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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예레미야 1:11-19/ 복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주일낮]
  • 조회 수: 166, 2013.10.06 22:04:10
  • 복음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말 그대로 풀이하면 복 福자에 소리 音자, 곧 복된 소리, 복된 소식을 뜻합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마땅히 그 뜻을 바로 알고 매 순간 이 복음을 외쳐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본분이며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참된 증표인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라고 해서 그 내용이 다 듣기 좋은 내용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소망도 주지만 그와 동시에 복음에는 책망과 경고의 소리도 함께 공존합니다. 우리는 희망과 소망의 멧세지가 복음인 것과 마찬가지로 책망과 경고도 동일하게 복음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왜 그렇읍니까? 착하고 어진 사람에게는 칭찬하고 그와 함께 밝은 미래의 소망을 가지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악하고 못된 사람에게 칭찬과 희망의 소리는 그를 망치게 하는 독약과도 같은 것으로 결코 복된 소리가 될 수 없읍니다.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책망과 경고가 주어져야 합니다. 악하고 그릇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에게는 책망과 경고가 복음이 됩니다. 왜냐하면 책망과 경고를 통해서 잘못을 깨닫고 그 길에서 돌이키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복음은 마땅히 소망의 멧세지와 함께 경고의 멧세지가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성도들이 복음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는 듯합니다. 복음이 마땅히 복된 소리니까 믿는 성도에게 들려주는 설교이든, 불신자에게 하는 전도이든 간에 부담없이 듣기 쉬운 소리, 듣기 좋은 말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는 잘못의 지적보다는 청중들의 지성과 유머를 충족시켜 주며 모든 사람에게 소망과 위로와 축복과 힘이 되는 설교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는 지옥의 저주보다는 하늘나라의 영광을 소개하며, 축복된 앞날을 보장하는 그런 내용으로 전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생각해 보면서 저는 예레미야의 고된, 그러나 인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그의 역할, 그의 사역을 떠올려 봅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예리미야 선지자와는 달리 대중들에게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외쳐되며 선지자로서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읍니다. 당시의 그 시대적 선지자들의  외침은 이 “평안하다 평안하다.”라는 내용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읍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틈바구니 속에서 눈물로 점철된 예레미야의 음울한 외침, “이제는 파국이라”고 부르짓는 그 경고의 외침은 너무나 외소하고, 촌스럽고, 어떻게 보면 한낫 재수없는 소리에 불과할 뿐이었읍니다. 사람들 대다수는 그의 외침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능욕했읍니다. “왜 당신은 그렇게도 고리타분하고 구시대적이냐? 이 시대에 누가 당신의 그 지저분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느냐? 그렇게도 머리가 안돌아가느냐? 시대를 보아라. 군중들의 분위기를 보아라. 저들의 분위기를 망칠 셈이냐? 저들의 소망을 꺽어버려야 되겠느냐?”는 식의 소리를 해되었을 법한 그런 동료들 사이에서 예레미야는 고독해 하며, 때로는 눈물도 흘리며 그의 고통스러운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러한 일을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멧세지는 많은 면에서 경고가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택하여 읽은 이 본문은 경고와 함께 소망을 주는 내용이 담겨 있읍니다. 본문에는 두가지 예화가 나타나고 있읍니다. 

    첫번째는 살구나무에 관한 이야기요, 두번째는 끓는 가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예레미야가 바라본 살구나무를 통하여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어떠한 내용을 알게 하고자 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살구나무 가지에는 신기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읍니다. 예레미야가 창문을 통해 내려다 보고 있을 때 뒷뜰 안에 살구나무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띄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살구나무는 수년 동안 그곳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 살구나무의 가지를 보고 있었읍니다. 살구나무는 봄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망과, 다가오는 새로운 삶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살구나무는 잎이 피기 전에 꽃이 먼저 핍니다. 그리고 살구나무에 꽃이 핀 것을 보면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묻읍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 가지를 보고 있읍니다.” 예레미야의 대답이 있자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잘 보았다. 이것은 나의 말을 이루기 위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너가 살구나무를 보느냐? 잘 보았다.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나는 너에게 나의 하는 일을 보여 줄 것이다. 만약 네가 나의 일을 하려면 항상 네 눈 앞에 살구나무의 환상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살구나무는 너에게 소망과 확신을 줄 것이다. 이 살구나무는 나의 일이 분명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표로서 너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증표를 항상 간직하고 잊어버리지 말아라. 어려움이 닥칠 때, 의심이 들 때, 고통스러울 때에는 늘 이 살구나무의 환상으로 힘과 격려를 얻어라. 나의 일은 꼭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예레미야에게 주신 이 살구나무의 환상, 이것은 하나님이 그의 하시는 일들이 마치 살구나무가 꽃이 피고 잎이 나고 마참내 열매를 맺듯이 분명하게 이루어 질것에 대한 약속과 확신을 예레미야에게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의 멧세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살구나무 가지의 환상을 잘 간직하고 있읍니까? 또한 여러분 각자 개인에게 허락해 주신 이 살구나무의 환상을 잘 간직하고 있읍니까? 그 환상의 살구나무 가지가 꽃을 피웁니까? 잎이 맺힙니까? 그리고 마침내 열매가 맺혀가고 있읍니까? 이 광경이 바로 우리 교회여야 하고, 우리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교회가 소망이 있는 교회요, 우리 성도 모두가 소망이 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 개인 개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시작하고 진행 중에 있는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살구나무 환상을 잊어버림으로 좌절하고, 시험에 들고, 의심에 빠지며, 마침내 잘못된 길로 걸어갈 수 있읍니다. 여러분들이 오래전에 잊어버린 이 살구나무의 환상을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되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확신에 서서 걸어갑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읍니다. 그리고 우리의 새로운 인간성 회복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이제 하나님 나라가 우리 손에 맡겨졌읍니다. 우리 교회를 통해서, 나 자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도 일하고 계십니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살구나무 환상을 우리 교회와 우리 각자에게 허락하셨읍니다. 이 살구나무 환상을 우리의 마음에 심고 자라게 합시다. 이 환상의 살구나무에 열매가 맺힐 때, 우리는 크게 아멘을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이 환상의 살구나무는 우리에게 복음이요, 말씀으로 주어집니다. 

    둘째는 끓는 가마입니다. 저는 가마가 어떻게 그 면이 북에서부터 기울어질 수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의 히브리어 원어로는 이런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뜰 바깥쪽에는 가마 안에 찌개가 부글부글 끓고 있읍니다. 그리고 가마는 약간 남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읍니다. 그래서 그것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면 그 내용물이 남쪽으로 넘쳐서 흐르게 되는 그러한 상황입니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바라보는 끓는 가마의 상황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임하리라”

    자,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계실까요? 주석가들은 여기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갖고 논란을 벌입니다. 그것은 예레미야 사역 초기에 있었던 북쪽 스구디아족의 침입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는 예레미야 후기의 바벨론 군대의 침입을 뜻하는지도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해석에 대해서는 그리 논란을 벌일 필요가 없읍니다. 그것은 본질을 피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살구나무가 상징적이었던 것처럼 끓는 가마도 똑같이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재앙이 입박함에 대한 경고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망의 메세지를 주심과 함께 경고의 메세지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소망을 키워가게끔 하시지만 다른 한쪽으로는 재앙의 시기를 재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한쪽에는 소망의 살구꽃을 피우시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재앙의 가마솥을 걸어놓고 우리를 향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행하는 악이 불에 타는 나무가 되어 그 가마솥을 가열시킬 때, 때가 되면 그 가마솥이 끓어 올라 그 재앙이 우리를 향해 흘러넘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의 전체 메세지는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야, 너는 두 가지 메세지를 양 손에 하나씩 들고 있는 것이다. 하나는 소망의 메세지요, 또 하나는 경고의 메세지다. 그 경고는 다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여호와를 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는 것이다. 너가 전하는 소식은 좋은 소식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쁜 소식도 있다. 그리고 네가 이 두 가지 주제를 계속 네 입에 두지 않으면 너는 나의 참된 말을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항상 기억할 것은 너의 손에는 소망의 메세지와 함께 경고의 메세지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두가지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첫째, 복음에는 소망과 함께 경고의 소리가 있읍니다. 강단의 설교에는 소망과 축복과 은혜의 소리가 있지만 책망과 경고의 소리도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책망이 나를 향한다고 하더라도, 또 그것이 비록 듣기가 거북하다고 하더라도 언짢아 하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재앙을 마주 하는 것 보다는 책망이 한결 더 나은 법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잘한다고 해야 옳바른 칭찬이 되지, 못하는 사람에게 잘한다고 하면 그것이 진정한 칭찬이 될 수 있읍니까? 어떤 순간에 나에게 책망으로 들려지는 설교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혼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여러분은 두가지 중 한가지를 택하셔야 합니다. 무엇이냐 하면 살구나무를 키우든지, 재앙의 가마를 끓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셔야 합니다. 무엇을 택하시겠읍니까? 환상의 살구나무, 꽃을 피우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살구나무를 여러분의 신앙의 밭에 심어서 구원의 소망으로 충만해져야 되지 않겠읍니까? 이 환상의 살구나무를 늘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 나무가 자라고 열매맺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소망의 증표, 환상의 살구나무를 소유하시는 염광교회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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