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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요한계시록 19:11-21/ 영광의 그리스도 [계시록]
  • 조회 수: 1233, 2013.11.09 16:51:50
  •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기 위하여 심판주로 다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은 요한계시록의 중심 주제인데 그의 재림의 모습을 여러 가지 경우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구름타고 오신다(계1:7,14:14), 철장 권세로 오신다(계2:27,12:5), 최후의 추수꾼으로 오신다(계14:14~20)... 등의 경우들입니다. 본문에는 그리스도께서 백마를 타신 장군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적군으로 더불어 마지막 싸움을 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기 때문입니다. 예로부터 백마는 황제가 타고 나가 싸우는 용마로 표현됩니다. 이것은 말의 용맹이나 씩씩함 보다는 그 자태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름다움과 권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느 나라나 왕이 직접 전쟁에 나가면 그 모습이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싸움 그 자체보다도 권위와 품위를 더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실 왕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기 보다는 명령으로 전쟁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1. 백마 탄 자의 출처(계 19:11)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1, 2절에는 ‘하늘에 열린 문이 있고 보좌를 베풀었다’고 하였고, 요한계시록 11장 19절, 15장 5절에는 ‘하늘에 있는 성전이 열렸다’고 하였습니다만 오늘 본문에는 하늘 자체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하늘 자체가 열렸다는 것은 이제 이 땅이 끝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실 성문을 활짝 열고 나가 싸우는 것은 끝장을 보겠다는 의지이고, 자신감의 표현입니다. 지금까지 하늘은 비밀과 신비로 감추어져 있지만 이제는 하늘의 삶이 일상의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지성소를 가리고 있는 휘장을 열어 제치심으로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가게 하셨고, 이번에는 하늘을 열고 백마를 타고 내려오심으로 그의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하늘의 세계를 일상의 삶으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2. 백마 탄 자의 이름(계 19:11, 13, 16)


      1) 그의 이름은 충신입니다. ‘충신’ ‘피스토스’는 ‘신실’, ‘믿을 수 있는’이라는 뜻인데 이것은 예수의 별칭으로 계시록에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이 사용된 것은 그는 신자들에게 흔들릴 수 없는 구원 약속의 소망이시라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실 이’는 오직 주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믿을 수 없습니다. 소중한 친구라도 믿을 수가 없어요. 누가 그러는데요, 자기 처남이 사람이 착해 가지고 친구들이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믿고 돈을 빌려줬는데 다 때먹고 지금은 소식 하나 없다고 해요. 최고 친한 친구였는데 그래요. 그래서 친한 친구일지라도 거리를 어느 정도 두어야 끝까지 좋게 지낼 수 있어요. 그러나 주님은 이름 그 자체가 충신입니다.
     

      2) 그의 이름은 진실입니다. ‘진실’ ‘알레디노스’는 거짓과 반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고 히브리서 13장 8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의 속성이 진실이시고 그의 말씀하심과 사역하심이 다 진실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에 관련된 것은 다 진실입니다. 그에 대한 구약 예언이 진실이며, 예언으로 오셨음이 진실이며,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진실이며,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심이 진실이며,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의 머리됨이 진실이고, 그의 보호와 축복하심도 진실입니다. 이제 그의 세상 심판과 성도 구원이 진실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그 진실을 이루기 위해 하늘을 열어 재치시고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진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결코 거짓말쟁이, 사기꾼이 아니십니다.


      3) 그의 이름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하시면서 주님을 소개합니다. 사실 최고의 지엄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나타나지요. 왜 영화에도 보면 최고의 보스는 얼굴을 내지 않습니다. 그냥 간단하게 음성으로 나타납니다. 그것도 큰 소리 안 합니다. 낮은 음성으로 한 마디 하면 그 말씀을 받아 부하들이 쫓아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분위기로 볼 때 주님의 그 영광스럽고 지엄하신 모습이 나타나서 그냥 땀 흘리며 뭘 뚝딱뚝딱 만들며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은 드러내지 않은 상태에서 말씀 한 마디로 모든 게 다 되는 것입니다. 마치 메아리 울리듯이 옥음을 한 번 울리는 그런 것입니다. 옛날 조선시대 정철이라는 신하가 그렇게 임금을 그리워하며 노래를 많이 지었는데 임금의 음성을 옥음이 흘러내리는 것으로 묘사하고 그랬죠. 임금의 음성이 옥음이라면 주님의 말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주님을 말씀으로 표현한 것은 존엄의 아주 극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백마 탄 자의 모습(영광의 주, 계 19:11~13)


      1) 그는 전사(戰士)이십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백마와 탄 자’ 라고 하였는데 이제 더 이상 어린 양과 자비하신 주로써 주님을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자로 오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가 오는 목적은 이제 화목 하러 오지 않고, 땅 위의 모든 거룩하지 않은 것을 거스려 싸우러 오시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서 가장 큰 승리는 피 흘리지 않고 상대방에게 항복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전쟁의 승리는 최고의 전략가만 누리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님의 더디 오심에 대하여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내시고자 하는 아버지의 인내와 참음이라고 표현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는 화를 내는 사람보다 참고 인내하는 사람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참고 인내하는 사람은 자기를 통제할 줄 안다는 표시이며 잠언에서는 자기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자가 성을 빼앗은 장수보다도 더 강하다고 말씀합니다. 주님은 이런 면에서 가장 훌륭한 전략가이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빼내기 위해 모든 것을 참으시는 것입니다. 탁월한 장수는 순간의 작은 승리 보다는 최후의 승리를 위해 때로는 후퇴도 하고, 일부러 져 주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표현할 때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 인내하시는 하나님,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하늘을 열고 백마를 타고 나타나는 주님은 더 이상 자비, 긍휼, 오래 참음... 이런 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하늘을 열었다는 것은 하늘의 전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입니다.


    2) 그의 눈은 불꽃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전지하신 주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전지하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눈엔  어둠이 조금도 없습니다. 드러나지 아니하고 보여 지지 아니 할 어둠의 정체는 하나도 없다고 계시록 1장 14절에 말씀합니다. 또한 그 영광의 불꽃 앞에, 진노의 불꽃 앞에 빠져나갈 자 없고, 피할 죄인도 없습니다. 

    3) 그의 머리엔 면류관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고…’ 라고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가지 면류관이 있는데 하나는 경기의 승자에게 씌워주는 면류관 ‘스테파노스’이고, 다른 하나는 통치자 곧 왕이 쓰는 면류관 ‘디아데마’가 있는데 본문의 경우는 통치자가 쓰는 권력의 상징인 면류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면류관’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천하만국을 다스릴 영원한 왕이시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4) 피 뿌린 옷을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피에 적셔진 옷’, ‘피에 담겨진 옷’으로 예수님 자신이 흘린 피를 뜻함이 아니라 예수께서 원수를 심판하실 사실을 설명한 것입니다. 이사야 63장 2, 3절에 “어찌하여 네 의복이 붉으며 네 옷이 포도즙틀을 밟는 자 같으냐? 만민 가운데 나와 함께 한 자가 없이 내가 홀로 포도즙틀을 밟았는데 내가 노함으로 말미암아 무리를 밟았고 분함으로 말미암아 짓밟았으므로 그들의 선혈이 내 옷에 튀어 내 의복을 다 더럽혔음이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주님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예수께서 재림하여 악도들을 심판할 때 악도들이 흘린 피가 주님의 옷자락에 묻혀지는 것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승자의 옷에 묻은 적군의 피는 더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선장군에게 영광이 되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영광의 주, 승리의 주, 심판의 주를 묘사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4. 백마 탄 자의 싸우시는 무기(계 19:11, 14, 15)


    1) 정의가 그의 최고의 무기입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1절에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고 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최고의 무기는 정의입니다. 아무리 강한 무기로 무장했더라고 해도 정의가 없으면 지게 되어 있습니다. 부당하게 당한다는 마음이 들면 힘이 그쪽으로 가게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6. 25정쟁을 경험했는데 그 때 남북한의 전력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지요. 절대적인 북한의 우세였고, 이런 절대적인 우세에 의한 자신감으로 김일성은 30일 만에 남한 전역을 장악하여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김영삼 대통령 때에 러시아에서 우리나라에 넘어 온 비밀서류에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무방비로 당하는 남한에 유엔 연합군이 힘을 보태었습니다. 캐나다, 호주에서는 6.25 참전을 위해 지원병들을 모집했는데 그 수가 넘쳤다고 합니다. 자기 나라 일도 아닌데 그렇게 지원을 했다니 정말 고마운 일입니다. 지난 6.25 기념일을 앞두고 참전용사 몇 명이 인터뷰를 하는데 인터뷰를 하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왔는데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을 TV 화면을 통해 보았습니다. 참 남의 나라 일인데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면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이 참전했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의는 이렇게 힘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편, 정의의 편에 서시기 바랍니다. 비록 약해 보이지만 정의가 우리 싸움의 최고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며 싸우는 것입니다. 폭력과 심판의 차이점은 정의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2)  그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19장 15절에 ‘그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오니 그것으로 만국을 치겠고…’ 라고 하였는데 그의 말씀을 뜻합니다. 태초에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마지막 때에 천지를 심판하는 일도 말씀으로 한다는 것은 아주 시작과 끝이 어울립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열고, 말씀으로 세상을 닫고.... 얼마나 일관성이 있습니까?  데살로니가후서 2장 8절에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고 하였습니다. 이한 검, 날 쎈 검이란 표현이 히브리서4장 13절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 썬 검처럼 심령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대륙간 탄도 미사일보다도 더 강력하고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3) 철장으로 싸우신다고 했습니다. 19장 15절에 ‘…친히 저희를 철장으로 다스리며...’ 라고 하였는데...  ‘철장’이란 쇠막대기, 철몽둥이 같은 것입니다. 시편 2편 9절에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목장에서 목자는 지팡이로 양을 칩니다. 그러나 악인에게는 쇠몽둥이로 다스리는데 이는 무자비한 파괴를 뜻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 15절 하반절에 ‘또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겠고...’ 라고 하였습니다. 익은 포도알이 포도주 틀에 들어갔을 때, 그 포도알이 여지없이 알알이 터져 붉은 즙이 흘러내리고 마는 것처럼, 악인의 최후가 심판 주의 철장 앞에서 피의 홍수를 이루고 말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전능자의 맹렬한 진노, 억제할 수 없는 완전한 진노입니다. 막거나, 지연되거나, 보류하거나, 항의하거나,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진노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서운 최후의 날의 장면인데 앞에서 나오는 어린 양의 혼인잔치와는 아주 극적인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하나 하나님을 거스려 대적한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를 따르는 악도들은 두려운 피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노의 하나님을 만나지 말고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이사야 55장 6, 7절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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