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홈페이지
  • 신약 마태복음 05:08/ 한 마음 [주일낮]
  • 조회 수: 1019, 2013.11.17 21:23:54
  • 우리들은 친구를 두고 살아갑니다. 대부분 좋은 사람, 내 인생에 유익을 주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의 친구라 그럽니다. 저에게도 그러한 친구들이 있지만 이 시간에는 좀 더 독특하면서 뒤 늦게사 친구로 인정해 준 저의 친구들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먼저, 저와 가장 오래된 친구인데요, 그 친구의 이름은 슬픔입니다. 다음으로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던, 나의 경계를 허물고 그 바운더리를 확장 시켜 주었던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은 고통입니다. 또한 내가 진짜 온전히 쉬고 싶을 때 가장 편히 쉬도록 그 자리를 마련해 주었던 친구, 그 친구의 이름은 죽음입니다. 끝으로 제가 무엇을 할 때마다, 아니 내가 숨 쉬듯이 내 호흡처럼 나를 따라 다녔던, 한 시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그 친구의 이름은 “콤플렉스”입니다. 저는 50평생을 이 친구들과 지금까지 동고동락하며 살아왔습니다. 지금에야 친구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이지, 사실 이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 웬수들 땜에 살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들을 피해 매일매일 도망 다녔습니다. 이것들을 잊기 위해, 이것들은 내 삶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른 그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다른 세상을 그리워하며, 그 다른 세상을 찾아 헤매고 또 헤매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살다가 문득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인생이 뭐 이렇습니까? 왜 저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나요? 억울한 사람이 이 세상에 왜 그렇게 많은 거죠? 하나님은 왜 가만히 계시나요? 세상이 이토록 험악한데... 하나님은 왜 그들을 도와주시지 않나요? 하나님은 도대체 있기나 한 건가요? 그러나 이런 불신과 의심 속에서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마태복음 5장 8절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지금까지 하나님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깨끗함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알기 위해 고민해 왔습니다. 깨끗한 마음이 무엇일까? 정직함?, 남을 미워하지 않는 마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마음?... 이런 질문들이 저의 마음을 어지럽힐 때 치유전문사역자 정태기 목사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분이 제가 고민하는 말씀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라는 말씀을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특유의 목소리와 말투로 “깨끗한 마음”의 어원은 바로 “한 마음”이라는 거라고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이 하나인 사람, 한 마음으로 사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마음, 하나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지금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혹은, 여러분 마음속에 슬픔이, 불만이, 억울함이 가득하십니까? 지금의 내 삶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내 모습이 부끄럽습니까? 이러한 내 삶을 미소로, 농담으로 회피한 채, 그저 바쁘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핑개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것들은 하루를 살다가는 모든 인간의 끝없는 문제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자기를 위로하고,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힘들게 살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삶이란 다 그런 거라고 일반화시키고 있지는 않는지요. 그러면서 공허함, 슬픔, 분노, 고통, 외로움, 콤플렉스들....등 자신의 어두운 부분들을 외면하기 위하여 술을 마시거나, 세상이 왜 이러냐고, 정치판이 썩어서 살 수가 없다고, 목사들이 목사 같지 않고, 교회가 교회 같지 않다고 내 삶의 고통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려 해서는 한 마음, 정직한 마음, 청결한 마음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피적인 삶의 자세로는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 곁에, 우리 안에서, 지금 우리가 고통스러우면 그 고통으로,  지금 우리가 외로우면 그 외로움으로, 지금 우리가 화가 나면 그 분노로 바로 그렇게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그 마음에 대해 내가 진실해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고통이 자리 잡을 때 그 마음과 하나가 되는 것, 마음에 수치감이 솟아오를 때 그 수치감과 깊게 대면하는 태도... 그렇게 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대들 기쁠 때에, 가슴속을 보다 깊이 들여다보라, 그러면 알게 되리라, 그대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로 그것이 슬픔을 주었음을.... 그대들의 존재 내부로 슬픔이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그대들의 기쁨은 더욱 커지리라, 그대들 중 어떤 이는 말한다. “기쁨은 슬픔보다 위대하다네”라고.... 누군가 또 말한다. “아니 슬픔은 더 위대하네” 라고 그러나 그대들에게 말하노라, 이들은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것, 이들은 함께 오는 것.....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닥친 모든 환난들 속에서 기뻐할 수 있음은 내가 약할 때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예루살렘, 영광과 권력으로 상징되는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던 예수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려거든 갈릴리, 즉 초라한 마을, 슬픔이 많은 동네, 불쌍하고 억울한 이들이 많이 사는 그 곳으로 오라고 하셨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우리의 적나라한 삶이 그대로 표현되는 곳.... 우리가 가기 싫어하고 보기 싫어하는, 우리 삶의 그늘진, 우리만이, 나만이 아는 바로 그 장소일 것입니다. 
    제가 앞에서 소개해 드린 고통, 슬픔, 죽음, 자신에 대한 콤플렉스.... 이런 것들을 피해 다니다 더 이상 도망갈 힘이 없어 한계에 부딪히게 되던 어느 날, 그것들이 제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들의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첫째, 자신들을 이방인처럼 외면하지 말고 사랑해 달라. 둘째, 네가 생각하는 기쁨, 평등, 평안, 자유의 삶은 그 어디에도 없으니 지금 너의 삶 그 자체를 이루고 있는, 지금 너와 가장 가깝게 있는 슬픔과 고통들을 네 삶으로 받아들여 달라!! 는 것입니다. 이렇게 깨닫게 되면서 이전에는 피하고 싶은 원수들이 지금은 저의 인생의 벗들로서, 친구로서 대접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우리를 골치 아프게 하고,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들이라고 해서 밀쳐둔 우리의 어두운 삶들이 어쩌면 우리의 삶을 가장 잘 인도해 주는 큰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과 입맞춤하고, 슬픔과 춤을 추고, 죽음과 삶이라는 신발을 자연스럽게 한 짝씩 신고, 하나님을 부르면 우리는 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이 하나의 마음이어서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을 만나는 구원의 삶이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하나님...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했는데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속이거나 부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마음에 받아드리면서 하나님을 찾는 마음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음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이해하고, 받아드리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진실하지 못하고 자신의 모습을 회피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이제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라는 찬송의 고백처럼 정직하고 진실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저의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복을 누리는 저희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 0 ...

번호  분류  제목  조회
notice 공지사항 93616
1978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139
1977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328
1976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390
1975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134
1974 요약 신구약 새벽설교 374
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