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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누가복음 11:33-36/ 눈과 빛 [주일낮]
  • 조회 수: 1043, 2013.10.07 07:02:47
  • 우리는 빛과 눈과 환경의 삼각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눈은 빛이 반사해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우리 몸으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해서  우리 머리 속에는 환경에 대한 정보들이 들어오고 이에 의해서 우리의 행동이 결정되어 집니다. 내가 무엇을 치울 것인가, 말 것인가, 무엇을 잡을 것이며, 어디를 잡을 것이며, 어느 방향으로 갈 것인지 눈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들을 종합하여 마침내 행동이 결정됩니다. 빛, 환경, 그리고 눈 이 세가지는 우리의 삶에 아주 보편적인 요소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요소 중에서 빛도 늘 항존하는 것이고, 환경도 꼭 있는 것이지만 볼 수 있는 눈은 그렇지 않읍니다. 그렇지 않읍니까? 빛이 없는 경우가 있읍니까? 물론 비오는 날이든, 흐린 날이면 빛이 없다고 할 수 있읍니다. 또는 찰흙같이 어두운 밤이면 빛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그러나 엄격이 따지면 빛이 없는 것이 아니라 빛을 차단하는 구름이나 달과 같은 유성이 있는 것이지 빛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산이 있고, 강이 있고, 사람이 있고, 집이 있고,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과 사랑스러운 것과 혐오스러운 것 등등의 온갖 사물들이 우리를 애워싸고 우리가 보고, 정보를 얻고, 처신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경을 적절히 사용하여 사랑스럽고, 예쁘고, 아름다운 것, 유익한 것은 가까이 두고, 만지고, 느끼고, 사용하고, 더러운 것, 추한 것, 혐오스러운 것은 치우고, 버리고, 태우고, 멀리하는 등의 처신을 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하는, 혹은 그러한 정보를 얻는데 힘든 사람들이 있읍니다. 소경이 그렇고, 눈에 안질과 같은 질병으로 인해 정확하게 볼 수 없는 사람들이 그렇읍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에게는 빛이 있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읍니까? 전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바로 이를 일컫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빛과 눈의 관계로 비유를 삼아서 복음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도가 있읍니다. 빛은 복음이라고 해도 좋고, 주님 자신이라고 해도 좋읍니다. 복음이 온 세상에 들려진다는 말은 주님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고 하는 말과 동일한 내용입니다. 복음이, 혹은 우리 주님이 빛으로 비유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 주님이, 또한 복음이 보편적이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복음이 구라파에만, 미국에만, 우리 대한민국에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검은 대륙 아프리카에도, 동토의 땅 북한에도, 소련에도, 중공에도, 만년설의 극지방에까지도 주 예수의 복음이 들려져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읍니다. 어느 곳에나 빛이 가는 것처럼, 어느 곳에서나 빛이 있는 것처럼 복음의 빛과 그 혜택이 어디에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위해서 검은 대륙에도, 오지에도, 동토의 땅에도 복음을 증거하러 선교사들이 들어가고 있읍니다. 이를 표현한 말씀이 33절에 있읍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듯이 복음이 누구에게나 들려질 수 있도록 어느 곳에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신자로서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눈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눈은 빛을 받아들이듯이 복음의 빛을 받아드리는 눈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복음의 빛이 높이 떠서 우리에게 비취고 있는데 우리 마음이 그것을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이 빛을 받아들일 때, 우리 마음 속에는 복음의 빛에 조명되어진 바 여러가지 세상의 상들이 그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는 눈이 문제입니다. 눈이 정상적이라면 가릴 것 없이 모든 빛을 받아 들이 겠지만 눈에 이상이 있다면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보다 앞에 있는 내용은 완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유대인들과 예수님이 대치해 있는 상황을 묘사해 주고 있읍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가지고 한 벙어리 귀신을 내어 쫓았는데, 무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일을 보고 기이히 여겼으나 그 중에 어떤 유대인들은 오히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삐딱한 눈으로 보고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하며 기가 찬 말을 하는 것입니다. 또 “더러는 이것으로는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믿지 못하겠으니 우리가 분명히 믿겠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 보아라”는 식으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했읍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 악하고 완악한 세대에는 요나의 표적밖에 보일 것이 없다고 일축하시고는 33절-36로서 그들의 완악한 마음을 꼬집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시간을 같이하는 것 만큼 피곤한게 없읍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보면 태어날 때부터 새끼줄을 삶아먹었는지 늘 그 마음이 비비고여 있읍니다. 사실 보면 별 문제가 없는데 어떤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어떻고 저떻다느니, 어떤 사람을 보면 그렇고 그렇다느니 늘 부정적인 말로 기분을 언잖게 하고 분위기를 어색하게 하는게 취미인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몰라요. 우리가 최선을 다해 살아도 우리 두뇌의 5%도 제대로 다 사용하지 못하고 인생을 끝낸다고 하는데, 하물며 그렇게 안된다, 못된 인간이다는 등등의 부정적인 말만 하는 것을 보면 그 인생 알만하다고요. 예수님이 눅 11장에서 만난 유대인들, 정말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들을 그렇게도 많이 보고서도 귀신의 힘을 빌어서 그렇다느니, 또 다시 한번 표적을 보여달느니 등등... 이게 정말 피곤한 일이라고요. 이게 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들이 복음의 빛을 받아들이기에 많은 방해물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욕심과 탐욕에서 마음을 비웠다면 그 마음이 복음의 빛을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눈과 빛의 관계로 비유를 삼아 이 유대인들을 책망했읍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읍니까?

    첫째, 어두움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교훈입니다. 비록 휘황찬란한 샹드리에의 빛 속에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영혼을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는 육신의 눈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의 눈이 있고, 지성의 눈이 있고, 심미안이 있고, 양심의 눈이 있듯이 우리에게는 영혼을 바라보는 영혼의 눈이 있읍니다. 누구나가 이 영혼의 눈을 소유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이 영혼의 눈을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의 빛이 비취어지고 있어도 이 영혼의 눈이 뜨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읍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영혼의 눈이 뜨이게 되고 이 복음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영혼이 이 빛에 대한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장님이 얼마나 빛 보기를 원합니까?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빛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색깔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나무가 초록이라느니, 하늘이 파랗다느니, 무지개의 색깔이 아름답다느니 등등의 온갖 귀를 솔깃하게 하는 내용들이 이야기되어집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정말 미칠 지경이 됩니다. “아 너무 너무 보고싶다. 나무가 보고 싶고, 하늘이 보고싶고, 무지개가 보고싶고 ....”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보고싶어 미칠 지경이 됩니다. 헬렌킬러 여사가 얼마나 보고싶었으면 ‘내가 만약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유명한 수필을 썼겠읍니까? 그러나 육신적으로 타고난 장님은 보고싶은 열망만으로 볼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영적인 장님은 그렇지 않읍니다. 그 영혼이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성령 하나님의 내적 조명을 통하여 영적인 눈이 뜨이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선한 욕심이 모든 것을 가지게 됩니다. 그 영혼이 보고 싶을 때, 눈을 뜰 수 있고, 듣고 싶을 때 귀가 열리게 되고, 모든 축복을 간절히 사모하므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축복에 욕심을 가지고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히 열망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우리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교훈입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뜨고 있다고 할 때 주로 그것은 우리 마음의 문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이루고 있는 가장 중심센타가 바로 이 마음입니다. 이 마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고, 또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이야기 할 때 이 마음 속 말고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음은 인간 전체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경이 이 마음을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있읍니다. 이 마음에 있는 영혼의 눈이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보이게 되고 복음의 빛을 받아들였는데, 문제는 이 받아들인 복음의 빛이 우리의 마음 속에서 희미하게 되고, 어둡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권하고 계십니다. 왜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빛이 어두워집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복음의 빛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늘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있기 마련입니다. 빛이 지나가는 곳에 방해물이 있다면 그곳은 어두움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온 복음의 빛이 차단되지 않고 우리의 전 영혼을 비추어야 하는데 우리가 마음 속에 복음의 빛을 가리우는 방해물을 들여놓기 때문에 곧 잘 복음의 빛이 지나가는 곳에 어두움이 생깁니다. 여러가지 마음 속에 둔 편견과 이기심과 오류와 게으름과 교만과 세상의 탐욕 등등이 복음의 빛을 어둡게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마음 속에 쌓여있는 죄악들을 청산하지 않을 때 복음의 빛이 차단되어집니다. 우리의 마음의 죄악은 마치 우리 눈의 백내장과 같아서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빛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차단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이 조명해 주는 빛의 해택을 받고 살려면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온갖 종류의 편견과 교만, 탐욕, 게으름 등등의 좋지 못한 습성들을 들어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마음속에 퍼져가는 죄를 없애야 합니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복음의 빛을 차단할 온갖 종류의 방해물들을 찾아내어서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정상적으로 눈이 복음의 빛을 받아 들일 때 우리가 어떤 삶을 살겠읍니까? 그것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옵니다. 복음은 철저성이 있읍니다. 애매모호한 것은 복음이 될 수 없읍니다. 왜 그렇읍니까? 복음이 빛을 발하는 곳에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 드러난 더러움을 보고 어느 누가 가만히 있겠읍니까? 어두움에 있을 때에는 비록 썩는 냄새나 고약한 냄새가 나도 그저 그렇거니 하며 태연히 있지만 막상 날이 새고 그 모든 것이 눈에 드러나게 되면 우리의 비위가 그것들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의 실상을 비추어줍니다. 그리고 우리가 청소하지 않으면 않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우리의 삶을 청소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을 청소하게 되고, 우리의 관계를 청소하게 되고, 우리의 사업을 청소하게 되고, 내 인격을 청소하게 되고, 내 습성을 청소하게 됩니다. 복음의 빛이 비췰 때 이렇게 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고, 주님의 피가 그 모든 더러움을 씻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의 빛은 아름다운 것을 더 빛나게 해 줍니다. 장님이 이때까지 말로만 들었던 모든 아름다움을 보게 될 때 그 아름다움은 누구의 것 보다도 더 아름답읍니다. 이때까지 세상에 빠져서 귀한 줄 몰랐던 것들이 복음의 빛에 반짝거리면서 다가올 때 그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읍니다. 이전에는 은혜가 뭐길래, 사랑이 뭐길래, 봉사가 뭐길래, 인내가 뭐길래, 희생이 뭐길래 했었는데...복음의 빛이 비취게 되니까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빛이 높이 떠 있는데 아직도 영혼의 잠을 자고 계시는 분이 있읍니까? 어두움 속에서 두려움에 떠시는 분들이 있읍니까?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마음의 창을 열고 복음의 빛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우리의 마음에서 들어내고 우리의 모든 삶을 복음의 빛에 조명받도록 합시다. 복음의 빛이 우리의 인생을 청소하게 합시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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