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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27:11-26/ 내가 어떻게 하랴? [주일낮]
  • 조회 수: 709, 2013.10.07 07:07:06
  • 헤르만 멜빌의 ‘백경’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신 적이 있읍니까? 세계 10대 소설 중의 하나로서 미국의 아버지들이 집을 떠나는 아들의 배낭속에 넣어주는 책입니다. 이 소설 속에는 하얀 고래를 잡기 위해 자신의 삶을 던져버린 한 인간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읍니다. 에이허브 선장은 대단한 모험가였읍니다. 왜냐하면 그가 탄 배는 비길데 없이 낡은 배였고, 그 역시 한쪽 다리만 가진 불구자였지만 그는 악과 허위를 상징하면서 인간의 삶을 근원적으로 파괴시키는 하얀 고래를 잡기 위해 그의 삶을 불태웠기 때문입니다. 그를 옆에서 돕고 있는 항해사는 그 사나운 고래를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생명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에 포기하는 것이 백번 잘하는 것이라고 필사적으로 만류했지만 에이허브 선장의 태도는 확고부동했읍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눈초리, 한없이 강직한 정신, 굽히지 않는 자의식, 결국 그 선장은 하얀 고래와 싸우다 죽고 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에이허브 선장이 패했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그렇지 않읍니다. 그는 비록 고래와의 싸움에서 패해 그 육신이 푸른 바다 속으로 사라졌지만 자기와의 싸움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았읍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과의 싸움에서 흔들리는 자기 자신,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겁함을 극복할 수가 있었으며 생을 건 인생 승부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두려움을 극복하며 참되고 진실된 것을 추구하는 삶은 아름답고 멋진 것입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펼칠 수 있는 용기야말로 인생 최고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결국은 더없이 초라한 인생의 누추함을 보여주는 한 인간의 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바로 빌라도라는 인물입니다. 그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멸시하고 거부해야 할 인간상이지만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가 가장 되기 쉬운 인간상이기도 합니다. 빌라도,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하여야 옳바르게 행하는 것인가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어떻게 하랴?”하는 질문으로 괴로와하다가 결국은 옳바른 것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릇된 것을 택함으로서 그 영혼이 파국의 길을 걸어가게 된 인물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빌라도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매 순간 결단하고 선택하여야 하는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어떻게 결단하고 대처해 나갈 것인지를 배우고 교훈받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읍니다. 

      무리들이 예수님을 결박해 와서 빌라도의 법정에 세우고는 빌라도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이 결코 죄가 없음을 발견하게 되어졌읍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유대인의 총독이라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소문을 들어서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총독이라는게 무엇입니까? 총독은 제국의 식민지 지역에 파견되는 고위 관리입니다. 그의 책임은 식민지 지역에 파견되어져 모든 소란들을 잠재우고 제국의 정부에 절대 복종하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문제의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반란을 꾀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사전에 발견하여 조치를 강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총독의 신분인 빌라도에게 예수님에 대한 정보가 사전에 이미 입수되어졌을 것이라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빌라도가 얻은 정보와 법정신문의 결과에 의하면 예수님은 결코 죄가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 지도자들의 미움을 사고 있기 때문에 고발당한 예수님을 그대로 무죄방면할 수는 없는 일이었읍니다. 유대지도자들의 비위를 거스리면 빌라도가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죄가 없었고, 죄가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을 수는 없는 일이고 그의 양심도 이를 허락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의 아내 조차도 예수를 해롭게 하지 말라고 간절히 부탁한 일도 있읍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궁여지책으로  그 당시의 명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풍습을 쫓아 포악한 살인  범법자 바나바와 예수 중에 누구를 놓아주면 좋겠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었읍니다. 이러한 빌라도의 물음 이면에는 예수를 풀어주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나타나 있었읍니다. 물어보나마나 바나바는 민심을 흉흉케 하는 포악한 살인 강도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틀림없이 예수를 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요청은 전혀 상식이하입니다. 살인을 한 일도 없고, 누구도 괴롭힌 일이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반사회적인 포악한 살인 죄수 바나바는 풀어주라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당황했읍니다. 도데체 이해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그렇게도 자기네들이 선민이라고 자랑하는 이 유대인들이 어떻게 이렇게 분별력이 없고, 야만적이고, 미개하고, 비겁한 모습으로 죄없고, 나약한 한 인간에게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 잘못하면 판단력을 잃고 민란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괴로워하면서 무리들에게 묻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하랴? 정말 빌라도로서는 괴롭고 고뇌에 찬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자니 양심이 괴롭고, 예수님을 풀어주자니 무리들이 민란을 일으킬까 두렵고.....“내가 어떻게 하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빌라도의 고뇌에 찬 질문이 이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말씀의 진리대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의 입에서 신음처럼 나올 수 있는 모든 질문들을 대표한다고 봅니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분명하게 옳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잘한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읍니다. 둘째는 모든 행위와 말과 생각이 악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이 많이 있고, 또 이러한 사람들에게 할 말은 많이 있지만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볼 인물은 아닙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악과 선의 경계선에서 고뇌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 세번째 유형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유형의 사람들은 늘 아슬 아슬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악하지는 않읍니다. 그러나 늘 주변의 상황과 환경에 이끌리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망설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망설입니까? 왜 옳은 길에 서지 않읍니까? 내가 어떻게 할꼬? 어떡하기는 어떡해요. 몰라서 묻읍니까? 여러분이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묻는단 말입니까? 이미 우리의 양심이 정답을 말해주고 있지 않읍니까? 하나님 앞에서 정말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이 일을 하자니 세상적인 유익과 즐거움을 잃어버릴 것만 같고 하지 않을려고 하자니 신앙의 양심이 괴롭고...그래서 우리는 주저 주저하면서 고뇌에 차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어떻게 할꼬?” 그러나 여러분, 진리에는 결코 물음표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에는 물음표가 없읍니다. 진리에는 이것은 해야한다, 이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명제만 있지 이것을 해야하나? 하는 식의 질문은 눈을 닦고 찾아봐도 없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를 행하는데 물음표를 던진다면 그것은 이미 진리를 행하는 것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진리를 행하는 데에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몇년 전에 대학생들의 분신자살로 사회적인 문제가 된 적이 있읍니다. 많은 젊은 지성인들이 암흑과 같은 이 나라에 한줄기 빛의 씨앗을 심겠노라고 하면서 꽃같은 생명에 불을 붙여 공중에 띄웠읍니다. 이들의 어이없는 죽음을 바라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슬퍼하고 어떤 사람들은 분노했읍니다. 저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들의 젊음이 아까왔읍니다. 저렇게 목숨을 바치지 않아도 될텐데...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가졌읍니다. 자신이 옳다고, 자신이 진리라고 믿었던 것에 생명을 던질 수 있는 그 용기야말로 얼마나 멋진 것인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흔들림이 없이 생명까지도 바칠 각오가 된 인생은 참으로 용기있고, 멋있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념을 불태우고 행할 수 있는 용기가 아름답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성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겠읍니까? 우리가 외적으로는 외소하고 더없이 나약해 보이지만 마음 속에 믿음을 불태우면서 목에 칼이 들어와도 흔들림이 없이 말씀의 진리를 지켜나가는 삶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세상이 우리를 감당하겠읍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하겠읍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에서가 순간의 배고픔 때문에 장자의 특권을 팔아버린 것처럼 세상의 작은 유익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진리를 저버립니다. 세상이 주는 유익이 그렇게도 좋단 말입니까?   여러분이 이 짧은 세상을 아무리 제미있게 산다고 해도 그 인생이 얼마나 오래 가겠읍니까? 시편 기자는 우리의 년수가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고 하더라도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쉽게 흘러가서 마치 우리가 제트기에 타고 날라가는 느낌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생은 왔다가 빨리 사라지는 아침 안개와 같다고 했읍니다. 이러한 인생에 재미를 느껴봐야 그 재미가 얼마나 더하겠읍니까? 그 짧은 재미 뒤에는 수치와 부끄러움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너무 쉽게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결코 공짜가 없읍니다. 다 하나님 앞에서 셈할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이 세상의 사탕발림과 같은 짧은 유익을 택하지 않고 장차 영원히 있을 풍성한 유익을 위해 진리를 택했기에 많은 고난을 받았읍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렇게 하셨고, 주남선 목사님이 그렇게 하셨고, 손양원 목사님 같은 분들이 그러했읍니다. 그러나 그들의 세대는 너무나도 빨리 흘러갔읍니다. 그들 세대에서 세상의 재미를 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읍니까? 다 지옥의 불타는 쓰레기가 되어졌읍니다. 그러나 진리를 지킨다고 목숨을 초개처럼 불태운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은 이른 새벽녘의 샛별처럼 역사 속에 빛나고 있고, 우리의 마음 속에 밝게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도 그들이 쓸 황금 면류관이 별처럼 아름답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행하기에 주저하지 맙시다. 

    말씀을 맺겠읍니다. 빌라도는 “내가 어떻게 하랴?”라고 고뇌했지만 결국 악한 길을 택하고 말았읍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만 진리에는 물음표가 없읍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내가 어떻게 하랴?” 하고 선과 악의 갈림길에서 고뇌하고 있읍니까? 왜 주저합니까? 왜 질문합니까? 이미 우리의 갈길이 정해져 있지 않읍니까?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좋은 대답이 하늘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의 양심이 여러분에게 말하는 바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만약 어떤 진리를 행하는데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질문이 터져 나온다면 그것은 모두 사탄의 짓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질문으로 바꾸어서 아담을 넘어지게 한 것이 사탄이듯이 말씀이 명령하는 바를 질문으로 바꾸는 짓은 사탄이 하는 짓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교묘한 유혹에서 벗어나 주저함이 없이 말씀을 실천함으로 여러분의 삶이 확고부동한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작은 유익에 여러분의 영적인 유업을 파는 일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감히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대장부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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