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복한 우리 가정(에베소서 6:1~9)
  • 조회 수: 41, 2013.11.09 20:55:42
  •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는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었습니다. 전에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일들을 지금 생활에서 누리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보면 얼마나 편리한 점이 많은지 모릅니다. 이처럼 과학은 급격한 발전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미국의 산호세(San Jose)를 다녀왔습니다. 거기는 실리콘 밸리(Silicon Valley)라고도 부르는, 고도의 반도체 업체가 밀집해 있는 산타 클라라(Santa Clara)지구가 있는 곳입니다. 앞으로 다가오는 21세기를 정보 산업화 시대라고 말하는데, 산호세에는 지금 전세계의 두뇌가 모여들고 있어서 다른 곳은 집 값이 다 떨어졌지만 그 곳만은 집 값이 갑절로 뛰었습니다. 이제 21세기가 되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영적인 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많은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이 균형 있는 발전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데서부터 걷잡을 수 없는 심각한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건전한 사회를 건설해 나감에 있어서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가정의 달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서 오늘 ‘행복한 우리 가정’에 대해서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가정은 하나님이 세워 주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천정배필(天定配匹)’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은 가정이 천륜에 속한다는 것을 인간 본심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인간을 지을 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시고 짝지어 한 가정을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어디까지나 신성한 것입니다. 인간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가정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서로가 상대방을 위해서 전적으로 희생하는 사랑의 완성도 가정에서 이룩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으로 한 몸 되어 사는 생활이 곧 가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인 교회와의 관계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가정이 사랑의 원리에 의해서 영위되어 나아가야 할 것을 가르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그의 몸 된 교회와의 관계에 비유했습니다. 먼저 아내는 교회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사랑하는 것같이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심같이 아내를 위하여 모든 것을 주는 사랑을 하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공동체요, 사회의 기본 단위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할 때마다 꼭 같은 말씀을 드립니다만, 사실 모든 것이 다른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합해서 사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저택이겠습니까? 수천만 원하는 가구이겠습니까? 수십, 수백 벌의 옷이겠습니까? 고급 승용차이겠습니까? 얼마인지조차 모르는 많은 돈이겠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세상적인 것이 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면 그것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랑 없는 가정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가정이 아니라 지옥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이 다 있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가정의 행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가정을 통해서 귀한 인간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가정을 통해서 사람이 태어납니다. 자녀가 장성합니다. 겨레의 대대손손이 이 가정을 통해서 계승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구나 영적으로 말하면 참된 신앙도 가정을 통해서 계승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젊은 사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아도 청년 디모데의 마음속에 있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디모데의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신앙이 가정을 통해서 계승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더구나 가정은 흔히 사회와 국가의 기본단위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은 사회 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어느 사회나 어느 나라나 가정이 문란하고 가정의 질서가 파괴되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역사를 살펴보면 어떤 문화나, 어떤 민족이나, 국가의 흥망성쇠가 가정의 도덕과 그 질서에 기인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가정의 도덕이 타락하고 문란한 사회치고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지 않은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주후 79년 8월 24일, 비스비오 화산의 폭발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어 버린 폼페이를 여러분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태리 로마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폼페이를 덮고 있던 잿더미를 다 긁어내고 그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가 있게 했는데, 멸망해 버린 폼페이시의 가장 두드러진 사실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음란이었습니다. 창녀들과 놀아나다 화산의 폭발로 그대로 잿더미에 덮여 화석으로 되어 버린 모습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나타나는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만 원인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은 기억하시지요? 한 마디로 말해 소돔과 고모라는 음란한 도시였습니다. 이처럼 귀하고 신성한 가정의 질서가 깨어지고 순결함이 없어질 때 가정의 행복은 없어지고 사회는 혼란에 빠지고 결국 멸망을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성한 가정을 잘 보존해야 할 책임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남편이나 아내가 똑같이 정조를 지킬 줄 알며 가정을 깨끗이 보존하는 것입니다. 가정 파탄의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십계명 중에 일곱째로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히 형벌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 모세의 율법 시대에는 이 계명을 범하는 자들을 극형에 처했습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요사이는 이런 법을 가진 나라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이 도덕법을 어기는 자를 벌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AIDS라는 무서운 불치의 병은 다 정상적이 아닌 남녀의 관계에 주시는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음란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명예와 물질과 건강의 손해를 줍니다.

    잠언 5장 9절 이하를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렵건대 네 존영이 남에게 잃어버리게 되며 네 수한이 잔포자에게 빼앗기게 될까 하노라 두렵건대 타인이 네 재물로 충족하게 되며 네 수고한 것이 외인의 집에 있게 될까 하노라 두렵건대 마지막에 이르러 네 몸 네 육체가 쇠패할 때에 네가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여 훈계를 싫어하며 내 마음이 꾸지람을 가벼이 여기고 내 선생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나를 가르치는 이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던고 많은 무리들이 모인 중에서 모든 악에 거의 빠지게 되었노라 하게 될까 하노라.” 이 얼마나 바른 말씀입니까! 꼭 이대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흔히 “성적 방황의 시대,” “성개방의 시대”라고 합니다. 혹은 “성의 제 3혁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것은 외국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10대 소년 소녀들이 난륜의 생활을 한다는 보도를 접하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고불변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히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했습니다.

    지금은 봄철이 되어서 밭에 곡식을 심습니다. 우리는 인생의 밭에 무엇을 심습니까? 심은 대로 거둡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심으십니까? 육신을 좇아 심으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심으십니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심어야 합니다. 음란을 심으면 멸망을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벌써 마음에 간음을 행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마음을 깨끗이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불결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음욕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지는 말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닭이 20일 동안 달걀을 품으면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그런 생각을 오래 품으면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품으면 도둑질을 하게 됩니다. 미움을 품으면 살인을 하게 됩니다. 음욕을 품으면 간음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보존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맡은 책임은 무엇이든지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분주하게 살아야 합니다. 한가한 사람에게 불결한 생각이 찾아 듭니다. 다윗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분주할 때는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한가한 때 그만 더러운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내 마음속을 언제나 깨끗한 것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더러운 것이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이 타락하면서부터, 노력하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짐승같이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해야 하는 것은 노력해야 되고, 타락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됩니다. 만유인력의 원리에 의해서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야만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정의 정신적 기초가 언제나 튼튼해야 합니다. 그 기초가 신앙입니다. 

    요셉이 무엇으로 그의 정결을 지켰습니까? 신앙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이 악한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요셉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이 모르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르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이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 전입니다. 이 전을 깨끗이 간수해야 합니다. 더럽히면 안됩니다. “모든 죄가 몸 밖에 있지만 음행하는 죄는 몸 안에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이 행복합니까? 사랑과 기쁨과 화평이 충만합니까? 성령이 계실 만한 가정입니까? 가정에 제단이 있습니까? 이 가정에 불이 켜져 있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을 보세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했습니다. 효도는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가 됩니다. 
    흔히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잘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고 합니다. 유교 사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기독교 문화와 유교 문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들 때문에 기독교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 이상으로 윤리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정상화를 강조하고 있는데 하나님과의 관계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윤리를 떠난 기독교라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의 강령이라고 볼 수 있는 십계명을 보아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나타낸 계명이 앞서 있는 네 개의 계명이고 그 다음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를 나타낸 것인데, 
    그 첫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인간이 인간에게 행하여야 할 계명 중에 첫 계명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합니다. 인심도 변합니다. 생활 양식이 달라집니다. 풍속도 변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변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도덕 법칙 가운데 첫째 법칙입니다.
    우리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는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친구나 선생님을 만나기 전에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이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부모와의 관계를 옳게 가져야 형제와 이웃, 나아가서는 나라와의 관계도 바로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신을 찾으려면 효자의 문에서 찾으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부모를 잘 섬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임금님도 잘 모신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사회질서의 기초가 됩니다. 이 말에는 부모뿐 아니라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리 문답에서도 제 5계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5계명에 명하는 것은 각 사람에 속한 지위와 인륜 관계 즉 상하와 평등을 따라 높일 자를 높이고 행할 일을 행하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사회의 질서가 유지됩니다.

    가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에게 순종할 때 그 가정의 질서가 섭니다. 학교에서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를 때 그 학교의 질서가 섭니다. 어느 기관이나 단체에서 그 책임자를 존경하고 그 지시에 따를 때 그 기관이나 단체의 질서가 잡힙니다. 모든 국민이 국법을 존중히 여기고 그 법을 따를 때 국가의 안녕 질서가 확립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복하는 자녀라야 상관에게, 사회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으면 그런 사회는 자연히 혼란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효도는 신앙의 첫 열매입니다. 참 신앙이 있다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이런 면에서도 나아야지 못하면 안되겠습니다. 
    어떤 아버지, 어머니는 얼굴이 너무 상해서 왜 그렇게 되었나 하고 그 이유를 알아보면 그 아들 때문에 너무 속이 상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를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우리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나는 부모님을 기쁘시게는 못할 망정 속을 썩혀 드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자리에는 그런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리라 믿습니다. 또 그런 분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대접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 전화 드리고, 용돈 드리고, 신식 음식 대접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나이 많으신 분에게 무슨 돈이 필요하냐고 합니다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이젠 손자들이 있는데 할아버지 노릇 하는 것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날 때마다 돈을 주어야 “할아버지”하면서 좋아하지 돈주지 않으면 애들이 할아버지를 쓴 오이 보듯 합니다. 나이 들수록 용돈이 필요합니다.

    젊은 분들은 요사이 식사 후에 보통 커피를 마시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보리차 좋아하신다고 하면서 젊은 분들끼리만 커피를 마시지 마세요. 사람이 늙었다고 해도 입맛은 같습니다. 
    제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대신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부모님들이 젊은이와 같이 앉아 TV를 보자니 그렇고 안 보자니 또 그래서 눈치 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른 용돈 좀 줄여 쓰고 부모님 방에 TV하나 놔 드려서 눈치보시지 않고 TV를 보시도록 해 드리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 해 전에 목회하던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에 부모님들의 입장을 대변해 드리는 설교를 했더니 어떤 할머니는 아침 1부 예배에 나오셨다가 너무 좋아서 자녀에게 전화해서 꼭 교회에 나와서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라고 하시고 온종일 1부에서 5부까지 꼭 같은 설교를 다섯 번씩 들으셨다는 말을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으셨으면 그러셨겠어요. 젊은 분들이 연세 많으신 부모님들의 형편을 잘 살피시고 그 입장을 이해하도록 힘쓰시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 영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길은 믿음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언제나 “주님이 기뻐하실까?”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일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을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착한 행실을 통해서 이 세상을 비추게 되면 결국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빛 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 대신 욕이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자세히 들으세요.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바로 살아 칭찬이 돌아오면 그 영광은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반면에 잘못해서 욕이 돌아가면 그 수치가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하실 말씀이 없으실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돈을 무시합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돈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 돈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돈이 우리의 궁극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는 것이 그 가산이 넉넉한 데 있지 않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이면 다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살아가는 데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돈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져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으로 좋은 집은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가정은 살 수가 없습니다. 행복한 가정의 비결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잠언 22장 6절에 보면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부모가 다른 책임 다 했어도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시키지 못하면 그것을 실패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예수 잘 믿지 않는 가정치고 진정한 의미의 행복한 가정은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 부부가 서로 사랑하십니까? 부모를 공경하십니까? 형제가 화목하십니까? 그리고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칩니까? 오늘 우리 주님께서 축복하셔서 갈보리에 속한 모든 가정이 주 안에서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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