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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12:38-45/ 악한 세대 [수요]
  • 조회 수: 896, 2013.11.17 20:51:18
  • 예수께서 귀신이 들려 눈도 멀고 벙어리가 되어버린 사람을 예수님께서 깨끗이 고쳐 주심으로 보고 들으며 놀라운 역를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역사로 보지 않고  바알세불을 힘입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역사를 왜곡시킵니다. 또 다시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 주소서... 라고 합니다. 본문에는 우리에게 표적보여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누가 복음에는 표현하기를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표적은 주어졌습니다. 귀신이 나가는 표적, 그리하여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벙어리가 말을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는 표적이 바로 눈앞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표적의 뜻은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다른 표적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미 보여주신 것 이상의 어떤 것을 요구하는 것은, 그리고 그러한 어떤 것을 행하는 것은 하나의 불신입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안타까운 탄식과 함께 더 이상 다른 표적은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많은, 얼마나 놀라운 표적들을 보았습니까? 죽은 자가 살아나고, 문둥병이 깨끗해지며 벙어리가 말을 하고, 장님이 눈을 뜨며, 수천 명을 한꺼번에 먹이시는 많은 사건들이 때를 따라 계속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부탁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 표적이라는 말은 헬라 원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말하자면 사인(sign)입니다. 표적과 표적이 어떻게 다를까요? 기적은  놀랍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등의 나타난 현상 자체만을 두고 거론할 때 이것은 기적이요 이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을 통하여 신령한 진리가 보이는 것은 표적입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는 장소에서 그 떡을 친히 보며 먹었다 하더라도 ...야 대단한 일이다... 거기까지만 아는 사람은 기적을 본 사람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생명의 떡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면 그것이 표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겪는 모든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하나가 다 표적입니다. 우연히 일어난 일이란 없기에 표적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뜻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미 주신 말씀이 충분히 있음에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합니다. 언제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느냐고 부정하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또 요구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수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보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이상한 환상이나 꿈이나 음성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늘 이상한 것만 요구하고 그런 것을 요구하는 사람은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다 오늘 본문에 표적을 구하는 사람과 똑같은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게서는 요나라는 선지자의 삶 속에서 2가지로 예수님 자신과 연결시키고 한 가지는 바리새인들, 서기관들과 연결시키려 하십니다. 

      첫째, 요나가 탔던 배는 니느웨로 가는 배가 아니라 다시스로 가는 배입니다. 그런데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이 될 지경에 이르자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고자하여 제비를 뽑게 되고, 이때에 그 제비가 배 밑층에서 잠자고 있던 요나에게서 뽑히게 됩니다. 이 때 요나 자신이 먼저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배가 거센 풍랑을 만나게 된 원인은 그 속에 요나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 때문입니다. 더 견딜 수 없는 상황에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자 즉시로 바다가 고요해지게 됩니다. 여기서 요나는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을 위한 대속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나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그 배는 무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어 주심으로 우리가 무사해지고 평강을 얻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신 첫 번째 포인트입니다. 

    그 후 요나는 사흘 동안을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사흘 후에 그 물고기가 요나를 육지에 토해버림으로 본래 가야 했던 니느웨를 향해 가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이 부활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대신 죽었고, 그리고 그 후에는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니느웨성에 도착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나가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살아나온 사건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 속에 장사 되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실 사건이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게 예수님이 요나의 표적을 언급하신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모든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사건! 그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귀신 들렸던 사람이 깨끗해졌음에도 저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그 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거듭난 후에야  비로소 귀신 들린 사람이 깨끗해졌던 사건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10년이나 교회문턱을 들락날락 거렸는데 요즈음에 와서 제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들리는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고, 성경을 읽을 때에도 그 의미를 알게 되며,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오는 것을 알 수 있고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가 있어집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닌다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하고는 결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그 마음에 이해되는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예수님처럼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이 사는 이 역사, 이 사건이 있은 다음에야 영적인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시간 들려주시는 말씀의 전부가 내게 주시는 말씀들로 들려지는 것이 표적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사건을 통하여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에게 적용하십니다. 그것은 니느웨 사람들이 심판날에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할 것이라고 하는 말씀인데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 니느웨 사람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하는가 하면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말을 듣는 즉시 곧 회개하였습니다. 니느웨는 포악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도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야만인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복음을 전해도 도저히 받아드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시원찮은 요나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요나가 사실은 억지로, 마지못해 전도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원찮은 전도를 받고도 회개하고 뉘우쳤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어떻습니까? 그만큼 기적을 보고, 가르침을 받고도 회개치도 않고, 복음을 받아드리지도 않고.... 이러니 니느웨 사람들에게 정죄를 받아 싸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거기다가 한 사람 더 언급하십니다. 누구죠? 남방여왕.... 아마도 솔로몬 왕 때 유다왕국을 방문한 시바 여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시바여왕은 멀리 에디오피아로부터 이스라엘까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혜를 배워갔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이 남방 여왕보다 못하다는 것을 질책하십니다.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먼 나라에서 찾아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지만 지혜를 들으려고 오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이 지혜의 사람이었다면 예수는 지혜 자체였습니다. 남방의 여왕 시바는 초청 받지 않았으나 왔고, 땅 끝에서 지혜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고, 또 예수의 초청까지 받았으나 지혜를 들으려 오지 않았고, 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인은 모두 이방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인들, 하나님의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인들,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한 자요 하나님의 은사를 거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니느웨 사람들이 마지막 때에는 회개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할 것이며, 시바 여왕은 예수를 믿지 않는 자를 부끄럽게 할 것이라고 예수는 경고하십니다.

    이 세대에도 표적은 늘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눈을 떠야 하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은혜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귀에 들리는 것이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은 표적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찬양대원이 지휘자의 신호를 잘 알아차리는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신호가 통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천기는 구분할 줄 알면서 왜 시대는 구분할 줄 모르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까? 성경에 종말의 시대가 오면 모이기를 싫어한다(히 10:25)고 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대입니다. 모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새벽기도와 예배가 한국교회의 특징인데 예배가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지금은 기도해야 할 시대입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벧전 5:8)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뱀으로 상징했는데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다. 뱀은 차가운 동물입니다. 이 시대가 무정합니다. 비정한 시대입니다. 길에서 사람이 죽어가도 그냥 지나갑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는 가정과 식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세계를 믿습니다. 부활의 날에 가면 누가 생명의 길로 갔고, 누가 사망의 길로 갔는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부활의 세계가 없다면 이 세상이 아무리 재미있고 즐거워도 허무한 것뿐입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생은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 마지막 절에서 헛되지 않은 인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주 안에서 수고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고 했습니다. 부활의 날을 바라보고 사는 것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기도] 주님께서는 믿지 않고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더 이상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도 불신의 시대이다 보니 우리에게 보여주실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실까봐 두렵습니다. 사람들은 아버지 앞에 나올 때마다 표적을 구합니다. 그러나 더 이상의 표적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이미 보여주신 것들에 눈을 뜨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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