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함께 읽으신 말씀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눈물”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면서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눈물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고 나니 문득 네로의 눈물이 생각납니다. 네로 황제는 포악하고 잔인했습니다. 하는 짓이 포악하고 잔인했기는 했지만 가끔씩 시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로마 시를 불질러 놓고 그 가운데서 눈물을 흘리며 시를 짓는 그런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그런 눈물을 흘릴 때는 그 눈물을 옥으로 만든 병에 담았습니다. 귀한 눈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왕은 눈물을 잘 흘리지 않는데 눈물을 흘리니 그게 얼마나 귀하냐.... 이런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흔히 왕들이 흘리는 눈물을 옥루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그러나 네로의 눈물은 하나도 가치가 없는 눈물입니다. 한낮 미치광이 독재자의 눈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눈물은 가치가 있었습니다. 왕의 눈물이 귀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기에 그 눈물이 얼마나 더 귀한 것입니까? 그러나 만왕의 왕이 흘린 눈물이라고 해서 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요, 유일하신 참 신에게서 흘린 눈물이기에 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씀은 위로가 충만한 말씀이요 우리가 정말 주목할 가치가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린 경우가 있습니다. 성군으로 불리는 다윗은 눈물로 요를 적시는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병이 들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 인생을 감싸고 있는 그 모든 죄와 슬픔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울었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세상에 울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육체를 입고 계신 동안에 눈물을 흘리셨다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는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첫 째로 예수님께서 우신 이유는 그 분이 참 사람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완전한 인성을 취하셨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이 여인의 태에서 나셨고, 어린아이로 자라나셨고, 인성을 가지고 일을 하셨고, 걸으셨고, 피곤해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도 구운 생선 한 조각과 구운 떡을 드셨습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신적인 능력으로 그 인생이 지탱되었지만 사십 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음식이 필요할 때 먹고 마시고 음식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인간적인 우정을 갖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의 나사로의 가정을 사랑하셨고, 예루살렘에 올라올 때면 휴식을 취하기 위해 들렀던 곳이 나사로의 가정입니다. 그 사랑하던 친구로서 지내던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주님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동정심이 있었기에 우셨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슬픔에 전염이 되어 주님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분의 신성을 믿어야 하겠고 또한 분명히 인성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신 경우를 우리는 세 번 볼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한 친구 나사로 때문에 우셨고 예루살렘 입성한 이후 그 성을 내려다보시면서 앞으로의 심판을 생각하시면서 선지자로서 우셨습니다. 세 번째의 눈물은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신 대속주로서의 눈물입니다. 우리의 죄악 때문에 형벌을 받으신 보증자로서의 눈물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적인 연약함을 부끄러워 아니하시는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것은 오해될 수도 있었고 잘못 해석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덤 주위에 있던 유대인들이 조롱 석인 말로 “저기로 보라 그가 눈물을 흘린다. 이적을 행하는 자가 운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저기에 보통 사람들처럼 우는 것을 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분명히 예수님의 연약함을 보고 비웃을 기회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그 상황에서 술책을 써서 행하신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참된 느낌 그대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눈물을 흐리는 것이 남자답지 못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눈물은 사람에게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 그대로 행동하시고 그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불신자들이 험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생각하시고 눈물을 흘리심으로 나사로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것은 그만큼 우리에게 당신의 진실하심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이 세상에 눈물보다 더 진실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진심을 나타내기 위해 눈물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눈물도 가짜가 있습니다. 우는 것을 보고 차마 미워할 수가 없고, 눈물을 흘리는 것 보고 그 얼굴에 침을 뱉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여 가짜로 눈물을 흘리며 위기를 모면한 후에 더 악하게 배신을 때리는 그런 사람도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주님의 눈물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증거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총기사건으로 어린 소녀가 희생당한 그 애도의 자리에서 말을 잊지 못하고 50초간 침묵했을 때에 전 미국인이 그 50초간 오바마 대통령과 마음을 같이했습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어린 소녀를 애도하며 눈물을 참아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 그렇다면 우리 주님이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는 사건이 얼마나 대단한 것입니까?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기에, 얼마나 인간을 동정하기에 신이 눈물을 흘린다는 말입니까? 리비아 카다피가 시민들을 죽일 때... 그는 기자에게 이렇게 정당성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은 개인이고, 나는 리비아 그 자체다. 참 대단한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야말로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에 불과한 것입니다. 도데체 한 인간의 죽음을 두고 눈물을 흘리는 신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신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부교역자로 있을 때 담임목사님이 몸이 아프셔서 사순절 특별기도회를 부목사들이 돌아가며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때 담임목사님이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다. 은혜를 끼쳐야 한다, 그러니 인도할 때 열정을 다하라,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회를 인도해라, 눈물이 나지 않으면 내 아이, 내 아내, 내 부모의 아픔, 죽음... 이런 것들을 생각해서라도 눈물을 흘려라.... 이랬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교인들에게 사랑과 동정심이 없어보였으면 이런 소리를 했겠나 싶어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막 울었지요. 그래서 성도들이 엄청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동정하면 눈물이 나는 법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이런 사랑과 동정...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누구를 중보하여 기도한다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간절하게 우시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나사로를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 눈물 어린 간구보다 더 잘 상달되는 기도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간절한 울음 섞인 목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들으실 때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시며 기도하시는 그 모습을 보시고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시는 기적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 기도를 통해서 응답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들으시고 주님께서 응답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성경에 마르다가 말했던 그 “썩어 냄새가 나는 것”이 은혜로운 생명의 달콤한 향기로 바뀌려면 무한한 사랑의 소금기 어린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신 예수님이라면 우리의 눈물을 닦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 나와 교제하지 않아서 내 슬픔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몸소 눈물을 흘리셨고 정복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고난의 면류관을 쓰고 눈물을 흘리지만 후에 주님을 만나게 될 때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을 믿습니다. “저 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눈물이 없고, 병원도 없고 , 더 이상 애통하는 것도 없는 천국의 삶이 우리에게 펼쳐질 줄로 믿습니다.
[기 도] 눈물이 마른 이 시대에 누가 우리를 위해 울어주는 것도 그렇게 감동이 되고 귀해 보이는데 주님이 우리를 위해 우셨다니 참으로 놀랍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지금가지는 자신을 위해 울었지만 이제는 우리 주님처럼 불쌍하고 소외된 우리 이웃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랑과 긍휼함이 있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