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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20:01-16/ 일꾼에 대한 비유 [수요]
  • 조회 수: 778, 2013.11.17 21:07:25
  •   19장에서 우리는 부자 관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다. 부자는 결국 자기 소유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따를 것을 거절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는 자신과 동료들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쫓았은즉 그 대가로 무엇을 얻을까 하고 주님께 물었다. 이 질문은 동기가 잘못되었음을 드러내었다. 그가 그리스도를 섬긴 것은 무엇을 얻을 수 있기 위함이었고 충성과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이야기가 바로 일꾼에 대한 비유로 나타나고 있다.

    1. 포도원의 비유(1-16)

    1. 천국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초청에 의하여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주인이 일군을 구하러 마을로 나갔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설명해주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와 철학들은 제각기 다른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들을 제시합니다. 그리하여 어떤 종교는 선행을 제시하기도 하고, 또 어떤 종교는 고행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당신을 통해서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요14:6)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사도들을 핍박하던 예루살렘 공회에서 증거하여 이르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전4:12)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셔서 우리에게 직접 찾아오셔서 우리를 천국으로 초청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군들이 스스로 포도원을 찾아와 주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 일군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이미 있는 일군들은 유대인들을 말하는 것이고 찾으러 나선 일군들은 우리 자신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새벽에도 나가고 삼시, 육시, 구시, 그리고 십 일시에도 나가서 일군들을 찾아 포도원으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 언제든지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청에 응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2. 천국은 늦게 초청을 받은 자들에게도 커다란 은혜를 베푸는 곳입니다. 유대의 십 일 시는 오늘날의 오후 5시로서 저들은 비록 늦은 시간이었지만 소망을 잃지 않고 기다렸다가 일터로 초청받았던 것입니다. 해가 기울어진 오후의 늦은 시간에 일터로 초청을 받은 사람은 너무 늦게 초청을 받음으로 인해 일을 할 시간이 별로 없음에도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수고한 일군과 똑같은 대우를 해주었습니다. 이는 어렸을 때 예수를 믿은 사람이나 늦게 회심하여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나 모두 구원을 얻고 천국을 소유한다는 은혜에 대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구원에 대한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의한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은총으로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어떠한 한계적인 상황 속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포기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3.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되 가장 적당한 시기에 약속을 이행하십니다.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삯을 주라 하니'. 우리가 구약을 읽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많은 계약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많은 계약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번이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서 깨뜨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이스라엘과의 계약을 깨뜨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성실히 이행하신 사실을 우리는 구약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한번 세우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되 아무 때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따라 가장 적절한 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조급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우리 생각에는 더디게 생각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가장 적당한 시간에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합2:3) 

    세베대의 아들들의 요청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들 두 형제가 예수께 나아와 예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간청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육신의 소욕은 높아지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남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기를 좋아하고 남보다 귀한 명예를 누리기를 원하며, 남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자 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여 선악과를 따 먹었던 아담과 자신의 이름을 하늘에 까지 높이기 위해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과 같이 인간은 끝없이 높은 데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낮아진다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겸손은 곧 비굴로 생각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비참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들은 높은 것, 위대한 것만 알았지 겸손과 온유, 그리고 낮은 곳을 향하는 진정한 용기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낮아지셨고 낮아지심으로 그의 귀한 사역을 완수하셨습니다. 진실로 낮은 곳을 향해 찾아오신 주님, 그 주님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낮추지 않는다면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2) 육체의 소욕은 타인을 무시합니다. 높아지려는 마음은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타인을 그 희생물로 삼고 짓밟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타인의 권리나 이익,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도리어 그들은 그러한 이웃의 고통이 자신들의 출세에 대한 명확한 증거라 생각하며 추구할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교만한 자의 특성입니다. 교만은 타인에 대한 우월감으로 드러납니다. 약자를 밟고 서서 즐거워하는 우월감,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강한 자 앞에서는 비굴한 모습을 보이며, 언젠가는 그도 자신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야 말겠다는 사특함을 품는 악함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창조주로서의 우월감을 드러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따뜻한 위로자였으며 다정한 친구였고, 그리고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겸손한 구주셨습니다. 

    3) 육신의 소욕은 자신이 추구하는 결국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인간은 물질을 통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질이 영원한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육신의 것으로 영원한 삶을 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다 바람을 잡으려는 부질없는 노력에 불과합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우리에게 행복보다는 불행을, 평안보다는 근심을, 그리고 즐거움보다는 고독을 안겨다 줍니다. 우리는 물질을 영원히 소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정작 우리는 우리 생애의 마지막 날에 수의 한 벌 밖에는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내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내게 영원한 생명은 커녕 도리어 도적과 강도의 위협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무엇인가를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의 참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는 자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알 수 있습니다. 그서은 우리가 추구하는 세상적인 것의 궁극이 어떠한 것인가를 모든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는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모든 축복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 외에는 우리의 소망과 유익이 없습니다. 

    4) 이러한 육신의 소욕은 야고보와 요한 뿐만이 아니라 다른 열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들만이 주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에 앉기를 간구한 데 대하여 다른 열 제자들이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도 이러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열두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 두 제자만이 특별히 욕심이 많았던 것이 아님을 가르쳐줍니다. 욕심은 열두 제자 모두에게 있었으며, 단지 야고보와 요한은 그 대표자로서 나선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욕심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참된 성도라면 결코 자기만이 남보다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이기주의적인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5)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쉽게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찌기 마음 속에 품은 죄나 행동으로 드러난 죄가 차이가 없이 동일함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행동으로 드러난 다른 사람의 죄를 쉽게 정죄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고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눌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발견함으로써 남을 쉽게 정죄치 않는 진실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섬김의 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도들은 서로를 섬기기 위해 부름 받은 자들입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섬김의 도를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섬김의 자세는 그를 따르는 성도들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 받아 남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며 섬기기를 즐겨하는 그리스도의 귀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오셨습니다. 그는 영광스런 왕의 보좌를 버리시고 오신 분입니다. 그는 종의 신분을 취하셨습니다. 종은 섬기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겼고 인류의 종으로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고통과 고난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과 희생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사랑으로만 보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갈보리에서 확증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리아 산에서의 순종으로 응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소유한 전체를 드리는 제사이며 신앙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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