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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난_히브리서 4:14-16/ 주님이 받으신 고난, 그리고 그 열매 [절기]
  • 조회 수: 614, 2013.10.07 07:17:21
  •  실패를 경험한 지도자와 승승장구 출세의 가도만 달려온 지도자와의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가지를 꼽는다면 인간미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승승장구 출세의 길만을 달려온 지도자는 실패한 자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를 뼈저리게 경험한 지도자는 부하가 실패했을 때 그 아픔을 알고, 그를 어떻게 위로해줄지를 알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3장에서 고난받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는 고난받은 까닭에 고난받는 다른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 4장 14-16절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의 의미와 그 열매를 아주 잘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평성교회 믿음의 한 가족 여러분, 이번 돌아오는 한 주간은 온 교계가 주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신 고난주간으로 지킬 것입니다. 고난주간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께서 받으신 고난에 우리가 함께 동참한다고 하면서 한 두끼, 혹은 하루 이틀의 금식을 한다든지, 아니면 단순히 즐거운 일들을 피한다든지 하는 것에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는 주님이 받으신 고난이 나에게, 우리 인류에게 어떤 의미와 어떤 열매가 있는가를 확인하고 그것을 우리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 모두 함께 주님의 고난과 그 고난이 우리에게 준 열매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먼저 14절에 보니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말씁합니다. 그분은 바로 승청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 구약시대에는 성직과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두가지 직책이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선지자요, 다른 하나는 제사장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서 하나님의 편에서 인간을 가르치고 책망하는 직분이라고 한다면 제사장은 인간의 편에서 하나님께로 중재의 제사를 가지고 나아가는 직이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렇기에 선지자에게 있어서 인간은 늘 오점의 덩어리로만 나타납니다. 이 오점덩어리인 인간에게 선지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책망, 책망, 그리고 또 책망뿐입니다. 이런 선지자에게서 따뜻한 인간미는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어떻습니까? 우선 히브리서 5장 2절말씀을 한 번 읽어보도록 합시다.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따르면 제사장은 인간의 모든 면을 알고 이해합니다. 인간의 연약도 이해하고, 인간의 무식도 이해하고, 인간의  간사함, 인간의 패악함....인간의 그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합니다. 왜? 왜 그렇습니까? 자기 자신도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인간의 연약함과 죄와 함께 희생제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리고 중보의 제사를 합니다. 이것을 책임지는 성직이 바로 대제사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의 역할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드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간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의 이러한 역할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볼 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당신의 대제사장 직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땅 위에서 기꺼이 고난의 쓴 잔을 마셨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관련하여 흔히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그 앞뒤의 짧은 시간들만을 생각하기 싶지만 사실은 주님의 생애 그 전체가 주님의 고난에 포함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이 고난이었고, 주님의 생애가 고난이었고, 마침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은 고난의 극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고난을 3단계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으 것입니다. 


    첫째, 주님에게는 그분의 탄생 그 자체가 바로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귀하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나시었습니다. 주님의 탄생에게서 인간적인 그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마른 땅의 가지처럼, 연한 순처럼 인간적인 그 어떤 흠모할만한 것이 눈꼼만큼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로 나신다든가, 권력가로 나신다든가, 아니면 그 어떤 철학자로 나신다든가 해서도 우리 죄를 위해서 충분히 죽으실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왜 하필이면 천하게 나셔야 했습니까? 

      여러분, 세계 나라 나라마다 부유층은 10-20%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머지는 평범한 소시민들과 뼈를 깍는 가난의 고통을 겪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부유층이 다수의 가난한 자들을 대표하고 대변할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많은 지도자들이 부유층에서 나와서 가난한 자들을 대변한다고 떠들어댑니다. 특별히 민주주의가 발전되지 않은 후진국일수록 더 그렇습니다. 어떻게 부유한 지도자들이 가난한 자의 아픔을 알고 이해하겠습니까? 이것은 참 지도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가장 미천한 자의 신분으로 이 땅위에 탄생하셔서 모든 인류를 끌어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이 우주의 주인이시므로 부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탄생에서 보여주었듯이 주님은 또한 가난한 자들의 주님이시기도 합니다. 지혜의 근본이시기에 모든 현자들의 주님이실뿐만 아니라 미천한 자로 나셔서 모든 무식한 자들의 주님이 되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로서 모든 권세자의 주님이실뿐만 아니라 가장 미천하게 태어나셔서 모든 피지배자들의 주님이 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끌어안는 모든 이들의 주님되심이 바로 그분의 탄생의 의미인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생애 또한 주님의 고난입니다. 태어나자마자 해롯왕의 위협이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일개의 왕에게 생명의 위혐을 받다니 그럴수가 있습니까? 뿐만아니라 애굽으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자라면서 모든 율법의 요구에 순종해야만 했습니다. 사탄의 시험도 받아야 했습니다. 배고픔과 피곤함을 겪어야 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기와 질투,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비웃음을 받았습니다. 가족들로부터도 빈정거림을 받아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제자들로부터도 버림받아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가 겪는 아픔들을 이해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동정합니다. 우리가 겪는 배신의 아픔을 함께 아파합니다. 우리가 겪는 외로움에 함께 괴로워합니다. 우리가 미움과 시기심과 질투에 눈물흘릴 때 주님도 같이 우십니다. 주님은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한 주님의 고난의 생애를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의 죽으심이 있었습니다. 만왕의 왕으로서 일개 죄인에 불과한 빌라도에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당시 최악의 형벌인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은 죄인으로 죽었습니다. 이 순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모든 죄인들이 이를 비웃었습니다. 그 어둡고 싸늘한 죽음의 그림자 아래 갇히게 되었습니다. 사탄은 마침내 승리의 축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렇게 기나긴 고난의 정점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이 누구를 위한 고난입니까? 단순히 정치 지도자로서 정적들에게 당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가다 배척당한 개혁가, 철학자의 말로일 뿐입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더라.”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분의 슬픔은 우리의 기쁨을 위함이요, 그분의 괴로움은 우리의 즐거움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질병이 우리에게는 건강을 가져다주고, 그분이 받은 미움이 우리에게는 사랑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분의 눈물이 우리에게는 웃음을 안겨다주었고, 마침내 그분의 죽음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신 것입니다. 

      이제 다시 히브리서 4장 14-16절까지로 돌아가봅시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예수를 우리는 믿는 도리로서 굳게 붇잡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15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고 되어 있는데요, 이 말씀의 핵심의 요지는 주님이 죄짓는 것 빼놓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다 경험했으므로 우리를 이해하시고 동정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위해 고난받으시고 마침내는 자신의 몸을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해 대속물로 드렸으니 우리는 그저 그를 믿음의 도리로서 굳게 붇들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제가 말씀에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심자가를 믿음으로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슬픔을 여러분의 기쁨으로 받아드리세요. 그분의 배고픔을 여러분의 배부름으로 받아드리세요. 그분의 질고를 여러분의 회복으로, 그분의 어두움을 여러분의 빛으로, 그분의 죽음을 여러분의 생명으로 받아드리시기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주간의 첫날인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고난 안에 여러분의 승리가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거기에는 미움, 시기, 질투로부터의 승리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여러 가지 갈등으로부터의 승리가 있습니다. 배신으로부터의 승리가 있고, 죄악으로부터의 승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이 고난 주간에, 아니 여러분의 매일 매일의 생애 위에 이 승리의 일기를 적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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