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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약 열왕기하 02:19~22/ 이 땅 고쳐주소서 [주일낮]
  • 조회 수: 598, 2013.11.16 21:49:20
  •   오늘 본문은 여리고 땅이 어떻게 치유 받아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게 되었는가를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여리고’ 라는 말은 종려나무의 성읍이라는 뜻으로 여리고는 요르단 계곡에 위치하며 헬몬산에서부터 남쪽의 아카바 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계곡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여름에는 건조하고 덥지만 겨울과 봄에는 향기 나는 아름다운 꽃으로 뒤덮이게 되며 요르단 계곡 주변의 황량한 사막 정 가운데 펼쳐진 녹색 카페트와 같은 모습을 띄게 됩니다. 말하자면 사막 가운데 종려나무가 우거진 아름다운 오아시스였지요. 그런데 이 아름다운 땅에 눈에 보이지 않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이 땅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땅이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이 여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관문이 되었는데 정복될 당시에는 가나안의 대표적인 우상 아스다롯 예배의 중심지요 이교도의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 의하여 그 성벽이 무너지고 함락될 때에 하나님은 이 여리고성에 사람도 남기지 말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제물들도 손대지 말고 다 불태우라고 명령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라는 저주가 선포됩니다. 후에 여리고는 하나님이 내리신 저주대로 그것을 건축한 사람이 무서운 대가를 치르기는 하였으나 재건되었습니다. 벧엘 사람 히엘이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문을 세울 때에 말째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라고 왕상 16:34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본문의 사건이 있기 전까지의 여리고의 내용입니다.

      우선 겉보기에 여리고의 모습은 아름답습니다. 겨울과 봄에 화창하게 피어나는 진한 향기의 각 종 꽃들이 만발하고, 헬몬산의 이슬을 통해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이 이 여리고 땅을 적시지요. 얼마나 그 땅이 아름다웠으면 황폐화된 그 땅을 다시 재건했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비록 여리고성이 재건되어 사람이 사는 땅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저주가 풀리지 않아 그 물이 여리고 땅을 적시게 되면 물에 독성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나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뭘까요? 오늘 19절 끝에 나와 있는 대로 식물들이 열매가 익기도 전에 떨어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엔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성경을 찾아보니 그 정도 이상입니다. 표준 새 번역이나 영어 성경에는 그 부분이 “물이 좋지 않아서 이 땅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유산합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농작물을 심어도 열매가 열리지 않고, 사람이 결혼해 살아도 아이를 갖지 못하는 동네라면 장차 그 성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불모의 땅, 불임의 땅은 결국 아무 것도 살 수 없는 죽음의 성이 될 게 틀림없습니다. 지금은 별 위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흐지부지 되다가 사람은 다 떠나고 말겠지요. 누가 물이 안 좋은 이 땅에서 살겠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지자 학교 중의 하나가 있었는데 엘리사가 그 곳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그 성읍 사람들이 선지자에게 나아와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고 고합니다. 전에는 깨끗하고 생기를 주던 샘물, 그 성읍과 인근 지방에 물을 공급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던 샘물이 하나님의 저주가 풀리지 않아 사람이 사용하기에 부적당한 채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이에 엘리사는 여리고 사람들의 간청에 응하여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하여 이것을 받은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라고 선언하지요. 이런 내용이 오늘날까지 아름다운 고대도시로서의 명성이 유지되게 된 유래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는 영원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죄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겠습니까? 그 어떤 죄가 하나님의 분노를 끊임없이 불태우겠습니까? 오늘 여리고의 주민들처럼 우리 개인의 죄, 우리 가정의 죄, 우리 교회의 죄, 이 나라의 죄를 앉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그 죄가 어떤 것이라도, 그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저주가 어떠한 것이라도 하나님은 자비하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그 긍휼이 풍성하시고 한이 없으시기에 그 죄를 용서하시며, 그 죄로 말미암은 저주를 풀어준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습니까?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 죄로 혼탁해진 우리의 물을 그대로 흐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생활 가운데도 ‘물이 좋다, 혹은 나쁘다’ 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요. 여기에서의 물은 실제 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분위기 또는 환경을 가리키는 것인데 여러분... 우리의 물은 어떻습니까? 우리 가정의 물은 좋습니까? 여기서 가정의 물이라 함은 그 집안의 문화, 정신, 바른 예절, 신앙.... 이런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의 가정을 향해 물이 안 좋은 가정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저 집안 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게 좋아. 물이 안 좋아. 물들까봐 걱정이야....’ 우리 신자들이 이런 소리를 듣는 집안이 되어서는 안 되겠죠. 

      이 시간에 목사인 제가 여러분 가정의 정신문화, 예의범절까지 간섭하기에는 너무 주제가 넘은 것 같고 저는 우선 한 집안의 신앙의 물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여러분 가정에서 신앙의 물은 좋습니까, 아니면 나쁩니까? 나름대로 열매를 맺고 있나요? 아니면 불모와 불임의 땅입니까? 무엇보다도 여리고 사람들처럼 이 신앙의 물 문제가 여러분에게 심각한 문제입니까, 아닙니까? 만약 그게 별 대수로운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신앙에 굉장한 적신호입니다. 

      신앙의 물이 안 좋아도 당장은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열매가 없고, 결국은 불모의 땅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문제를 무겁고 엄중한 문제로 여겨야 삽니다. 여러분... 신앙의 물을 좋은 물로 바꾸십시오! 오늘 여리고 사람들이 엘리사 앞에 나왔듯이,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쓴 물이 단물로 바뀔 수 있는가를 주님께 물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생활의 물, 즉 우리 믿음생활의 분위기를 좋은 물로 바꾸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의 다른 문제가 해결되고 우리의 삶이 순조롭습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좋은 물이 좋은 물 되고 나쁜 물이 나쁜 물 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 물이든 나쁜 물이든, 그 물은 바로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그대로 상속된다는, 이 무서운 사실을 결단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쁜 물이 흐른다고 당장 망하지는 않지만 서서히 망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여리고 성의 물이 쓴 물이라도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럭저럭 살아왔습니다. 여리고성은 사막의 오아시스로서 물가에 종려나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입니다. 그나마 식물도 있고, 먹고 살 물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이 나쁜 영향을 끼쳐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가정에서는 자녀를 생산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살지만 별로 희망이 없는 도시입니다. 실수로 사람이 들어오기는 하겠지만 물이 좋지 않기 때문에 떠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날 것입니다. 이 땅의 물을 고치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떠나고 그 땅은 황패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여리고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은 지금 내가 이대로 살아도 좋은 건지.... 스스로 문제를 물어야 합니다. 우리의 살고 죽음이 바로 이 문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는 줄 모르고 지금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한국의 교회가 다 그렇다고, 한국의 성도들이 다 그렇다고 하면서 신앙적으로 죽어가는 교회, 신앙적으로 죽어가는 성도들을 보면서 위로로 삼아, 그들도 그렇게 하는데 우리만 별나게 할 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위안을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부르는 ‘부흥’이라는 복음송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우리의 죄악 용서 하소서 이 땅 고쳐 주소서....” 뭐 복음송을 소개하는 김에 우리 한 번 불러볼까요? 우리가 이 복음송 가사처럼 이 땅, 이 교회, 우리 가정, 우리 심령 치유해 주소서.... 하고 여리고 주민이 엘리사 앞에 나아 간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치유를 부르짖으며 나아가면 반드시 살 길이 열리는 줄로 믿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엘리사 선지자를 통하여 저주 받은 여리고 땅을 치유해 주셨듯이 우리 마음,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이 땅에 흐르는 저주 받은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의 복 받은 자녀들로 말미암아 저주 받은 사망의 땅들이 생명수로 충만해지는 큰 복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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