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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로마서 14:7-8/ 나는 누구인가? [주일낮]
  • 조회 수: 483, 2013.10.07 06:55:10
  • 나는 누구인가? 이것은 아주 존재론적인 질문이며 까다로운 철학적인 질문이기도 합니다. 철학이라는 말이 딱딱하고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 철학한다는 말 자체는 쉽게 표현하자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자신의 존재를 규명한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생활 양식이 달라집니다. 내가 내 존재를 확실히 규명할 때,  그 존재를 채우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것들은 힘든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즐거운 것이며 유쾌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를 모르고서 하는 모든 것들은 우발적이며, 감정적이며, 즉흥적이며, 변화무쌍하며, 지속적이지 못하는, 말하자면 중심이 없이 흔들리는 것들일 수 밖에 없읍니다.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소위 철학작업이라는 것을 한번 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자들이냐를 아는 것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보다 우선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주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말인데, 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아주 지당한 말로 들리지만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허튼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공감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자인가를 먼저 규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존재 방식이 세상적인 사람들에게 “주님을 위해 삽시다”하고 권하는 것은 마치 다리 밑의 거지에게 교양있게 살아라고 권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읍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가장 포괄적이고 효과적으로 대답한 사람은 키에르 케고르라는 철학자입니다. 그는 기독교적 실존 철학자인데 우리가 우리를 효과적으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데 3가지 인간의 존재양식을 「돈 환」이라는 가상 인물을 통해 제공해 주고 있읍니다. 돈환이라는 청년은 처음에는 모든 감각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삶을 투자했읍니다. 술과 뭇 여성들을 탐닉하면서 감각적 쾌락과 즐거움을 누렸읍니다. 이 즐거움은 처음에는 매력적이었읍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이 즐거움은 권태와 절망, 허탈감으로 변해갔읍니다. 그는 이 권태, 허탈감을 채우기 위해 더 깊은 육체적, 감각적 쾌락을 찾았으나 그 쾌락은 한 순간이고 이전보다 더 깊은 실망과 좌절을 안겨주었읍니다. 그것은 변덕과 감정, 그리고 공상으로 특징지워지는 허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읍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그 생활을 벗어나기로 결심하고 다른 생활을 찾았읍니다. 그것은 보다 육체에 대하여 통재되고 절제된 윤리적, 정신적 생활이었읍니다. 육체적 쾌락의 심연에 빠져들던 과거의 생활에 비해 이것은 한결 고상하고 아름다운 생활입니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 수록 자부심을 가지고 보다 더 육체를 통재하고, 절재하는 고도의 윤리적, 정신적 삶 속에서 즐거움을 누릴려고 했읍니다. 그러나 이 즐거움도 순간적입니다. 이 생활은 전보다 고상하고 높은 차원의 즐거움을 주지만 이 즐거움을 위해 보다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면 할수록 과거의 기억에 시달리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러한 고상한 삶을 살기에는 너무 무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즐거움은 고뇌로 바뀌고 육체적 절제는 한계상황에 다다르고 있읍니다. 결국 그는 윤리적, 정신적 즐거움의 탐닉에도 실패하고 말았읍니다. 그렇다고 그는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읍니다. 그는 더 이상 추해지고 싶지는 않았읍니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추악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육체를 통재할 수는 없읍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는 고통에 차서 절규합니다. “아 인생은 왜 이다지도 무능하고 추악한가? 나는 누구인가? 신이시여, 나는 지금 당신 앞에 벌거벗고 서 있읍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이 순간 그는 신 앞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신이시여, 나는 더 이상 당신 앞에 숨길 것이 없는 벌거벗은 자입니다. 당신만이 위대하시며, 당신만이 완전하십니다. 나는 이제 내 자신을 당신 앞에 드립니다. 나를 완전케 하소서.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바라보며 살겠읍니다.”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전 존재를 던지게 됩니다. 돈 환이라는 이 인물을 통하여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의 존재 방식에 대해 세가지 존재 양식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미적 존재, 둘째는 윤리적 존재, 셋째는 종교적 존재입니다. 여기에서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선택은 종교적 인간관, 즉 신 앞에서 벌거벗고 서 있는 단독자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결단해야 한다고 했읍니다. 미적 존재, 윤리적 존재, 종교적 존재, 이 세가지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의 존재 양식을 이 세가지에서 찾는다면 어느 것에다 자신의 존재를 던지겠읍니까? 

    먼저 미적인 존재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불태우는 사람들을 생각해 봅니다. 외적이고,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특징지워지는 이 존재양식은 사람에게 늘 감각을 만족시키면서 살아가라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미적 존재는 동물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맙니다. 동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동물은 생각없이 본능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동물의 행동은 그 모든 것이 감각과 연결되어 있읍니다. 모든 것이 육체에 편한대로 움직이고, 감각을 충족시키는데 집중되어져 있읍니다. 그 행동이 자신을 만족하게만 만들면 그만입니다.  오직 육신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 이를 위해 돈을 모으고, 돈을 쓰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동물적인 존재에 불과합니다. 여기에서 인생의 절망이 시작됩니다. 자신의 육신을 만족시키기에 모든 행동을 집중시키게 되니까 남은 안중에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폭력과 살인과 성 범죄 등의  사회 범죄가 생겨납니다. 비록 문명의 이기들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인생을 더욱 편하게 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동물과 사람의 차이점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지능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별 다를 바가 없읍니다. 냉장고를 가지고, 좋은 집을 가지고, 좋은 옷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 동물과 다른게 무엇입니까? 오직 자신의 편리함을 위해, 자신의 감각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동물적인 것에 다름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동물과는 달리 지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은 자신이 사람임을 포기하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곧장 권태와 허탈감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지어졌는데, 사람이 비인격화 되고 동물화 되는 것, 이것 만큼이나 큰 비극이 어디 있겠읍니까? 하나님이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인생을 이 땅 위에 보내주었는데, 동물적으로 살아가는 것만큼 절망적인 것이 어디에 있읍니까? 이 사회가 사람 사는 사회가 되어야 평안한데, 사람의 탈을 쓴 동물들과 사람들이 어울려 사니까 절망적인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이러한 삶, 이러한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삶은 권태와 좌절과 절망감을 안겨다 줍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이러한 미적 존재의 차원을 넘어서 새로운 즐거움을 찾고자 윤리적이고, 정신적인 것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사람이 편하고 배부르고 여유가 생기면 이제는 뭔가 보다 고차원적인 것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육체를 만족시키는 것 만으로는 즐거움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보이는 것으로 존재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도 존재합니다. 그래서 넘치는 돈으로 그림도, 골동품도 사 모으면서 보다 고상한 취미로 즐거움을 찾읍니다. 또한 지적인 것을 추구하기도 하고, 자선을 배풀기도 합니다. 또한 육체를 통재하여 나타나는 정신적 즐거움에 한번 빠져 보기도 합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질문도 한번 던져 보면서 제법 근원적인 것을 찾을려고도 해 봅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느 한계선에 도달하기 까지는 그럭저럭 즐거움을 제공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의 깊이가, 우리의 생각의 폭이, 우리의 정신적, 윤리적 빈곤성이 들어나게 되는 한계상황이 오면 우리는 또 다시 좌절하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면 세계를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도 비 양심적인 인간이었던가? 내가 이렇게도 생각의 폭이 좁았던 인간이었나? 내가 이렇게도 무능한 사람이었나? 내가 이렇게도 추악한 사람이었던가? 내가 이렇게도 비겁자이었던가? 등등 자신을 향해 반문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절망감에 사로잡힙니다. 낙담하게 됩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없이 홀로서기를 강조하는 무실론적 실존주의자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인간의 한계상황으로 받아드리고, 인간 존재의 결론은 결국 어두움이고, 두려움이고, 공포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와 싸우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잘 해봐야 이 선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이 이상 나아갈 곳이 없읍니다. 이 인간의 미완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드립니다. 그러나 과연 이 길 뿐이겠읍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왜 미완성적인 사람으로 끝나버려야 합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부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간의 미완성을 받아드리거나 아니면 우리의 인간 완성을 위해 하나님을 받아드리거나 해야 합니다. 최초에 낙원에서 살던 인간은 완성된 존재였읍니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읍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빚어져 지어졌기 때문에 완성된 인간이었읍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들을 완전하게 만드셨읍니다. 땅과 바다도, 풀과 나무도,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들도 하나님은 완전하게 만드셨읍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완전하게 창조되었읍니다. 완전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낙원에 합당치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읍니까? 우리는 부족하지 않읍니까? 어떻게 보면 형편없는 존재들이 아닙니까? 이것을 어떻게 극복해야 합니까? 

    우리는 이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존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 의지할데 없이 이제는 당신께로 갑니다. 두손들고 갑니다. 내 모습을 받아 주십시요. 이제 의지할 곳은 당신밖에 없읍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맡기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의지할데 없어 할 수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위해 길을 예비해 두셨읍니다. 우리의 미완성의 원인인 죄를 위해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를 준비하셨다가 그 피를 흘려서 우리의 더러움을 씻어주셨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성령 하나님을 우리의 곁에 두셨읍니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완성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성을 도우십니다. 우리의 결핍된 의지를 도우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정신력을 강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연약한 육체에 힘을 북돋와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완성을 채워나가게 도와 주십니다. 이제 우리에게 가능성의 문이 열리게 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은 동물적인 것에서 벗어났읍니다. 자신의 본능대로 움직이지 않읍니다. 미완성을 채워가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찐대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든지,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는 일마다 이제는 모든 것들이 주를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7-8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해 주고 있읍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말씀을 맺겠읍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생각없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채 말씀을 대했다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살았다고 하더라도 감정적이고 즉흥적이었을 것이고, 말씀과 상관없이 살았다면 그것이 더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를 모르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읍니다. 나는 무엇인가를 진실하게 물으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설 자리에 서고, 앉을 자리에 앉고, 마땅히 최선을 다하는 곳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윤리를 찾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여러분들의 존재를 채우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일마다 다 주님을 위한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근로자는 현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주부는 가정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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