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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고린도전서 04:01-13/ 공동체가 사는 길 [주일낮]
  • 조회 수: 1088, 2013.11.19 19:17:36
  •   고린도전서의 이야기는 교회 내의 분쟁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시끄럽습니다. 나뉘어졌습니다. 그것도 나쁜 일로 그런 것이 아니라 좋은 일로 인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원래 고린도교회는 항구 도시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부산처럼 말입니다. 우리 교회 이름이 항도교회 아닙니까? 부산 갈매기 항도교회.... 지금은 항구도시라 해도 과거처럼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옛날에 항구도시는 교역의 중심지고.... 그러기에 돈이 많이 모입니다. 또 선원들이 돈을 푸는 곳이기 때문에 음란한 문화가 발전했습니다. 돈 많고, 음란한 도시.... 이게 바로 고린도였습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 안에도 음란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에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까? 고전5:1에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어쨌던 이런 분위기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각종 하늘의 은사들이 성도들에게 임하는데..... 이를 통하여 교회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나뉘어지고, 소란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배경이 고린도교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런 소란스러운 분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오늘 본문에 두 가지 덕목을 추천합니다. 무슨 덕목입니까? 

       첫째, 충성의 덕목입니다. 한 마디로 은사를 주시면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떠는 마음으로 겸손하여 충성을 다 해야 하는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것 가지고 자기 자랑만 일삼았다는 말입니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 첫 번째로 보고 받는 것이 W.M.D 핵전략 사령부의 작전계획보고서인데 미국의 대통령이 되면 자연스럽게 핵무기를 사용하는 최종 결정명령이 대통령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랍니다. 그래서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이 보고서를 받는 모든 대통령 당선자들은 그 순간 세계의 안보에 대한 책임의 중압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 명령 하나에 세계가 핵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어지니까 사실은 두려운 거죠. 그래서 교만해지고, 자랑하고, 뽐내고... 그럴 마음이 싹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약간의 오차도 엄청난 파국을 가져오니까 모든 것에 최선을 다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맡은 자가 가져야할 충성의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 2절에도 보니까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맡은 자라고 했는데 무엇을 맡았다는 말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맡았다, 직분을 맡았다.... 이런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은 사람들은 그것 가지고 자기자랑하면 안됩니다. 그것은 충성스럽지 못한 것입니다. 충성스럽다”는 말은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충성은 최선을 다 하는 것이며 또 이런 열심이 처음과 끝... 모든 과정이 한결같이 일관성 있게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스럽고, 끝에 가면 다시는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으로 낙인찍혀버립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맡는다는 그 자체가 중한 책임감을 느꼈다고 한다면 뽐내고, 교만하다가 교회가 다투고, 분열하고 하는 일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맡는다는 것.... 은혜를 입고, 은사를 받고,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참으로 막중한 사명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생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충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들에 충성해야 합니다. 오직 우리의 일생에 충성만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갈 우리의 자산입니다.   

      두 번째, 겸손의 덕목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과 파당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교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모든 것을 스스로가 얻은 것인 양 자랑했고, 모든 면에서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겸손의 미덕을 본으로 보임으로 그들의 태도가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지적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라는 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번은 시킬 일이 있어서 옆방에 있는 제자를 불렀습니다. “이보게...” 불렀는데도 그 제자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재차 불렀는데 그래도 대답이 없습니다. 분명히 옆방에 있는 것을 아는데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심부름하는 것이 귀찮다고 생각하여 대답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한 그는 제자의 방문을 신경질적으로 열어 제꼈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그는 그의 행동을 후회했습니다. 그의 제자는 하나님께 너무나 열심히 기도하므로 스승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기도가 끝난 후에 아우구스티노는 그의 제자에게 말합니다. 너는 너의 발로 나의 목을 밟고 ‘교만한 아우그스티노’라고 열 번을 외쳐다오. 내가 교만함으로 너와 너가 기도하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 이렇게까지 하여 참회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기독교의 영성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은 겸손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사랑을 받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겸손은 사랑을 담는 그릇입니다. 또 성 프란시스의 예화도 있습니다. 한 번은 그의 동료 수도사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프란시스... 당신은 가문으로 보나, 학식으로보나 그렇게 내세울게 없는데 어찌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따르며, 당신에게 듣기를 원하며, 당신에게 순종하기를 원합니까?” 이 때 프란시스가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위에 계신 분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서 나 보다 더 이상 낮고, 천하고, 더러운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나를 택하여 그 분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통하여 신분, 미모, 학식, 가문... 이런 것들을 부끄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그의 말을 듣고 모든 수도사들이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더불어 살면서 행복할 수 있습니까? 겸손하면 행복해집니다. 더 이상 내려 갈 곳이 없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세우고 “내 밑에는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나의 섬김의 대상이다" 는 자세를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서고 싶어 하고, 신앙생활에서도 은혜의 상봉에만 오르려 하는데 그럴수록 더 메마르고 피곤해지며 신앙생활이 힘들어질 뿐입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겸손의 골짜기로 내려가면 거기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흘러넘칩니다. 우리 항도교회 모든 성도님들, 그리고 저 자신이 한 없이 충성하고 겸손해지므로 항도교회 공동체를 세우고 신앙의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앞에 충성스럽고, 이 땅에 오셔서 온유하고 겸손의 모습을 보이신 주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는 죽음의 자리까지 낮아지신 그 겸손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우게 하옵소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는 자리까지, 그리고 온갖 나쁜 것들을 끌어안아야 하는 자리까지 내려갔을 때 우리는 그 자리에 서셨던 주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끝까지 주님의 마음을 품고 유지하며 살아갈 은혜를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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