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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창세기18:09-15/ 웃게 하시는 하나님 [수요]
  • 조회 수: 568, 2013.11.16 21:46:08
  •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꽃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웃는 얼굴입니다. 깨끗한 웃는 얼굴처럼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순수한 웃음 마져도 오염이 되고 있지요. 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선한 웃음은 반갑다. 악의로 웃는 웃음은 무섭다. 되는대로 웃는 웃음은 천박하다. 전혀 웃지 않는 사람은 어렵고 까다롭다." 웃음에 의해서 사람을 구분한 좋은 얘기가 되겠습니다. 웃음도 여러 가지입니다. 기뻐서 웃는 웃음, 하도 기가 막혀서 웃어버리는 웃음, 허탈감에서 웃는 어이없는 웃음, 비방하는 마음으로 웃는 비웃는 웃음, 젊은 사람들이 쓴말입니다만 이런 웃음을 가리켜 "웃기네" 그럽니다. 또 억지로 웃는 웃음, 우습지도 않은데 너 왜 나를 자꾸 웃기느냐 하며 억지로 웃는 웃음도 있습니다. 사실 코미디언들이 억지로 웃기고 따라 웃어 주는 것은 피차 고생입니다. 또 그런가 하면 거짓된 웃음, 간사한 유혹하는 웃음, 생각하면 웃음처럼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는데 이것마저 오염되고 타락되었다고 생각하면 그지없이 서글픈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잘못된 웃음을 아름다운 웃음으로 바꾸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크신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그 축복의 상징으로 두 가지를 주셨는데, 하나가 자식이요, 하나가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을 통해서 여러 민족이 나왔으니까 육의 후손도 의미합니다만 신령한 후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령한 의미에서는 우리도 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많은 후손을 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복은 땅에 대한 축복입니다. 너의 고향을 떠나라.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을 보이겠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축복을 받는 타이밍이 문제입니다. 어느 시간에 주시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뜻에 차이가 납니다. 분명히 아들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최소한도 1년 후엔 주셔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무려 25년 후에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만 지쳤습니다. 

    그리고 땅을 주신다고 하셨는데 아브라함은 평생 나그네로 방황하며 살았고 실질적으로 그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은 500년 후입니다. 여기서 또 한 번 지쳤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은 틀림이 없고 또 약속은 지키시는데 그 시간과 그 방법에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따라가기가 어렵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자식을 주실 것을 믿었고 또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내년 이 때에 아들을 주마 하고 말씀하실 때에 그는 그만 웃었습니다. 그 이유는 25년 전부터 말하는 것인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제 믿을 수가 있나요? 오늘 처음으로 하시는 말씀이라면 오히려 믿을 수 있겠는데, 25년 전부터 주시마 주시마 한 말씀을 오늘에 와서 또 내년에 주신다 하니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허.... 하고 웃어버립니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불조심하라 하는 이야기를 밤낮 듣고 삽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시간에 불조심 못 합니다. 늘 들어 왔기 때문에, 하도 많이 들은 얘기니까 면역이 됐습니다. 여기서 실수하게 됩니다. 

    또 사라로 말하면 자기 자신의 약함을 압니다. 18:12에 보면, "이제 어찌 낙이 있으리오, 남편 나이 100세요, 내 나이 90이며, 벌써 경수가 끊겼으니 무슨 낙이 있겠느냐" 했습니다. 자기 나약함을 알았습니다. 히브리서 11:12에 보면 "죽은 자와 방불하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년에 자식을 주신다 할 때에 주시려면 진작 주시지 이젠 다 끝났습니다... 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웃기신다!" 하며 웃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 17:18에 보니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고 했습니다. 이제 입에 발린 말처럼 아들을 또 주신다고 그러지 말고 내가 좀 외도를 했습니다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남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의심하지 않습니다만 말씀을 들은 때가 75세요, 이제 십년을 지내고 나서 85세가 되고 나니까 안 되겠다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다고 하지만 더 늦기 전에 무슨 수를 내야지 하여 부부 합의하에 소실을 얻어 편법으로 얻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그렇게 얻은 이스마엘, 이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아남기를 원합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편법을 쓴 이스마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당화해 주기를 바랐으나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직선적으로 완전한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이제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했습니다. 그리고 18장에서 다시 이런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천사가 하는 소리를 사라가 장막 뒤에서 듣고 웃었습니다. "이제 무슨 낙이 있겠느냐" 해서 웃은 것입니다. 18:12을 봅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 어찌 낙이 있으리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오 하느냐."

    이 말씀을 자세해 들어보십시다. 사라가 기가 막혀서 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물으십니다. "왜 웃었느냐." 이에 대해서 15절에 보면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고 부정하며 하는 말이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하고 부정했습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씀입니까. 이 세 마디를 연결해 보세요. "왜 웃었느냐?" "아니오, 웃지 않았습니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이 아름다운 관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우리 인생, 우리 영화라는 것이 안개와 같고, 연기와 같고, 피었다가 열흘도 못되어 지고 마는 풀의 꽃과 같은  인간임을 아십니다. 자기 능력 안에 갇혀서 헤어나지 못하고 무상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임을 하나님은 잘 아십니다. 사라가 믿지 못하고 그렇게 자식을 바라면서도 웃어야 하는 그 이유를 왜 모르시겠느냐 말입니다. 만일 이 때에 하나님께서 "네가 왜 믿지 못하고 나를 비웃느냐" 이렇게 책망을 했다면 사라가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믿지 못하여 웃어 버리는 이 사라를 결코 책망하시지만 않았습니다. "웃었느니라. 그러나 너를 향한 약속은 이루어지리라."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변덕스러운 것처럼 하나님께서 변덕스럽게 우리를 대한다면 몇 사람 살아남을 것 같습니까? 자식들이 부모에게 변덕스럽게 대하는 것처럼 부모가 자식에게 대한다면 어느 자식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저 어리석고 미련하고 약해서 이렇게 믿음 없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웃어 버리는 이 불쌍한 사라를 하나님께서 또 한 번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안다. 그리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 투성이 입니다. 체질화된 불신과 무능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제 딴엔 제법 믿음이 있다고 으시 되지만 어느 순간에 그만 조소해버리고 맙니다. 오늘 어느 집사님 병문안 심방을 같습니다. 수술을 했지만 고통이 줄어들지 않고, 주사도, 약도 안통하고.... 이게 노환이지요. 고통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심방을 가서 기도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심방을 가면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기도  해도 별 수 있겠나.... 이렇게 받아드리면 어쩌나... 그러나 찬송하고, 말씀을 보는 가운데서 그런 불신이 깨끗하게 없어지고 그래도 하나님뿐이다.... 하는 심정으로 그 집사님도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고, 심방을 간 교역자들도 그렇게 기도했지요. 이 순간에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집니다.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중요한 것입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저 뒤로 가서 창세기 21:1에 보면 사라에게 말씀하신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하라 했습니다. 21:6에 보면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의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했습니다. 이삭이라는 이름은 그 뜻이 "웃음"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진실한 웃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쓴웃음을 기쁨의 웃음으로, 거짓된 웃음을 성실한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말씀을 주실 때에 믿고 감사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기왕에 그렇지 못해서 믿지 못하고 웃어 버렸지만 그러나 "네가 웃었느니라. 그렇지만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 이 마지막 말을 사라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순종해서 귀한 아들을 얻었고 그 허탈한 웃음이 이제 진실한 웃음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거친 세상을 살아갑니다. 희극과 비극은 원점에서 같다고 합니다. 우리는 웃음의 뜻을 바꾸어야 하겠습니다. 쓴 웃음, 거짓된 웃음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실한 웃음, 그 마음을 충만케 하사 터져 나오는 그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웃음을 웃을 때에 이 웃음으로 모든 악과 모든 불신을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기도 : 불신의 웃음을 웃던 사라를 참된 웃음으로 충만케 하시던 주님, 우리의 웃음에 다시 그 같은 충만한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제 주께서 웃게 하시는 그 웃음을 웃게 하시고, 이 밝은 얼굴로 이 세상을 보며 이 거짓된 세상을 진실하게, 어두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믿음의 장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브라함의 가정에 큰 기쁨을 주신 주님, 우리에게 이 같은 놀라운 기쁨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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