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초대교회 사도들이 담대히 세상권세에 맞서 싸운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고잡 합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을 위임 받은 여호수아에게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1장에 보면, 반복되는 말이 나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담대히 하라!” 주님이 원하시는 일, 주님이 약속하신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악한 일, 죄 된 일, 하나님의 나라를 파괴하는 일에, 강하고 담대하면 안돼요! 오늘 본문에 보면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엄청난 핍박이 가해지는 데도, 그것을 이기고 교회가 계속 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4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는 사도들을 불법으로 체포하였으나, 믿는 남자의 수가 오천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5-12절은, 국가 최고 기관인 산헤드린 회에서 사도들을 심문할 때, 베드로 사도가 성령 충만하여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설교한 내용입니다. 13-22절은, 권력을 이용하여 공갈과 협박을 하였으나, 사도들이 당당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23-31절까지는 일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이 중에서 초대 교인들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던, 근거와 이유를 찾아보며 함께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 믿음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12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하다가 체포되었고,(1-4) 다음날 산헤드린 의원들(5-6)이 모인 가운데 심문을 당합니다. 산헤드린 의회는 당시에 국가 최고 원로 기관으로, 극형 외에 모든 재판권을 가진 최고 권력기관입니다. 그런데 오늘 7절에 보면, “네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7)는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이미 이단자로 판명되었기에, 사도들에게 올무를 씌울 수 있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면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은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와 사도들은 구원은 오직 예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심령에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요, 부활하신 주님이 승천하시면서,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20) 약속하신 말씀을 믿음으로써, 다시 사신 주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담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오늘 10절에 보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하고, 14절에 보면, “병 나은 사람을 세워서 보여 준 것”입니다. 그러니 산헤드린 의회는 할 말이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주의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 위해 고난도 당하시고, 산 소망을 주시려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 11장 38절에서 말씀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강하고 담대한 자 되어, 세상과 사단을 이기고 내 자신의 모든 것도 이기고, 언제나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원합니다.
둘째,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입니다.(12-16절) 최고의 재판정에서 체포되어 죄수의 신분이었으나, 사도들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대제사장과 그 문중이 다 놀랍니다. 베드로가 변한 것이죠! 베드로가 새 사람 된 것이죠! 베드로가 그 전 사람이 아녜요! 우리가 어떤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가족 중에 누가 아플 수도 있습니다. 나 자신이 심한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움 당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일 하다가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고 인내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결코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려울 때 더욱 어려운 사람 돌보고, 더욱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 주며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시험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에 고린도후서 1장 6절에 보면 분명히 그렇게 나오잖아요!
베드로가 변했습니다. 주님의 확실한 증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가 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기 전에는 낙심자요, 무능한 자, 병든 자, 실패자, 포악한 자였으나, 이제는 소망을 갖고 능력자요, 건강한 자요, 성공자로, 변화된 내 모습 그보다도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변화된 자신이면, 내가 만난 예수를 힘 있게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어려분! 나중에 그렇게 말합시다! 기도와 말씀과 순종으로 오늘 내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에겐, 오늘 나에겐, 신전의식으로 새 힘과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셋째, 싸움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5 절 말씀부터 22 절까지 이 긴 말씀을 놓고서 무엇을 살펴보아야 하냐면 우리를 협박하고 힘으로 누르고 주의 말씀을 증거한 자들을 다 죽이고 한 이 세력과 이 세상 앞에 주께서 신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며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라고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 신앙생활은 불가능해집니다. 지금 이 상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교훈을 싫어하는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 다 모여서, 즉 오늘날 식으로 애기하면 대통령, 대법관, 국회의장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리는 모든 사람들, 별 단 장군들, 그리고 동네 깡패까지 다 모여서 몇몇 안 되는 사도들을 가운데 가둬놓고 너희가 무슨 권세로 무슨 힘으로 겁도 없이 일을 하느냐 라고 협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 일을 어떻게 수행했는가 보면 성령이 충만해서 그 일을 수행했다고 합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된다고 애기하면 쉽습니다. 깊은 신앙과 흔들리지 않는 신앙으로 지지 않고 싸우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말에 모순이 있는 것이 성령충만해서 결국 사도들은 그 끝이 죽는 것입니다. 하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신자에게 주었던 힘. 너희는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그 권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같이 세상의 권세에 대하여 그것을 막아낼 우리의 어떤 비방이며, 어떤 비결이며, 특별한 어떤 방패며, 우리만이 가진 저쪽이 모르는 기묘한 전략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사도행전 기록의 일관된 설명입니다.
세상이 가진 권세. 세상이 던지는 돌을 막아내는 어떤 실력, 그것으로 인하여 저들을 항복시키는 기적과 권능을 사도들에게 맡긴 적이 없습니다. 물론 복음서에서나 사도행전 기록에서나 성경 여기저기에서 우리는 많은 기적을 대합니다만 기적이 기적으로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고 기적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기록이 없습니다. 기적은 언제나 시작에 불과합니다. 주위를 환기시키는 정도지 기적으로 사람을 항복 시킨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세력과 싸우는 무기로서 아무것도 준 것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준 유일한 무기가 있다면 우리의 우리 된 것을 제대로 지키는 것밖에는 없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를 놓아라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놓아라, 그러면 우리의 답은 못 놓겠다 합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싸움을 그것 이외의 것으로 가져가면 이미 지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내 자식을 학교에 붙여 주십시오, 이 병을 낫게 해주십시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신앙에 있어서의 근본적인 싸움의 목록에 끼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십자가를 놓아라 이렇게 공갈을 놓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권세와 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들로 협박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놓으면 깔아 버리겠다는 것이고 우리의 답은 덤비려거든 덤벼라 입니다.
우리가 왜 이 싸움을 잘 봐야 되느냐 하면 여기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나에게 공격해 오는 것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십자가를 빼앗으려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느냐 하면 내가 십자가를 붙잡았기 때문에 이 싸움이 생겼다고 생각하지 않고 저들이 나를 공격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내가 하나님 편을 들었으니 하나님도 내 편을 들어 주십시오... 하면 이미 그 싸움은 지는 싸움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문제, 세상적인 압박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손에 잡고 있는 예수만 놓으면 금방 해결됩니다. 세상은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들고 있는 십자가, 내가 들고 있는 이 불을 끄려고 덤벼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먼 신자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가 신앙생활을 영위하고 있느냐, 제대로 신자 노릇을 하고 있느냐를 확인하는 성경식의 판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는가, 전도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신자 노릇을 하고 있느냐, 안하느냐를 묻지 않고 이렇게 묻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다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세상의 의, 선... 이런 거는 예수를 믿는 자의 의와 선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의와 선, 즉 박수를 받는 의와 선은 사람의 가능성과 자존심을 부풀려 주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면 에베레스트를 정복했다 하더라도 아무도 그 사람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같은 인간의 능력을 과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가를 확장시켜 주고, 확인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찬사를 보냅니다. 같은 인류의 이름으로, 같은 인간의 이름으로 나의 자신감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얘기하는 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의 문제는 인간이 누군가를 확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과 절망에 빠지게 하며 몸부림치게 하며 화로다! 나여 죽게 되었도다 라고 고함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를 하든가 아니면 그 불을 끄든가 둘 중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어떻게 죽습니까? 그의 설교에 대해서 아무도 항복을 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습니다. 이를 갈고 돌을 던집니다. 스데반은 '천사 같은 얼굴이 돼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옵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이것이 신자의 싸움입니다. 이것이 싸움의 본질이고 핵심이며 언제나 싸움의 형태는 그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사도들이 담대했던 것입니다.
잊혀진 가방이라는 선교 단큐멘타리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졌습니다. 김상철 감독이 만들었는데 출연진으로는 권오중, 이현우, 헬렌 로즈비어, 필립 우드, 낸시 우드... 등의 선교사들이 출현했고 이 영상 내용에는 선교사들이 두고 떠난 가방,그 안에 담긴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추적하는 내용입니다.
영국 런던에서 30분 정도 되는 거리에 불스트로드라는 지역이 있고 그곳에 오래된 성이 있다. 이곳은 선교단체이다. 이곳에 선교훈련생들이 교육을 받은 후 선교지로 떠날 때 두고 간 가방이 있다. 그리고 가방 중에는 70여년의 세월이 흐른 것도 있는데 아직도 가방의 주인들이 찾지 않고 있다고 한다. 권오중은 이 이야기를 듣고 가방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현우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게 되는데 가방을 볼 수 있는 허락을 받지 못한다. 선교적인 보안문제도 있고 개인의 소유물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어 가방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찾게 되고 결국 호주에서 지하창고에 있었던 가방을 보게 된다. 그 가방은 아프리카 콩고에서 선교사로 있었던 아이버 데이비스의 가방이었다. 가방은 철제로 되어 있었는데 그 이유가 아프리카의 더위와 벌레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가방의 주인인 아이버 데이비스가 죽자 아들에게로 전달된 것이다. 오중과 현우는 영국에서 지하실로 들어갈 수 없게 되자 콩고에서 사역을 하던 헬렌 로즈비어를 만나기 위하여 북아일랜드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아프리카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왜 돌아오지 못했는가를 알게 된다. 결국 오중과 현우는 한 지역에서 최소 20년 이상 최고 55년간 사역을 했던 선교사들의 삶을 통해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을 하기 위한 나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삶의 목적에 따라 가져가야 될 것과 버려야 될 것이 무엇인지 알아간다. 또한 참 된 신앙인의 삶이 무엇이며 인생의 절대가치가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영화는 마지막에 영국 불스트로드 선교단체의 지하창고에 들어가게 되었다. 콩고에서 만났던 선교사가 본인의 가방을 열어보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38년 만에 열어보았던 가방 속에는 과연 무엇이 남아 있었을까? 영화는 마지막에 다시 한 번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