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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시편 41:01-13/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 [시편]
  • 조회 수: 594, 2013.10.26 18:18:07
  • 이 시는 시편 저자가 어려움, 더 구체적으로는 병상에 누워 있을 때의 심정을 토로한 내용인데, 자신이 병약한 상태에 있을 때 모든 사람들, 심지어는 절친한 친구들까지도 자신을 힘들게 함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내용적으로는 1-3절까지 빈약한 자를 돕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기원하였고, 4절은 병상에 누워있는 자신에 대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비는 내용, 5절에서 9절까지는 어려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악담하는 대적들, 겉으로는 위로하는 척하나 자신들의 유익을 위해 더 악화되며 심지어 죽기까지 바라는 정적들, 그리고 악화된 소문으로 소망을 잃어버리게 되자 심지어는 심복들까지도 곁을 떠나려고 하는 모습들에 배신감을 느끼는 심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서 13절까지에는 이런 처지를 보며 병상에서 일어나는 것만이 이 모두에게 보복하는 길이며,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첫째, 다윗도 병상에 있었을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젊었을 때가 아니라 왕이 되고, 권세를 쥐고 있을 때 겪었던 것이라 짐작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 시편의 내용들을 보면 다윗이 병상에서 죽으면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6절에 보면 병문안을 왔다가 가서는 죽을 때가 다 되었다고 악담과 소문을 퍼뜨리는 악한 신하들의 모습을 상기하게 됩니다. 다윗만큼 권세가 탄탄하고 권세를 누린 왕은 없습니다. 그런데 또 다윗만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많이 겪은 사람도 없어 보입니다. 자녀들 간에 벌인 살인전쟁, 자녀와 아버지가 맞서는 기가 찬 이야기, 자녀들 간에 일어난 근친상간.... 젊어서는 사울과 전쟁했고, 왕권이 든든해졌을 때에는 자녀들과 전쟁을 치렀습니다. 자녀들까지도 이 모양이었으니까 신하들은 어떠했겠습니까? 이런 환경에다가 다윗이 거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그런 질병까지도 겪었으니 다윗만큼 고난의 길을 걸어온 사람도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비단 다윗 뿐이겠습니까? 우리 눈에는 평안해 보이고, 순탄한 길을 걸어가는 듯 해 보이는 사람들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다 어려움이 있고, 고통, 힘든 일들이 있습니다. 복음송 중에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원망하지 말아요” 라는 찬양이 있는데..... 그래요. 사람들 마다 고난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화려해 보이는 그 이면에도 눈물이 있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떤 사람은 왜 나에게만 이런 어려운 일이 생기느냐 하면서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는 것과, 또 어떤 사람은 애써 고난을 감추고, 긍정적이 되고, 씩씩하게 살아볼려는 의지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처지가 바뀌지 않습니다. 어려움이 예수 믿는 사람을 피해가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신앙으로 이런 어려움들을 다루어가며 기술을 익히며 기쁨과 평정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큰 파도는 해변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위험합니다. 그리고 즐거움에 대한 방해물입니다. 그러나 큰 파도를 거칠게 다루며 윈더 서핑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파도는 즐거움입니다. 똑 같은 파도이지만 차이가 그렇습니다. 고난을 다루어 기쁨을 얻는 성도들이 됩시다. 아-멘?

     

     둘째, 다윗이 어려움 처지에 있어 봄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1-3절의 내용은 어려운 자를 돕는 것은 복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구체적으로 1절에 보면 어려운 자를 도울 때 하나님께서 재앙의 날에 그를 도울 것이다. 2절에 보면 약한 자를 돕게 되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세상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원수도 그를 해하지 못할 복을 받을 것이다. 3절에 보면 병중에서도 고침을 받는 복을 받을 것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선 약한 자, 어려운 자를 도우면 이런 복을 받을 줄 믿고 늘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손길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복을 받는 이유는 먼저, 도움을 받는 이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다윗의 기도 때문에 다윗이 어려울 때 도왔던 분들은 다 하나님께 이런 복들을 받았을 줄 믿습니다. 두 번째, 하나님이 보시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눈에 안 보일 리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 눈에 보이라고 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눈에 보이기 위해 선행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윗이 어려운 자들을 돕는 일이 이렇게 귀한 일이며 복받는 일인 것을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다윗은 언제나 강자였습니다. 다윗은 부족함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니 항상 그런 상태로 있으면 다윗에게 빈핍한 자들을 향한 이런 섬세한 감정이 표현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그런 처지에 놓임으로 그런 상황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이유에 대해서 “후에 그런 일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고난을 당하지 않고도 고난을 당하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고난당하는 이들을 이해하시도록 나도 이런 상황에 밀어넣었구나” 하는 시각으로 고난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픈 자가 아픔을 당하는 자를 이해할 수 있고, 홀애비가 홀애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고 홀애비를 이해하기 위해 홀애비가 되라는 말로 받아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셋째, 어려운 처지에 대해서 자기를 살피는 시인의 마음이 4절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런 고통, 아픔, 질병이 자신의 죄 때문에 기인된 것으로 보고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에게 어려움이 올 때 영적으로 한 번 돌아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남들의 고통에는 절대로 이런 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겠지만 나의 고통에는 이런 해석이 유익합니다. 그래야 불평과 원망이 없고, 더욱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아픔 속에서도 품위를 지킬 수 있습니다.

     

      넷째, 어려움에 처할 때에는 사람이 위로가 되지 못함을 5절에서 9절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략 3 가지 군상의 모습으로 다윗 주변의 사람들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완전히 자신을 드러내 놓고 어려운 처지에 빠진 다윗에게 악담을 퍼 붙는 대적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제 뒤질 때가 되었구먼. 그렇게도 잘난채 하더니, 그렇게도 경건한 채 하더니, 지가 믿는 하나님이 그렇게도 좋다며.... 그런데 네 꼴이 그게 뭐냐.... 이런 식으로 대놓고 욕하는 군상들, 둘째는 6절에 나타난 바대로 다윗에게 우호를 가진 채하며 병상에도 오고, 그 병상에서 이 놈이 빨리 죽어야 우리가 지지하는 왕자가 왕이 되고, 우리도 덕을 좀 볼텐데.... 이런 간신배들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왕이 드러눕고, 가망이 없다, 죽을 것 같다는 소문에 빨리 다른 줄을 잡아야 된다고 하며... 다윗 몰래 뒷걸음칠 치는 군상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원통해 합니다. 내가 신뢰하고, 내 떡을 함께 먹던 놈들 까지도 내가 바람막이가 되 줄 것 같지 않으니까 나에게서 떠나가는 그 씁쓰레함.... 이것이 바로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0절에서 13절까지에서 다윗은 인간에게서 하나님께로 눈을 돌립니다. 그저 사람은 저만치서 볼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가까이서 보면 추함이 드러납니다. 냄새납니다. 그래서 사람이야 말로 정말 100m 미인이라는 별명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 보지 않고 사람만 보면 실망합니다. 절망합니다. 배신감을 느낍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하루 빨리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눈을 돌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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