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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약 마태복음 05:38-42/ 더하여 주자. [수요]
  • 조회 수: 524, 2013.11.19 19:27:48
  • 오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것에 대한 소위 보상법에 대해서 대조하여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으로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흔히 기독교 윤리의 극치라고 일컬어집니다. 혹은 기독교 생활의 절정을 소개하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또한 기독교의 대표적 교훈으로서 많은 사람들 앞에 소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을 참으로 묵상하지 못하고, 우리의 생활 속에 적용하는 데에 실패하는 일이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율법의 원리(출21:-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사실상 이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누가 나를 한 때 칠 때 나는 두 대 세 대를 치고 싶은 것이 우리의 감정입니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받은 것만큼 돌려준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니 율법은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에는 아주 정당하고, 신사적인 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여기에는 적어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함과 동시에 복수의 제한성을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명한 중국의 성도인 '위치만 니‘의 간증 가운데서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의 예수 믿는 한 성도의 논에 물이 풍성하게 고여 있는데 마침 가뭄이 찾아 왔습니다. 한 밤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 다 빠져나가곤 합니다. 그 성도의 바로 옆에 있던 이웃집의 논에서 밤새도록 그 성도의 논에 고여 있던 물을 다 빼 가 버린 것입니다. 그 성도는 그 물은 본래 자기 논에 고여 있었던 물이므로 당연히 그 물이 자기 논의 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당당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나뿐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이튿날, 이웃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왜 나의 논에 고여 있던 물을 당신이 다 빼내어 가는 것입니까?”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해서 이웃으로부터 사과를 받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논에 고여 있던 물을 다시 자기 논으로 되돌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튿날, 또 다시 물은 빠져나가 버리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다시 이웃으로 가서 물을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런 일을 몇 번이나 거듭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성도는 자신의 권리를 당당하게 주장해도 그 마음속에 도무지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제가 정당한 일을 하는데 왜 저의 마음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정당한 일만 하려고 하느냐? 정당한 일보다 더 위대한 일은 할 수가 없겠느냐?』 
     “하나님! 제가 정당한 일보다 그 이상 더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내가 너희에게 베풀어 준 것처럼 그 사람에게 대하라』 

      그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를 여러 번 물으며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위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이튿날 새벽녘이 되어서 이웃집 사람이 자기 논의 물을 빼어 가기 전에, 자기 논의 물을 빼어 이웃의 논에 물을 대어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마음속에 놀라운 기쁨과 평안이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2. 사랑의 원리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듯 공정하고 정의로운 율법의 원칙에 하나의 중요한 원칙을 더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인간은 마땅히 죽어야 할 심판의 자리에서 영생과 생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나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공정한 판단에 더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친다면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와 동시에 모든 분노와 원한을 없애고, 범법자에게 다가가 형제의 사랑으로 대해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몇 가지 예를 드셨습니다. 

      우리가 옳고 그름보다 더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바로 은총의 원리입니다. 이 은총의 원리를 깨닫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은혜‘란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입니다. 주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주께서 옳고 그른 것을 따져서 나를 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중에 아무도 주님 앞에 나아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은 조건 없이 나를 받아 주셨습니다. 나를 사랑하셨습니다. 나를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제는 행위의 원리에 의해서가 이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7절에 말씀하시기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의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행해져 온, 그리고 일종의 의무로까지 생각되던 복수심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말씀입니다. 주님은 복수심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아니라, 작은 불씨를 더 큰 불씨로 번지게 하는 무익하고 위험한 것이며, 영적인 생활과 사회적인 생활을 파괴하는 가장 치명적인 것임을 일깨워 주고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에게 불의한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의 마음 속에는 불같은 복수심이 생겨납니다. 이러한 복수심은 대부분 자신이 당했던 그 악을 동일하게 저지르고 나서야 잠잠해집니다. 따라서 복수심은 또 다른 악과 복수심을 불러일으키는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만일 이러한 악순환이 계속된다면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는 더 큰 재난과 불행을 당하게 되고 결국에는 파멸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주님께서는 복수를 금하셨을 뿐아니라, 악에 대적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한 것입니다. 

      악은 결단코 악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악은 더욱 큰 악을 초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이러한 특성을 아셨기 때문에 악을 이기기 위한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악을 이기기 위해서는 오직 선만이 필요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가장 허약하고 소극적인 방식 같지만, 영적으로 보면 가장 강력하고 적극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같은 삶의 방식과 기준을 따라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적하며, 이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대라. 

      그러므로 우리가 악을 선으로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오른 뺨을 치면 왼편도 돌려 댈 수 있는 이러한 신앙이 되어야만 하겠습니다. 지금 미국 교계에서 하나님 앞에 귀하게 쓰임을 받고 있는 톰 스키너(Tom Skinner)라는 부흥사가 있습니다. 그는 뉴욕 할렘가의 불량 청소년 갱단 두목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영혼과 삶이 뒤바뀌었으나 그가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옛날의 동료 하나가 톰 스키너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지나가는 톰 스키너의 뺨을 한 대 후려쳤습니다. 톰 스키너는 일어나면서 그 사람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여,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나는 너를 용서하노라.”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둔 사람만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본능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본능은 “복수하라”고 말합니다. 본능은 나에게 보복의 원리를 가르칩니다. 본능은 “편리하게 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자로 바라보기 시작한 사람만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 가라.(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억지로 가게 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ἁϒϒαρευω’(앙가류오)는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로서 ‘강제 징용’을 의미합니다. 당시의 로마법으로는 군인들이 행군할 때 백성을 강제 징용하여 5리씩 짐을 지워가지고 가서는, 거기서 또 새로 징발 당해 오는 사람과 교대하고 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경우 그 하기 싫은 일을 요구보다 배나 더 가주라는 말씀으로 조항적인 실행보다도 생활 철학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런 억지 요구에 배로 더해 주라는 말은 문자적인 해석보다는 상대방의 요구에 그 배로 더해 줄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러스킨’이란 사람은 말하기를 “선은 증오에서는 생길 수 없을 뿐더러 다른 데서 빌려 올 수도 없다.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행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을 주라.(40) 

      모세의 율법에 겉옷은 가난한 사람들이 낮에는 입고 다니고 밤에는 이불 대신에 덮고 자기 때문에 신명기 24장 13절에 보면 전당 잡기를 금지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본법입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주거 자유의 기본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빚을 받을 것이 있더라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에서 강제로 쫓아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겉옷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는 것을 네 기본권까지 포기하면서 까지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악한 마음을 사랑으로서 덮어 줄 수 있는 최고의 덕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4) 구하는 자에게 주라.(42) 

      물론 고려할 것 없이 달라는 대로 주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청구함을 받고 꾸어 주기를 바랄 때에 우리 마음에는 먼저 아깝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인데 그러한 마음을 깨뜨려 버릴 것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8장 13절에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입니다. 구하는 자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우리가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랑이 주님이 우리에게 분부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교훈이 준수된다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대하여 그 요구하는 이상의 것을 주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그 요구하는 이상의 일을 함으로써 말미암아 바람직한 사회가 이룩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참된 그리스도의 정신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해서 해(害)를 끼치려고 하는 자가 있을 때에도 자기가 받는 해(害)에 대하여 생각할 틈이 없이 상대방을 사랑하고 저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생각 이외에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완전히 이룰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놀라운 인격 가운데로 내가 온전해질 수 있는 은혜와 아름다움과 열매가 내 안에 맺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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