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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시편 08:01-08/ 피조 세계를 바라보면서 [주일낮]
  • 조회 수: 580, 2013.10.26 18:32:36
  • 깊은 숲속에서 길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읍니다. 높게 치솟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숲속에서 길을 잃고 해매다가  문득 문득 나무들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를 들을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이 나겠읍니까? 또 광활한 들판에서 홀로 세찬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때, 또는 높은 산봉우리와 온갖 나무들을 하얏게 뒤덮고 있는 눈이 바람에 휘날리는 장면을 체험할 때, 또는 거대한 물줄기가 쏟아내는  폭포의 물소리를 들을 때, 또는 아무도 없는 바닷가에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구르릉거리며 엄습해 오는 파도를 바라볼 때, 또는 천둥이 쿵쿵 거리고 번개가 번쩍이면서 장대같은 비가 자연을 두두리는 것을 보고 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어떤 느낌이 있을까요? 그것은 내가 태고의 깊음 속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고, 항거할 수 없는 엄청난 자연의 위엄에 마냥 두려워 떨  뿐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자연 앞에 노출된 보잘것 없는 우리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인생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우리가 웅대한 자연의 신비 속에 빠져들다 보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인생이라는 것이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하면서 창조자 하나님 앞에서 황송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8편은 자연의 웅대함과 그 아름다움, 그리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자연의 신비로움 속에 빠져들면서 이 피조세계를 지으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시인의 감정을 노래하고 있읍니다. 1절과 2절까지에서는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그 권능, 그 영광을 떠올리고 있읍니다. 3절에서 8절까지에서는 피조세계를 바라보면서 이 피조세계 안에 있는 비할바 없이 외소한 우리 인생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자연에 비할바 없이 외소한 우리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조물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화와 존귀의 관을 씌우셨다고 감격해 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시편을 함께 생각해 보면서 이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바, 영적인 교훈을 세밀하게 살피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이 시를 쓰게 된 시인의 상황을 먼저 재구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이렇듯 아름다운 시를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사실 팔레스타인이라는 지방이 그렇게 수려한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막의 모래와 먼지바람이 자연환경의 중심을 이루는 이 지역에 뭐 그리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수려한 자연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이 시 전체가 자연을 바라보면서 깊은 감동에 젖어 있는 시편 기자의 느낌을 대변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지금 오스트레일리아의 넓은 대평원에 서 있읍니까? 아니면 남미의 밀림지대에 서 있읍니까? 아니면 그가 미국의 거대한 나이아가랴 폭포수를 바라보고 있읍니까? 그는 단지 사막과 먼지가 많고, 나무가 조금 있는 언덕같은 산, 메마른 땅 여기 저기 서 있는 나무 몇 그루와 몇 포기의 풀밖에 보이지 않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한 부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자연을 감상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읍니까? 그것은 시편 기자의 영적인 민감성입니다. 이 시편 기자의 마음을 우리가 잘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이러한 민감성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그 마음이 사랑과 기쁨과 감사로 가득차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작은 일에도 감격해 할 줄 아는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기뻐할 줄 아는 사람, 감사해 할 줄 아는 사람, 별것 아닌데도 아름답고 멋있는 말로 한편의 시를 창조해내는 사람,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메마르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도 아름답다는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아, 아름답다 그러면 아직 청춘이구만 하면서 철없다는 듯이 쳐다보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최근 들어 길을 걸으시다 가로수에 새 눈이 달린 것을 보셨습니까? 길 옆으로 여리게 피어나는 풀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길을 걸으시면서 한 번 자세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어느덧 성큼 다가운 이 봄의 기운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좋은 자연을 주셔도 가서 밥이나 해 먹고 고기 굽는 냄새나 풍기며 자연을 회손할줄만 알지, 그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아는 지혜도, 하나님을 찬양할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피조세계를 누릴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을 보면 먹을 것을 생각하는지 몰라요. 온갖 아름다운 곳은 식당으로 가극차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 1장 20절에 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읍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해 주는, 말하자면 하나님의 이야기 책이라고 할 수도 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을 사랑하고 아끼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할 줄 아는 그런 영적인 지혜자가 되어야 하겠읍니다.

     

    둘째, 찬양을 통한 인간 승리의 노래가 이 시편에 울려퍼지고 있읍니다. 이 시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다윗은 찬양에 능한 사람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 중에서 다윗보다 더 많은 적을 가진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을 통해 그의 적들에 관해 끊임없이 말씀합니다. 그들은 집요하게 다윗을 둘러싸며 그를 파멸시키려 애를 씁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상황가운데서 적들과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를 잘 알았기 때문에 승리할 수 있었읍니다. 그는 자신의 힘이나 지혜로 대적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이 그와 함께 하기를 간절히 호소했읍니다. 그의 호소 방법 중의 하나는 찬양을 통한 것이었읍니다.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되어 있읍니다.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라고 한 것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찬양으로도 주의 원수를 잠잠케 하고 주의 권능을 세우신다는 말입니다. 자연 세계에서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가장 약한 존재입니다. 이 세상에 약한 동물이 많다고 하지만 젖먹이 어린아이 보다 더 약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저는 어릴 때 옛날 6.25 사변 때 북한 비행기가 지나가면서 피난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총을 쏘아 되는 장면을 영화로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뒤의 장면에 부모가 다 죽고, 젓먹이 아이가 울면서 죽은 어머니를 보채고 있는 장면을 보면서 저 불쌍한 아이가 저렇게 되면 어떻게 살지 하는 생각에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 장면이 얼마나 강하게 각인 되었던지, 지금도 저의 아이들이 편하게 잠든 모습을 볼 때마다 제 머리 속에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왠지 가슴이 찡해지면서 이 아이들에게 제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정말 좋은 아빠가 되야 하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젖먹이 아이는 참으로 연약합니다.  그러나 이 약한 존재들의 입에서 부터 주님을 향한 찬양이 흘러 나올 때 그 찬양이 놀랍게도 적과 원수들의 입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사탄의 입을 봉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적들이 입을 다물게 되고 말 것입니다.

     

    셋째,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대한 노래가 이 시편 전체에 울려 퍼집니다. 광대한 하늘을 보고 수없이 많은 은하계의 별들을 세어보노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우주 가운데 한 점 먼지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보면 지구에 사는 우리 인간이란 존재는 정말 작고, 미미하고, 약하고, 외소한 존재입니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물 한 방울에도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하였읍니다. 이렇게 연약하고 외소한 인간이 대 자연의 한 가운데 놓여질 때, 우리 스스로는 이 자연의 위압감에 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두려움을 느낌니다. 이 두려움은 두가지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 하나는 자연숭배 사상으로 나타납니다. 나무이든, 강이든, 바다이든, 바위이든 인간에게 위압감을 주는 자연은 다 인간의 숭배 대상이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잡다라한 종교가 생겨나게 되었읍니다. 하나같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웅대하고, 위압감이 넘치는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외소한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그것들을 정복하고 다스릴 대상으로 주셨으니까 이 사실이 얼마나 놀랍고 찬양할 만한 일입니까? 이를 시편 3절에서 5절까지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표현해주고 있읍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시편 기자는 우주 가운데 한 점 미미한 인간이지만, 자연 가운데서 지극히 외소한 우리 인간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매우 귀하게 여기시며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계흭하시고 세우신 존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수나 양, 크기 등의 외모로 만물을 측정하지 않으십니다. 그 분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그가 지으신 창조물의 가치를 측정하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 인생에 대하여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읍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 그것이 우리의 가치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그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학대하고, 자신을 멸시합니다. 사람들은 항상 타인이 보는 자기로서의 모습만 남아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남들이 보는 외형에만 치중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외모에 치중하는지.... 오늘날 가장 성업중인 직종이 성형외과 의사라고 합니다. 너도 나도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내 버리고 얼굴, 팔.다리 뜯어고친다고 야단입니다. 성형외과의사가 길가다가 못생긴 여자를 보고 병원에 들어오면 간호사들한테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오늘 나 심봤다”고 그런답니다. 여러분, 얼굴 그것 잘생기면 기분 좋게 살겠지만, 얼굴 못생겼으면 못생긴대로 포기하고 사십시오. 저도 포기하고 산지 오래입니다. 이주일도 얼마나 못생긴대로 멋있게 살다 갔습니까? 가수 조용남, 가만히 뜯어보면 정말 못생겼습니다. 혹시 여기 조용남 팬 있으면 용서하시고 들으세요. 뒷말이 더 중요합니다. 못생겨도 자기 딴엔 지 멋에 사니까 우리도 멋있게 봐주지 않습니까? 여러분, 얼굴 잘생긴 맛에 살면 한 1-2십년 조금 기분 좋게 살겠지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 평생 기쁘고 행복해집니다. 이 것 믿으십니까?


     모든 자연에 비교해 볼 때 우리 인간은 너무나 약합니다. 또 우리 죄로 인해 무익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우주의 중심에 세워 놓으셨읍니다. 이 사실이 피조 세계를 대하는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는 정말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이며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감격스럽고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혼의 힘을 다해 우리의 입술을 벌려 주님을 찬양해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러나 한편 안타까운 것은 이 아름다운 피조셰계 안에서 모든 것이 함께 조화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아름답게 만들고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데 모든 불협화음은 우리 인간에게서 나타나고 있읍니다. 이것은 타락의 결과요,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가 제대로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씻음을 받고 부패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왜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하겠읍니까? 그것은 자연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섭리, 질서가 자연의 파괴로 이루어진 문명의 질서보다 인간에게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깨달은 많은 지식인들이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읍니다. 그러나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치기 전에 먼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자고 외치는 소리가 있어야 하겠읍니다. 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 보았자 남는 것은 한낱 부조화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한 이 시편을 통하여 죄로 인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의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사랑과 기쁨, 감사, 그리고 자연과의 부조화를 회복하고 이를 통하여 날마다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하고 기름진 삶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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