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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린이_신약 에베소서 6:4/ 자녀를 맡은 하나님의 청지기 [절기]
  • 조회 수: 680, 2013.10.07 07:21:28
  • 부모로서 이 세상에 최고의 관심사가 있다면 그것은 자녀의 문제일 것입니다. 이 점은 여러 가지 면에서 증명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유아용품점이나 고급 브랜드의 어린이 의류 체인점들은 불경기가 없다고 합니다. 시내에 쇼핑을 한다고 둘러보면 어찌된 영문인지 어린이들의 의류나 신발류들이 어른들 것보다 더 비싼 것을 보고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없어서 못팔지, 비싸서 못 사가는 경우는 없다고 그럽니다. 자녀교육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부모는 못먹어도 자녀에게 남들이 배우는 것만큼은 다 배우게 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공부를 시킨다고 교육비만 들어갑니까? 다른 친구들과 어울리는데 기 안죽도록 해야지요. 그래서 옷에 신경 써주고, 먹는 것 신경 써주고, 친구, 애인 만나는데 신경 써줘야.... 참으로 엄청난 희생이 뒤따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녀들이 다 잘되기를 바라는 부모들의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내 자녀가 더 편안하고, 더 잘 먹고, 더 잘되는 것이 다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부모의 열심이 반드시 좋은 자녀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내가 참으로 열심히 자녀를 키웠는데 20년, 30년 뒤의 내 자녀의 모습이 바람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위탁받은 청지기들입니다. 훌륭한 자녀로 키우는 것은 우리의 보람이고 기쁨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회피할 수 없는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자녀들의 청지기로서 우리의 본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말씀합니다. 먼저 이 말씀이 오해될 소지에 대해서부터 생각해 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자녀들에게 매질을 하지 말라든지, 책망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또 자녀들은 믿는 부모들에게 이 말씀을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으로 악용해서도 안됩니다. 성경 잠언에 보면 필요한 매질은 반드시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구약시대에 엘리라고 하는 데제사장은 자신의 자녀들을 책망하는 일에 게을리하여 큰 낭패를 당한 인물입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그 당시의 역사적인 문맥을 살펴야 제대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는 어린이들을 바라보는 눈이 인격적이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자녀 교육은 그 자녀가 16세라고 하는 성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는 집안의 노예가 책임을 졌습니다. 그리고 16세가 되기 전에는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기 보다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어린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때로는 자녀를 잔인하게 매질하고, 짐승 다루듯이 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대가 바로 사도바울이 에베소서라는 서신을 쓸 당시였습니다. 아마 주후 60년 전후쯤 때입니다. 어린이들을 매질하지 말고, 어쩌구 저쩌구 하는 어린이 헌장이 우리나라에서는 기껏해야 1900년대에 씌여졌으니까 자녀들에 대한 사도바울의 인식은 엄청나게 앞서 간 것이 틀림없습니다. 

      과거에나 지금이나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지만 옛날에는 자녀를 마치 자신의 소지품처럼 애지중지 했지 하나의 인격체로서 자녀를 바라보는데는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부모의 취미, 부모의 관습, 부모의 문화, 부모의 가치관에 예속당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자녀들은 부모의 문화, 관습 등을 강요당해야 했고, 자녀들의 뜻은 무시당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물질이 없어도, 배가 고파도 살수는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 지속적으로 여러분의 인격이 짓밟힌다면 견딜 수가 있겠습디까? 저는 제가 고등학교때 지리 선생님이 제게 대놓고 한 말 한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그 선생님은 무심코 그렇게 했겠지만 그 한마디가 얼마나 내 인격과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모릅니다. 지금은 제가 목사가 되어서 그분을 용서했습니다. 여러분, 자신의 인격이 짓밟히는 아픔을 겪어 보셨습니까? 

    여러분이 자녀의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 부모인 여러분의 입장만을 주장할 때 자녀들은 인격이 짓밟힘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녀들의 세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계속 빈복적으로 부모인 자신의 세계만을 고집할 때 자녀들은 인격이 짓밟힘을 경험합니다. 내 가치관, 내 문화, 내 전통, 내 관습.... 부모가 나,나,나만 강조할 때 자녀들은 인격이 짓밟힙니다. 이것이 바로 자녀들이 진노하는 때입니다. 여러분, 어른들은 항상 노파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괜히 자녀들이 하는 것을 보면 불안하고, 실수할 것 같고, 못미덥기도 하고 .... 그래서 부모들은 자신의 경험, 자신의 지식, 자신의 생각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부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깊이 배워간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머리모양이 조금 특별하다고 해서, 옷입는 방법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살아가는 방식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그냥 막 되먹어 가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모든 것들은 그저 그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내 자녀의 삶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웃애와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해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해는 관계의 기초가 됩니다. 이해는 대화의 기초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있을 때, 자기만을 강조할 때 모든 것은 깨어지고 맙니다.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런 점이 바로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을까요? 

      그 다음에는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그랬습니다. 주의 교양은 원어로 주님의 훈련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훈련방식은 결국 성경에 나타나는 자녀 훈련방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주의 훈계는 결국 성경말씀으로 가르치라고 하는 것이니까 결국 그 모든 뜻은 성경으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첫째, 성경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녀들에게 가르치는데 철자 한자 한자를 다 외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문지방에도 말씀을 붙여놓고, 벽에도 말씀을 붙여놓고, 손등에도, 이마에까지도 말씀을 붙여놓고 말씀을 공부하라고 합니다. 오늘날도 말씀교육에 대한 유대인의 교육방식은 과거와 똑같습니다. 철자 하나 빠뜨리지 않고 다 외는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을 보면 손목에다 성경말씀을 넣는 케이스를 차고 다니면서 율법을 외웁니다. 집집마다 대문에다 예쁘장하게 장식된 말씀통을 비치해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말씀의 카드를 빼보고는 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들은 자녀들에게 어떻게 성경말씀을 공부하게 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학교공부를 위해 성경교육은 일찌감치 멀리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태도는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우리 자녀들에게 결단코 축복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가르칠 때 우리 자녀들에게 축복이 있습니다. 

     둘째, 신앙생활하는 것을 철저히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도 살펴볼 것이지만 다니엘과 세 친구는 철저한 신앙교육을 받았기에 타국에 포로로 붙잡혀 와서도 당당하게 신앙적인 자세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어릴 때부터 왜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는지 분명하게 가르치십시오. 왜 십일조를 드리고, 왜 술과 담배를 금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합니다. 왜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치셔야 합니다. 어릴 때 가르치지 않으면 그 자녀는 세상 것들을 배워갈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생활하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도 잘 가르쳐야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것에 더 자부심을 느끼도록 가르치십시오. 

      셋째, 욥의 자녀교육을 본받아야 합니다. 욥기 1장 5절에 보면 욥이 대충 어떤 식으로 욥을 교육시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오늘날의 가정예배를 도입시킨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세상에서 때묻고 하나님께 부지중에 범죄하였을까 두려워하여 자녀들을 불러모아서 번제단을 쌓았다고 그랬습니다. 오늘날 자녀들과의 대화시간이 줄어들고, 또한 대부분의 규육적 기능을 학교로, 학원으로 빼앗기고 만 지금, 가정예배는 자녀들을 교훈하고, 자녀들과 영적이고 수준있는 대화를 나누기에 더 없이 좋은 제도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들 가운데서 이 가정제단을 쌓는 가정이 몇 가정이 됩니까? 

      마지막으로 자녀들을 교육하되, 근시안으로 교육하지 말고 멀리보며 교육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자녀들을 교육할 때 우리의 시야가 아주 좁습니다. 아이들이 부모 품에 있을 때 1등하다가 사회에 나와서 꼴찌하면 뭐합니까? 그런데 그저 내일 볼 시험에서 1등이 중요한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부모로서 우리는 2-30년 앞을 내다보면서 자녀를 키워야 하는데, 바로 내일, 그것도 아니면 바로 한달, 일년 뒤를 보면서 내 자녀를 키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내 자녀가 내일 시험에서 1 등을 받아오면 정말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좋은 것입니까? 내 자녀보다는 내가 기분 좋아서 1 등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제가 초등학교 때 공부를 못해서 그런지 초등학교 때 1등하는 아이들 바로 보이지 않습디다. 우리 아이들이 지금 학교에서 적응하느라 참 고생이 많습니다. 요즘 초등학교 생활에 30점, 50점 짜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집 두 녀석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받아쓰기를 하는데 맨 처음에는 0점을 받아 왔습니다. 지금은 30점도 받아오고, 50점도 받아옵니다. 저는 이런 우리 아이들을 대견하게 봅니다.  그 점수가 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벌써 학교에 다니면서 시험을 치는 모습이 귀합니다. 그저 조금씩 자라는 그 모습이 좋더라 이 말입니다. 신앙에서 자라고, 인격에서 자라고, 머리 쓰는 것도 조금씩 자라고.... 이렇게 하다보면 어느새 부모를 독립해서 살아갈 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부모를 떠나 자립하고 주님을 평생 섬기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은 자기들이 결정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들의 가치관, 자기들의 세계, 자기들의 취미에 따라 어떻게든 결정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자녀들을 하나의 인격체, 즉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귀한 인격체로 그들을 대해주지 않으면 자녀들이 분노합니다. 그 분노는 잠재의식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장래에 좋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을 인격체로 존중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을 양육할 때 신앙양육이 세속교육보다 항상 먼저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세속교육은 자기 능력껏 살아가라는 말이지만 신앙양육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의 축복에다 맡기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잘 양육하여 자녀교육에 다 성공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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