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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복음 20:24-29/ 도마의 불신앙과 회복 [주일낮]
  • 조회 수: 449, 2013.10.07 07:22:32
  • 우리가 성경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놀라운 기적을 보여 주어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할까요? 저는 한 때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를 간절히 바란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병도 고치시고, 이적도 많이 일으키셔서 믿음이 없는 자들이 그것을 보고 좀 더 확실히 하나님을 믿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옛날에 제가 어릴 때 저는 어머니를 따라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전도집회에 참여하러 서울에 올라갔었습니다. 그 때 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했습니다. 제 옆에 계시던 분은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분이 눈을 뜨는 기적을 목격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걸음을 걸을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집회에 참석하고 걷게 되었습니다. 어린 제 마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곧 얼마 못가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하나님을 버리고 적극적인 불신앙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이적이 저를 견고한 신앙으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부자가 지옥에서 거지 나사로를 자기의 살아있는 다섯 형제에게 보내어서 전도를 하게 해 달라고 아브라함에게 부탁합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세상에서 모세와 여러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난나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요. 모세와 선지자들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컷는 것입니다. 눅 24:27에는 성경을 가리켜서 모세와 선지자의 글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모세와 선지자, 즉 성경을 믿지 않으면 비록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도 주님은 비슷한 방식으로 제자들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 한 번은 두려워하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시어서 못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시면서 주님의 부활을 증거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기뻐하며 주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 내용은 20장 19절부터 2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도마는 이 자리에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여러분,  남들이 다 받아 누리는 축복의 자리에 우리가 빠진다면 얼마나 서운한 일입니까?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받는 그 자리에 없었기에 다른 제자들이 받은 축복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축복의 자리에서 제외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축복의 모임에 여러분들이 다 참석하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이 얼마나 복된 자리입니까? 말씀의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내려주시는 자리가 아닙니까? 여러분들, 히브리서 10:24-25 말씀처럼 모이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한두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일 오후에, 혹은 수요일 저녁에, 혹은 구역예배에 남들이 받는 축복을 내가 받지 목한다면 정말 서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주님이 수요일 예배 중에 오실지 누가 압니까? 혹시 주님이 주일 오후예배 때 오실지 누가 압니까? 주님께서는 교회를 그의 신부라고 말씀합니다. 교회는 개인적이 아닙니다. 신앙으로 함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단체를 교회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재림 때 그의 신부를 부를 때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 교회 전체가 주님께 들림을 받습니다. 저는 그 들림을 받을 때가 우리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그 때가 주일 낮예배 때이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일 낮 예배때가 가장 성도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누가 압니까? 주일 오후가 될 수도 있고, 수요일 저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새벽기도회도 될 수 있고, 금요일 구역예배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시와 때는 아버지만이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깨어있어 항상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비단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면에서 뿐만 아니라 공적인 예배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자리요, 은혜를 배푸는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에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도마처럼 축복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빠졌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증거하는 말도 부인했습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옆구리의 창자국과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예배시간은 주님을 증거하는 자리입니다. 예배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푸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 빠진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바로 불신앙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두 번 예배에 빠지기 시작하면 목사인 저의 말이 시시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처럼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들이 받은 은혜에 감격하며 기뻐하는 이유를 모를 것입니다. 바로 도마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말씀이 아닌 세상의 소리들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신앙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줄 아십니까? 바로 예배의 불참석에서부터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성장을 위해 꼭 공적인 예배모임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한편 이러한 불신앙에 빠진 도마에게 주님께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못자국이 난 손과 발, 그리고 창자국이 있는 허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29절 말씀을 같이 읽으십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예,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믿지 못할 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보여 주십니까? 도마에게 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친히 나타나서 그렇게 해 줍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도마는 12 사도들 중의 하나입니다. 엡2:20 말씀에는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세운 교회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터라고 그랬습니다. 터가 흔들리면 어떻게 됩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한다면 초대교회에 큰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도마가 12 사도 중의 하나인데 그가 주님의 부활을 부인하면 불신자가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받아드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의 불신앙을 바로 세워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도마처럼 그렇게 요구한다면 답변은 한결같습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주님을 보고 믿었다면 우리는 말씀 안에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그의 섭리에 대해서, 우리의 구원 계흭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종말에 대해서 등등... 모든 것을 성경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이 아니라도 자연을 통해서,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지만 하나님은 거기에다 성경이라는 특별계시까지도 우리에게 주셔서 자세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상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도마에게는 주님이 오셨다면 우리에게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직도 하나님에 대해서 믿지 않으십니까? 성경을 찬찬히 읽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깨닫으십시오. 베뢰아인은 참으로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들으면 그것이 그런가 하여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삼고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곰곰히 말씀을 살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축복을 받는 공적인 예배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불참은 결국 불신앙과 의심을 가져 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불신앙하는 자리에까지 왔다면 빨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그 분의 뜻을 분별하셔서 신앙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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