초두를 꼭 ‘만일’이라는 단어로 장식을 합니다. 이 만일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이 시간에 좀 깊이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왜 사탄은 ‘만일’이라는 단어를 잘 사용합니까? 
    첫째, 이 ‘만일’이라는 단어에 피할 수 없는 이중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만일의 한쪽 측면은 엄연한 사실을 부인하게 합니다. 또 이 ‘만일’의 다른 측면은 거부감 없이 사탄의 요구를 들어주기 쉬운데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치명적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사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엄연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예수님에게 ‘만일’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것은 사탄의 입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의심하게 만들고 또 자신으로서는 하나님 아들 되심을 부정하고자 하는 의도가 다분히 있읍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보면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읍니다. “아이구 내가 이렇게 해가지고서는 어떻게 신자라고 할 수가 있나”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앙을 학대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자신이 불신앙의 자리에 서 있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탄은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우리 자신을 부인하게 하면서 우리를 공격합니다. “만일 내가 참 신자라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이것은 언뜻 보면 양심의 소리인것 처럼 들리지만 가만히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부인하게 하고 불신앙의 자리에 들어서게 하려는 사탄의 책략에 다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엄연히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유업에 동참할 성도라는 것을 사탄이 알고는 있지만 이 못된 단어인 ‘만일’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그의 유업에 동참할 수도 없는 자들인 것 처럼 착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의 유업에 함께 참여하는 영광의 신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신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읍니다. 그런데 여기에 만약 만일이라는 말을 붙이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의 회오리가 되어서 우리의 믿음을 단번에 날려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 단어야 말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피해야 하고 없애버려야 하는 치명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내가 만약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것은 사탄의 소리요, 우리 자신을 망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렇게 해서는 않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데에는 이와같이 만일이라는 단어가 필요가 없읍니다.    

    또 만일 예수님이 이 사탄의 요구에 대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사탄의 올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나타내기 위해 돌로 떡을 만든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뭐 그리 죄될 것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읍니다. 우리는 이렇게 말할찌도 모르겠읍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사탄 앞에서 이적적으로 드러낸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겠느냐?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탄 앞에서 하나님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느냐?” 얼마나 명분이 있는 말입니까? 그러나 사탄의 계략은 늘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옵니다. 사탄도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며, 하나님의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 하면서 참된 교회를 넘어가게 하고 참된 신자를 넘어지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 속에 사탄이 심어주는 생각은 처음부터 당장 죄된 모습으로는 나타나지 않읍니다. 아주 슬그머니 다가오는 것입니다. 내 마음 속에 떠 오르는 생각이 감히 사탄적이라고 추측할 수도 없을 정도로 가만히 가만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 속에 조용하게 익히는 방법이 있읍니다. 처음부터 개구리를 펄펄 끓는 물에 집어넣으면 어 뜨거워라고 하면서 팔딱 튀어나옵니다. 그러나 처음에 미지근한 물에서부터 아주 천천히 온도를 가하게 되면 이 멍청한 개구리는 아무것도 모르는채 “아 포근해. 아 따뜻해. 아 너무 따뜻하니까 잠이오네”하면서 익어가는 것입니다. 사탄도 우리에게 접근하는데 있어서 이와같이 흔적도 없이 다가와서는 “너는 내것이라”고 갑자기 잡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사탄을 상대해 주면 그 다음부터는 계속 사탄에게 노출되고 마침내는 우리가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부터 사탄을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미련한 반면에 사탄은 계략과 지혜로 충만합니다. 우리는 이 사탄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아예 상대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단도 한두번 권고하고는 집에도 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하물며 사탄을 상대해서 되겠읍니까?                    
     
    둘째, ‘만일’이라는 단어가 치명적인 것은 우리로 하여금 죄된 생각을 가능하게 합니다. 우리가 행동으로는 범죄하지 못해도 생각으로는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어떤 상황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마침내 행동화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바라보며 먹음직스럽다고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또 바라보고 생각하고 상상해 보다가 마침내는 따먹고야 만 것입니다. “만일 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되겠지.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정말 멋이 있겠지. 걸음거리도 권세가 있고, 우아해지겠지.”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까 어느새 선악과가 그 입 속에 들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계흭적인 범죄는 생각에서부터 비롯되어집니다. “내가 저 은행을 털어서 돈을 많이 가지게 된다면 정말 인생을 멋있게 살 수 있을꺼야. 멋진 집에 멋있는 차를 타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할 수 있겠지?” 이런 생각으로 사로잡혀 있으니까 은행만 보면 털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일날 예배 한번 빼먹고 낚시를 하거나 가족끼리 소풍을 가면 어떨까? 그렇게 하면 않되겠지?” 처음에는 않되겠지? 않되겠지? 하지만 나중에는 그 않되겠지가 되겠지라고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다 ‘만약’ 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가정법의 위력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비신앙적이고 부정적인 상상력의 과정은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그 결과는 자기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저 선악과를 따먹으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되기는 어떻게 돼요. 하나님께 버림받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고 말았지요. “저 은행을 털면 어떨까?” 어떻기는 어때요. 감옥행 이지요. “마약을 복용하면 어떨까?” 어떻기는 어때요. 인생 파멸이지요. “주일날 한번 예배를 빼먹어보면  어떨까?” 어떻게 되기는 어떻게 됩니까? 주일날 예배 빼먹는 습관이 나중에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세상적이 되고 마침내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길 뿐이지요. 이와같이 사탄의 가정법은 우리를 황홀하게 끌어들이고 아름다움, 화려함으로 우리를 불러내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서 보면 파멸이요, 아찔함이요, 구역질이요, 더러움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생활에 ‘만약’이라는 이 음흉하고 치명적이고 신사적이지 못한 단어를 몰아냅시다. 맞으면 맞다, 틀리면 틀리다, 이것은 해야한다,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등등의 명확한 생각 속에서 신앙생활을 해 나가도록 합시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에는 ‘만약’이라는 이 애매모호한 단어가 결코 필요 없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데  만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사탄의 불신이 끼어드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만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불신앙이 자라가는 과정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왜 ‘만약’이라는 말이 필요하겠읍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임을 의심하게 만드는 이 ‘만약’이라는 단어, 못된 상상력으로 우리를 죄짓게 하는 이 단어, 우리 모두를 죽이는 이 단어, 우리 모두의 믿음과 기쁨과 즐거움과 은혜를 앗아가는 이 사탄적인 단어 ‘만약’을 여러분의 신앙생활에서 추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됨과 그의 유업에 참여하게 됨을 확실히 믿고 잃었던 기쁨, 잃었던 즐거움, 잃었던 은혜를 회복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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